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촬영 그리고 촬영 (3)2021.09.15.
신호가 울리자마자 받는다.
- 예, 피디님.
반가운 목소리다. 신현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시작했다.
“혹시 일하시던 중인가요?”
늘 그렇듯, 그녀는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이런 그녀를 보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왜 매번 같은 질문을 하는 거냐고. 하지만 신현정에겐 당연한 일이다. 습관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었고,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이 정도의 배려는 그녀에게 있어서 당연한 거였다. 이런 사소한 매너가 쌓여서 오래 봐도 껄끄럽지 않은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믿는 그녀였다.
- 아뇨. 방금 점심 식사 끝나고 쉬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럴 거라곤 생각했다. 서진영의 스케줄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데다가 저택의 사정도 대강이나마 알고 있어서, 일부러 식사 시간을 피해서 전화를 하고 있는 거니까.
“혹시 잊으셨나 해서 전화 드렸어요.”
- 예? 그게 무슨…….
“오늘부터 광고 나갈 거예요. 오디션 광고.”
- 아, 그렇군요. 요즘 너무 바빠서 깜빡했습니다. 그저 다다음주에 촬영 시작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네요.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요리를 할 때는 더 없이 진지하고, 누군가의 얘기를 들을 땐 한층 더 심각해지다가도 어떨 때 보면 뭔가 나사 하나 정도 빠져있는 듯 느껴지는…… 그래서 인간적인 매력도 갖춘 사람. 그게 그녀의 눈에 비친 서진영이었다.
“굳이 기억하실 필요는 없긴 해요. 그저 오늘부터 시작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수화기 너머에서 멋쩍게 웃는 소리가 들리다가…….
- 예, 피디님. 우리 한번 잘해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전화를 끊고 나서 신현정이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누구? 서진영?”
어느 틈에 왔는지 이종무 CP가 옆에 서 있다. 어찌 보면 남의 전화를 엿들은 셈이라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신현정은 그런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비밀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나름 기분 좋은 통화를 한 탓일 터였다.
“예.”
단답형의 대답이었지만, 이종무 CP는 흐뭇한 표정을 해 보였다. 왜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 전에 이미 이종무 CP가 먼저 얘기했기 때문이다.
“신 피디, 나는 왠지 말이야 이번 방송 초대박 날 거 같은 예감이야.”
“……?”
누가 보면 악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종무 CP는 웃고 있었다.
“완판됐거든.”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현정이 뒤늦게 그가 한 말을 이해하곤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벌써요?”
“그렇다니까. 앞뒤로 몽땅 나갔어. 흐흐흐, 내가 JTL에서 일한 지 올해로 딱 십 년째인데, 이런 거 처음 보는 거라고 하면 말 다 했지. 아직 촬영도 안 들어갔는데, 광고가 완판! 캬, 진짜 복덩이야, 복덩이.”
복덩이라는 말이 신현정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서진영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종무 CP는 더없이 즐거운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현정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 참, 혹시 얘기 들었어?”
그런 그녀에게 이종무 CP가 넌지시 묻고 있었다.
“뭐가요?”
“KBC 쪽은 난리 난 모양이던데?”
“예?”
“하긴, 이제까지 잘 굴러오던 방송을 그런 식으로 뒤집으려 하니 그게 잘될 턱이 있나.”
“아……!”
한 박자 늦게 상황을 눈치채곤 신현정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종무 CP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출연진들도 기겁을 한 모양이더라고. 유니크함을 기대하고 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식상하기 그지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무튼, 거기 분위기 지금 장난 아니라더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할 것이지. 쯧, 머리에 똥만 들어찬 것들이 인재 보는 눈이나 있겠냐고.”
혀를 끌끌 차고 있는 이종무 CP를 보면서 신현정은 착잡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을 내쫓다시피 한 KBC 방송국을 생각하면 괘씸했으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옥죄어 온다. 누가 뭐래도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신현정의 자식 같은 방송이었고, 한편으로는 지금쯤 마음고생 하고 있을 선배를 생각하니 웃을 수만도 없었던 것이다.
“왜? 신경 쓰여?”
뒤늦게 그녀의 신색을 알아챈 이종무 CP가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아뇨.”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따지고 보면 잘하고 있는 사람 들쑤셔서 일을 그렇게 만든 건 그쪽이잖아. 자업자득이라고. 물론 직접 기획하고 시청률을 한껏 끌어올린 방송인데, 그 심정이 오죽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잊어. 품 안의 자식이라잖아? 이미 신 피디 손을 떠난 거라고.”
알겠다고 대답하고 있었지만, 신현정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스쳤다. *** 벌써 두 번째 촬영이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금요일 저녁을 책임지는, 명실공히 KBC의 간판 예능 프로로 자리매김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그 프로그램의 MC인 한진석은 씁쓸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다. 새로운 컨셉에 맞춰서 세팅한 스튜디오는 꽤 공을 들였는지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세련돼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한때 방송에서 고정 프로를 맡으며 대한민국의 주부들이 잠 못 들게 했을 정도로 현란한 말발과 함께 과감하면서도 미려한 디자인을 선보였던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솜씨였으니까. 누구나 말하길, 국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꼭 외국에 온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덕분에 싹 사라져버렸다. 예전의 스튜디오에서 느껴졌던 따스함이.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컨셉 자체가 달라졌다. 이제까지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예능과 힐링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 시청자를 웃기고 울렸다면, 지금의 방송은…….
‘후우, 이건 그냥 예능이네, 예능.’
그랬다. 새로 온 담당 피디가 추구하는 건 철저한 예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게스트부터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요즘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7인조 보이 그룹을 섭외한 것도 그렇고, 그들을 불러다 놓고 촬영 내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에피소드 중심으로 시답지 않은 얘기를 이어가는 것도 그렇고. 누가 보면 요리 프로가 아니라 토크쇼인 줄 알 정도다. 그런데다가 메인 셰프를 비롯해 패널들도 진중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니, 한진석은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현정 피디와 서진영이 그리워지는 그였다.
“오빠! 오늘도 즐거웠어요! 다음 주에 봬요!”
참네, 눈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는 거지. 다른 출연진들이 촬영 내내 얼굴 썩어들어가는 거 못 봤나? 첫 촬영이야 그렇다 치지만, 두 번째 촬영을 하면서도 감동은커녕 삼류 토크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자 종래엔 다들 싸한 눈빛들을 흘렸구먼.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픈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드는 헤나. 무려 3명이나 되는 패널들 한 명으로 불과 2년 전만 해도 스피너스의 센터로 활동하던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한진석은 속이 다 울렁거렸다.
‘……발연기라더니. 미연이가 와서 해도 그것보단 낫겠다.’
참고로 미연이는 이제 막 돌 지난 조카다.
“예. 헤나 씨도 잘 가요.”
평소라면 가슴이 뛰게 만들었을 오빠란 소리도 전혀 즐겁지 않다.
“셰프님! 같이 가요!”
메인 셰프를 향해 달려가는 헤나의 뒷모습이 왠지 지금의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보는 것 같아서 입맛이 쓰기만 하다.
‘하아, 진짜 고민되네.’
한진석이 요즘 들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다른 건 둘째치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듯하다. 피디를 지나쳐 스텝들과 인사를 하곤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며 그는 망설임 끝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들리는 가운데 귓가로 가져가는 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반가운 이름 석 자가 떠 있었다. 신현정 피디의 이름이. ***
“피디님, 얘기 들으셨죠?”
조감독의 얘기에 노경환 피디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빛으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말입니다. 거기 장난 아닌 모양이던데요?”
“뭐가?”
“완전 막장으로…….”
“강현우.”
“예?”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니다.”
“……예.”
“가서 일 봐.”
조감독이 처진 어깨를 한 채 돌아서 물러나는 걸 보면서 노경환 피디는 눈살을 찌푸렸다. SBC 예능국의 간판 피디인 그에게 있어 경쟁상대라 할 수 있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몰락은 더할 나위 없이 기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더러웠다. 시청률을 잣대로 삼아 경쟁이란 걸 한다면, 이기든 지든 이런 식은 아니란 생각. 단순히 개운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굳이 말하자면, 신현정 피디나 자신이나 같은 처지. 같은 업종에 종사한다는 식으로 말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신현정 피디가 느끼고 있을 심정이 짐작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만일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만, 모르긴 몰라도 난리를 쳤을 거다. 어쩌면 홧김에 한국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만큼 그가 지켜본 작금의 상황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갓 나은 아이를 어미에게서 빼앗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겨질 만큼이나.
“그래도 다행인 건가?”
요즘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문에는 JTL로 옮겨간, 정확히 말하자면 KBC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신현정 피디를 때는 이때다 하며 냉큼 주워 담은 JTL에서 새로운 프로를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요리 오디션이라고 했던가. 이미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서 신현정 피디와 손발을 맞춰봤던 서진영 셰프가 주도하는 방송이라고 들었다.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 동시에 호승심도 일었다. 프로는 바뀌었지만, 상대는 바뀌지 않은 셈이니까. 두 사람, 신형정 피디와 서진영 셰프를 머릿속에 떠올린 노경환 피디.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은 금방이었다. 어느새 노경환 피디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 1월 넷째 주 수요일.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 앞치마를 벗고 있는데, 준석이 형이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지금 가는 거냐?”
“그래야 할 거 같아요. 혹시라도 길 막히면 좀 그렇잖아요. 첫날인데.”
“그야 그렇지. 모름지기 사람은 신용이 제일인데, 약속을 펑크낸다는 것 자체가 근본이 썩었다는 거니까.”
“큽, 지금 압박하는 거예요?”
“이게!”
“으헉!”
헤드록을 걸어오는 준석이 형. 풀려면 얼마든지 풀 수 있었지만, 장단을 맞춰줬다. 크게 아프지도 않거니와, 이런 식으로 형과 장난을 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다녀. 차 몰 때 앞뒤 잘 살피고.”
“흐흐흐. 제가 또 한 운전……. 억!”
“운전 잘한다고 사고가 피해 가냐? 잔말 말고 조심해!”
“알겠어요.”
주방 안쪽에선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던 안성댁 아주머니와 혜순이 누나가 우릴 웃으며 쳐다보고 있다.
“다녀올게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곤 주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숙소로 가서 간단히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곤 차를 몰아 밖으로 나왔다. 이하연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도 그때였다.
“아, 하연 씨!”
- 지금 가는 거예요?
“예. 막 저택에서 나왔어요.”
- 조심해서 다녀오고요. 그리고 음…….
“……?”
- 아녜요. 오늘 잘해요.
뭔 얘기를 하려고 하다가 말을 삼켰는지는 모르겠다만. 웃으며 대꾸했다.
“예. 잘할게요.”
- 화이팅!
“크크, 화이팅!”
전화를 끊고 나서 막 핸들을 잡는데, 톡이 울린다.
- 예쁜 여자가 막 들이대도 넘어가면 안 돼요! 알았죠!
크크큭. 아까 하려던 말이 이거였구나. 귀엽다는 생각에 웃으면서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 2주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벌어지진 않았더랬다. C 마트 광고는 아직 나가지 않은 상태였고 김서연으로부터 받은 제안대로 광고 계약은 했지만, 촬영은 아직이었다. 그리고 보그와의 인터뷰도 다음 달 초에 잡혀 있었다. 눈에 확 띄는 건 역시 강형식이 런칭한 ‘서 셰프의 선택’인데. 놀랍게도 지금껏 팔려나간 것만 해도 매출이 벌써 20억 원을 넘겼다고 한다. 그 외엔 별다른 일이……. 아, 새로운 컨셉으로 돌아온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지난주 금요일에 방송되었더랬다. 음……. 보면 짜증 날 거 같아서 보진 않았는데, 평이 그다지 좋은 거 같진 않았다. 뭐,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것보다는 오늘부터 촬영하게 될 <맛있는 도전>이 중요하다. 지난 2주 동안 줄기차게 광고를 때린 덕분에 꽤 많은 지원자가 모여들었다고 들었다.
“후! 조금 긴장되는데?”
긴장은 긴장인데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어제저녁부터 가슴을 울리고 있는 기대감과 함께 살짝 흥분된 상태랄까.
“합!”
기합을 넣으며 액셀을 밟았다. 강형식으로부터 받은 라이칸 하이퍼스포트가 호쾌한 질주를 시작한다. <맛있는 도전>의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