#153. 오디션 (3)2021.09.22.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한진석이 침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 아무래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요.
뭘 그만두는지, 어째서 그러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바로 알아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함께 방송밥을 먹었었고, 지금 그쪽 방송국 상황이 어떠한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마음이 떠났다곤 하지만, 소문은 내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저녁 어때요?”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대신 식사 약속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한진석이 저러는 걸까? 어지간하면 웃음을 잃지 않고, 늘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통화하는 내내 무거운 어조였다. 가끔 한숨을 내뱉기도 했고. 그만큼 힘들다는 거겠지. 신현정 PD를 대신해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담당하고 있는 피디가 머리에 떠올랐다. 주는 것 없이 밉상인 그의 얼굴이 생각나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난 한차례 고개를 내젓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 회의는 생각보단 금방 끝났다. 솔직히 300명에 가까운 인원 중에 반을 쳐내야 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종무 CP는 가벼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꽤 결단력이 있었다. 중심축이 될 몇 명. 일테면 한청이라든가 유수아 등 십여 명을 제외하곤 과감하게 쳐냈다. 그 과정에서 신현정 PD는 예능감을 무시할 수 없는 방송국 측과 요리 실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적절한 배분을 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128명은 내가 봐도 더할 나위 없는 인선이었다. 실력과 재능, 거기에 각자가 가진 성향과 함께 상당히 균형 잡힌 선택이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허리띠들 풀고 먹고 마시라고!”
이종무 CP는 새로 시작할 방송에 대한 기대감에 흥분했는지 통 크게도 <맛있는 도전>의 스텝들 모두를 횟집으로 이끌었다. 첫 회식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함께 할 수 없었다. 한진석과 저녁 약속을 했기에.
“아쉽네요. 나 오늘은 서 셰프님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기분 좋게 술 마시려고 했는데.”
결혼 3년 차인 박신영 작가가 농담을 던졌고, 김성희 조감독도 울상을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음, 어쩌다 보니 스텝들 중에 카메라 감독님만 빼곤 나머지가 다 여자들이네. 왠지 앞으로 꽤나 시달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으며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차를 몰아 약속장소로 향했다.
“일찍 왔나 보네요?”
한남동에 있는 레스토랑 안에서 먼저 온 한진석이 날 반갑게 맞이한다. 아직 6시가 안 되었다는 걸 확인하며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 셰프님 만나러 온 건데, 늦게 오면 안 되죠.”
“영광이네요.”
장난을 치면서 자리에 앉은 뒤, 서버인 직원을 불러 식사를 주문했다. 그 후로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얘기하며 밥을 먹고, 후식으로 차까지 마신 뒤에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어지간하면 붙어있으라고 하는데, 마음이 식어서 그런지 그게 쉽지가 않네요.”
들어보니, 납득이 된다. 방송은 애초 컨셉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튼 지 오래고, 출연진들은 겉도는 거로 모자라 어색한 연출과 더해져 감정 과잉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저번 주에 방송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시청률이 20%대로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담당피디와 방송국 측에선 출연진과 컨셉이 바뀌면서 언제고 한 번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문제라고 일축하고 있단다.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그렇게까지 싹 다 갈아엎었는데, 언제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그게 일시적인 문제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서 서 셰프님한테 물어보려고요.”
한진석은 돌려 묻지도 않았다. 아예 대놓고 직구를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내 얘길 듣고 판단을 내리겠다는 태도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하곤 사정이 다르지 않나요? 계약도 그렇고…… 쉽게 그만두긴 힘드실 거 같은데?”
“그렇긴 하죠.”
대답은 그렇게 하는데, 표정은 전혀 아니다. 방금 내가 말한 우려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 까닭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담당 피디님이 은근히 바라는 눈치더군요. 저 말고 눈여겨 본 사람이 있나 봐요. 아직은 방송국 때문에 함부로 말하진 못하고 있지만, 저번 촬영 때도 그렇고……. 아무튼,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면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알 만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생각이겠지. 다른 사람은 다 쳐낸 꼴인데, 딱 한 명 한진석만 여전히 MC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그게 어지간히 거슬린 모양이다. 뭐, 덕분에 일은 좀 쉽겠네. 한진석 입장에서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
“서 셰프님이 신현정 피디님이랑 함께 방송하시게 됐다고 얘기를 들었거든요.”
“예. 그렇게 됐어요.”
“그럼…… 저도 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다가 옅게 미소 지었다. 한진석이란 이름 석 자가 가지는 무게는 평소 나를 대할 때 그가 보이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밝고 활달한 성격이라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타입이었지만, 이름값만 놓고 보면 어지간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 오죽하면 국민 MC라는 말까지 들을까. 그런 사람이 겨우 프로그램 하나 꿰차고 날 만났을 리는 만무하다. 아마도 그는…….
“방송국에서 쫓겨나면 어쩌려고요?”
대놓고 묻자, 한진석이 씁쓸하게 웃는다.
“요즘 좀 그래요. 밑에서 애들 치고 올라오지, 회사에선 점점 아이돌이랑 배우들만 신경 쓰는 추세고. 우리 같은 개그맨 출신들은 갈수록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한진석 씨는 괜찮지 않아요? 인기도 많으시잖아요.”
“에이, 언제적 얘기예요? 그냥 사람들이 미워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싶은데요. 아시잖아요? 저 다른 사람들이랑 달리 방송 말고는 따로 하는 거 없다는 거. 그런데 방송국에서 잘리면…… 아유,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다 쳐 지내. 부탁 좀 드릴게요. 신현정 피디님께 얘기 좀 잘 해주세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현정 PD가 아니라 이종무 CP에게라도 말 한마디 하는 것쯤은 별거 아니다. 다만, 그 얘기를 꼭 내가 할 필요가 있느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한진석 본인이 직접 얘기하는 게 더 잘 먹히지 않을까? 설사 본인 얘기처럼 그의 인기가 예년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국민 MC로 불리는 그의 이름값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직접 하시죠? JTL에서도 좋아라 하지 싶은데요.”
“……그렇긴 한데.”
머리를 긁적이던 한진석이 내게 말한다. 멋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이왕 다시 시작하는 거, 서 셰프님랑 함께 해보고 싶어서요.”
흠, 대체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걸까? 나한테 뭐가 있다고. 내가 한진석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얼른 손사래를 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되었다. 그가 어째서 그러는지.
“아뇨, 아뇨. 오해하진 마시고요. 서 셰프님 이용해 먹으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
“서 셰프님이랑 방송하면서 느꼈던 건데…….”
그가 계속해서 얘기했다.
“촬영 참 재밌더라고요.”
*** 요는 그거다. 데뷔 20년 차에 이르는 방송인. 개그맨으로 시작해 오랜 기간 무명시절을 겪었던 한진석은 후에 MC로 각광받게 되면서도 언제나 절제된 행동과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채찍질할 동력원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더 이상 발전할 여지도 없었고, 뭔가를 원하는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돈도 어지간히 벌었고, 시청자들에게 사랑도 듬뿍 받았으니. 그렇다고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연예인이란 직업을 때려치울 마음도 없다고 한다. 그렇게 뭔가가 결여됐는데,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시간만 보내고 있던 그의 눈에 내가 띄었다나? 아무튼, 나랑 함께 방송을 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고 하니 뿌듯함조차 느껴진다. 뭐, 그래 봐야 잠시일 뿐이지만. 어차피 나하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데, 그게 얼마나 갈까 싶었다. 어찌 되었든, 사정이 그렇다는데 더 이상 따지고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난 신현정 피디에게 말해보겠다고 하곤 일어났다. 원래 이번 방송은 컨셉상 MC가 필요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지만, 한진석은 끝까지 내 손을 붙잡고 매달리며 그래도 좋으니 말이나 한번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왔다. 그러겠다고 하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간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가족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진석 때문에 괜스레 감성적이 된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냥 보고 싶으면 만나고, 그게 안 되더라도 이렇게 전화로 목소리를 들으면 되는 일이지.
“수아구나.”
- 엉. 오빠! 나 키 이만큼 컸다?
느닷없이 자랑부터 늘어놓는 여동생.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랬어? 와아, 우리 수아, 조금 있으면 오빠보다 더 크는 거 아냐?”
- 잉? 그, 그건 싫은뎅!
“크크큭. 그래, 그럼 오빠보다 딱 5센티만 작으면 되겠다, 그치?”
- 5센티? 그렇게나 크라고? 아앙, 그러려면 먹기 싫은 파도 먹어야 하고…….
울상을 짓고 있을 수아를 떠올리며 웃고 있을 때였다.
- 아유, 이 여우! 어디서 어리광이야! 얘 지금 약한 척하는 거야! 학교에서 남자애들 죄다 패고 다니는데 무슨…….
- 아앙, 언니! 왜 그래? 오빠가 오해하잖아!
- 오해? 오해는 무슨! 팩트겠지, 팩트!
“누나, 그만해. 그러다 애 울겠다.”
- 웬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뭘 또. 지난번에도 밤늦게 전화했었잖아.”
- 그랬나? 하도 띄엄띄엄 연락하니까, 헷갈리네.
저게 다 서운해서 하는 말인 건 알고 있다. 그건 그런데, 묘하다. 예전에 비해서 날 걱정하는 음성이 아닌 듯 느껴져서. 뭐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의아해졌지만, 일단 넘어갔다. 따지고 든다고 쉽게 얘기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답도 안 나오는 문제로 괜히 시간 끌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그럴 시간에 차라리 숙모님 목소리 한 번 더 듣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외숙모님은 주무셔?”
- 방금 설거지 끝내고 방에 들…….
- 진영이니?
“안 주무셨어요?”
- 아직 아홉 시 안 됐는데, 뭘.
“피곤하실 텐데, 쉬시죠.”
- 그이 들어올 때까지 책이나 읽을까 하고 있었어.
“몸은 좀 어떠세요? 저번에 일하시다가 발목 접질리셨다고 들었는데.”
- 얘는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해가지고.
- 내가 뭐얼! 없는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엄마, 진영이도 이제 애 아니야. 쟤도 알건 알아야 한다고. 가족이 아프면…….
- 누굴 닮아서 말이 저렇게 많은지. 진영아, 걱정하지 마. 이제 다 나았어. 여긴 다들 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는 일이나 잘해. 밥도 잘 먹고 아프지 말고, 알았지?
다정한 목소리 저편, 수연이 누나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뭐야. 발목에 파스는 붙이고서…….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외숙모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편이 외숙모 마음이 편하실 테고. 대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면 조만간 가족에 함께 모여 웃을 수 있겠지. 난 그때까지 참기로 하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안 그래도 방송 때문에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에 전화 드린 거예요. 전 잘 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요, 조만간 집에 들를게요.”
- 그래. 네 삼촌도 요즘 보고 싶은지, 자꾸 네 얘기 하더라. 지금 얘기 들으면 좋아하겠네.
- 히힛! 오빠! 얼른 와! 보고 싶엉.
- 와우, 왜 갑자기 덤벼들고 그래! 너 때문에 허리 눌렸잖아!
대체 어떤 자세로 있길래 허리를 눌렸다는 걸까?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한 자매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고 말았다.
“또 전화할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저택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맛있는 도전>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