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 촬영 그리고 촬영 (2) (149/204)

#149. 촬영 그리고 촬영 (2)2021.09.12.

이번 광고가 거의 블록버스터급이라고 듣기는 했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촬영은 3일 내내 이어졌고, 촬영장소도 도심에서 놀이공원, C 마트 매장 그리고 세트장을 오가며 쉴 새 없이 연기해야 했다. 대본상으로 봤을 때와는 무척 다르다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겨우 삼 일에 불과한데……. 배우들은 이 힘든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니, 내심 존경스러울 정도다.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따지고 보면 연기의 연자도 모르는 아마추어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잘 해냈다는 생각에. 특히나 모든 촬영을 대역 없이 해냈다는 게 뿌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끝은 있는 법. 관절이 다 삐그덕거릴 정도가 되고, 허벅지를 비롯해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다 비명을 내지를 때 즈음 촬영이 끝났다.

“후우, 끝난 건가?”

시원섭섭한 마음에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설마요.”

응? 언제 왔는지 권태홍 감독이 옆에 서 있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대로 헤어지면 아쉬울 테니 식사나 한 끼 하시죠.”

“밥만 먹나요?”

“그럴 리가요. 술은 종류대로 다 있으니 물릴 때까지 드시죠! 아, 참고로 투 플러스입니다. 한우로요!”

환호성이 들리고 배우들과 스텝들, 스턴트맨들까지 함께 차를 나눠타고 이동했다. *** 회식 자리는 꽤나 시끄러웠다. 겨우 3일이었지만 다들 친해진 상태였고, 이번 광고가 워낙 스케일이 커서인지 고생도 많이 한 탓이었다.

“와아, 진짜 거기서 직접 뛰실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까요. 서 셰프님,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뭘요. 몇 미터 되지도 않았는데요.”

“어? 그건 아니죠. 3미터나 되는…….”

“2.7미터였습니다.”

“그래요. 2.7미터라곤 해도 디딤발을 놓을 자리가 경사져 있었다고요. 더구나 아래쪽으론 쑥 꺼진 골이 있고. 우리처럼 스턴트도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한, 어지간한 사람은 다 겁먹게 돼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덕분에 감독님만 신나셨죠. 당연히 잘라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롱테이크로 뽑았으니.”

“크!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그 장면 말고도 좋은 장면이 많으니 분명 광고 나가면 사람들이 놀랄 겁니다.”

“저는요? 전 별로였어요?”

“아유, 신연수 씨야 말할 나위가 없죠. 베테랑이신데. 최고였습니다!”

웃음이 터진다. 고생한 만큼 좋은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며 권태홍 감독을 비롯해 스텝 모두 기뻐하는 눈치였고, 스턴트를 담당한 배우들도 기분 좋게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물론 신연수를 포함해 연기자들도 오늘만은 허리띠를 풀고 기쁘게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렇게 흥겨운 술자리가 이어지는데, 가게 입구 쪽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니 권태홍 감독이 마중 나가는 게 보인다. 누구지? 또 올 사람이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응? 김서연? 저 여자가 여길 왜? 그때, 김서연이 날 발견하곤 천천히 걸어온다. 멋쩍어서 시선을 돌리는 사이,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오랜만에요.”

느닷없이 등장한 그녀의 등장에 술이 확 깨는 느낌이다.

“어……. 예. 그러네요.”

“잘 지내셨죠?”

KS 그룹 회장의 손녀이기도 한 김서연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한 탓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지난번 일로 어색함이 남아 있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이상한 일은 다들 그녀의 등장에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뭐랄까. 익숙해 보인달까? 그럼 오늘 여기 온 것도 나 때문은 아니란 건데. 아니 그건 또 아닌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내 옆으로 와서 자리를 잡은 걸 보면…….

“광고 찍으신단 얘기는 들었어요.”

“…….”

“일찍 오려고 했는데, 출장 다녀오느라 시간을 맞출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셨군요.”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에요.”

어느 틈에 마신 건지, 비어있는 술잔을 내미는 그녀를 한차례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하연과 사귀게 된 지금은 더이상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순 없을 테니까.

“그땐…….”

“잠깐만요.”

“……?”

“오늘은 사업차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적인 얘기라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업? 난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연이 내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어 한큐에 들이켠다. 하아……. 귀신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얘기가 너무 빨라서 따라갈 수가 없다.

“사업이라면?”

결국,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날 보면서 김서연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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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머리야…….”

미칠 듯이 머리를 쑤셔대는 느낌에 신음이 절로 나온다. 덕분에 절로 이마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키던 나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으음…….”

낯설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탓에 어둡기만 한 도심이었다. 그나마 곧 동이 트려는지 하늘은 서서히 푸른빛을 더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시야가 분명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분명히 느껴진다. 여긴……. 내 방이 아니다. 그럼 어딜까? 잠깐 동안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가 싶더니 어젯밤 일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김서연!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땐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있었지. 설마……? 놀란 난 눈을 크게 뜨고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길 잠시.

“후우…….”

다행히 방 안에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침대 역시 내가 누워있던 곳 말고는 누웠던 흔적이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혹시나 몰라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 안을 샅샅이 훑었다. 역시나 나 말곤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호텔인 모양인데…….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기억이 안 나는 거람.

“나 혼자 왔을 거 같진 않고.”

누구지? 여기까지 날 데려온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볼 수 있었다. TV 옆, 미니바 위쪽 거울에 붙어있는 메모를. 술이 많이 약하신 듯하네요.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몰라서 여기로 데려왔어요. 어제 하던 얘기는 마무리 지어야 하니, 일어나면 전화해 주세요. P.S 차는 호텔 지하로 옮겨놨어요.

“끙.”

글씨체가 딱 봐도 여자다. 어제 회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스텝을 포함해 여자는 다섯 사람. 하지만 어제 하던 얘기라는 데서 걸러진다. 뒤늦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남해 쪽에 대규모 휴양단지를 조성했거든요. 그래서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려고 하는데, 서진영 씨 얘기가 나왔어요. 지난번 광고를 보신 회장님께서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신 것도 있고 해서 임원들 대다수가 찬성한 상태고요.”

  김서연과 나눴던 얘기들. 뜻밖에도 진짜 사업 얘기였다. 광고 귀신이 붙었나. 올해 들어 찍은 광고만 두 개다. 한데 촬영 끝나자마자 또 찍잔다. 너무 잘 풀려도 이런 기분이 들 수 있구나. 솔직히 겁난다.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기분이랄까. 이러다가 어느 순간 고꾸라지기라도 하는 거 아닐지 두렵다.

“일단 좀 씻고.”

밤새 뭔 짓을 했는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속이 다 울렁거린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였기에 망설임 없이 옷을 벗을 수 있었다.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샤워실로 향하려던 때였다. 까똑! 흠칫. 톡이 울린다. 핸드폰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 일어났어요?

이하연이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내려본다. 후우, 장난 아니네. 밤새 온 톡만 무려 열 개가 넘는다. 그걸 읽다가 웃고 말았다. 날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래, 뭐.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뒤늦게 미소를 머금고는 답톡을 보내기 위해 자판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 밤새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민망하기만 하다. 대체 뭔 정신으로 그렇게 퍼마신 건지. 한숨이 다 나오려고 한다.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아직까지 아프다. 해가 막 뜨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를 몰았다. 비가 오려나. 잔뜩 어두운 하늘. 구름이 끼어 있다. 그걸 보면서 어제 김서연과 나눈 얘기들을 최대한 떠올리려고 애썼다. 휴양지 광고라…….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론 홈페이지 들어갈 사진 몇 장과 배너 등에 쓰일 간단한 광고가 다이지만, 그렇다곤 해도 역시 익숙한 일은 아니다. 한편으론 묘한 기분이다. 나 진짜 요리사 맞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본말전도인데. 이러나저러나 요리를 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저택에 요리 보조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기회들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난 본업인 요리사보단 연예인에 가까운 스탠스다. 이래서야 아저씨가 준 칼이 울겠다. 끝내 한숨을 내쉬곤 다짐해본다.

“이번 일만 끝내면…….”

어지간해선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말아야겠다. 신현정 피디와 함께 찍게 될 방송만 빼곤 요리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디션이 얼마 안 남았네.”

어느새 <맛있는 도전>의 1차 예선이 이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방송국 내에서 사정이 있는지 열흘 정도 밀렸다고 한다. 신현정 피디가 말해주지 않아서 그 사정이 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안 그래도 바쁜 나로서는 오히려 그편이 좋았다. 그렇긴 한데……. 역시 오디션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다 픽하고 웃고 말았다. 촬영에 촬영…… 거듭되는 촬영으로 이젠 예전과는 달리 떨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이젠 촬영을 겁내긴커녕 기대감이 들다니…….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문득 또 다른 기대감이 차오른다. <맛있는 도전>을 통해 나 역시도 나름 요리 실력이 꽤 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오디션을 보면서 이런저런 과제를 던져주는 것도 그렇지만, 나중에 레스토랑을 오픈했을 땐 말 그대로 수석 셰프가 되어 가게 두 개를 이끌게 될 테니까. 나쁘지 않은 흐름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뜩 떠올랐다.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 난 김에 전화를 걸까 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따가 점심때쯤 전화하지 뭐.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터뷰도 이것까지만 해야지. 누가 뭐래도 난 요리사잖아. 그편이 강형식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런 결심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이 아무 말 않는 걸 보면 문제는 없는 듯하다. 빠앙.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너무 깊이 상념에 잠겼던 걸까. 뒤에서 클랙슨을 울린다.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곤 차를 출발시켰다. *** 신호가 가다가 반갑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서 셰프님!

“잘 지내셨어요?”

언제나 그렇듯, 잡지사 ‘더 센스’의 남윤주 팀장은 밝기만 하다.

- 그럼요. 셰프님 덕분에 이번 호가 완판됐거든요. 위에서도 무척 좋아하고 있고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예? 아, 예……. 그래요.”

아침에 이미 결심을 굳힌 상황인지라 다음엔 힘들겠다고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설사 진심일지라도 나중의 일인데 벌써부터 까칠하게 굴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시간이 지나서 내가 좀 더 여유로워지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 아, 혹시 이사벨…… 보그 쪽 일 말씀인가요?

“예. 그쪽에서 제안한 거 때문에요.”

- 하시려고요?

반가운 기색. 분명 보그 쪽하곤 아무 관련이 없을 텐데 저리 기뻐하는 걸 보면, 그녀도 어지간히도 착하다 싶었다. 친구를 생각해서 그러든, 날 위해 그러든 간에 자기 일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전화를 받는 것 자체가 귀찮을 법도 한데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다.

“그럴까 합니다.”

뭐, 그렇기에 부담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한 거지만.

“이사벨라 씨에게 연락을 할까 하다가…….”

말끝을 흐리자, 눈치챈 남윤주 팀장이 까르르 웃는다. 영어로 대화해야 할 상황이 부담스러워 그런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역시 센스 하나는 좋다.

- 알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연락해볼게요. 지금은 저쪽이 한밤중이라 이따가 오후에나 통화될 거예요. 전화해보고 연락드려도 되죠?

“제가 부탁드리는 입장인데요, 뭐.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다시 한차례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 그럼 이따 뵈…… 아니, 통화해요.

전화를 끊는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더없이 해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눈앞에 선해서. 그때였다.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핸드폰의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피디님.”

신현정 피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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