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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촬영 그리고 촬영 (1) (148/204)

#148. 촬영 그리고 촬영 (1)2021.09.10.

촬영지는 도심 한복판이었다. 계약은 이미 한 상태였고, 심지어 계약금까지 받은 뒤였다.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10억. 그만큼이나 받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솔직히 놀랐더랬다.

“대본은 보셨죠?”

이미 한차례 함께 해본 대일 기획의 권태홍 감독이 살갑게 그에게 묻고 있었다.

“예. 보긴 봤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와이어 액션이 처음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서 셰프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대체 나한테서 무얼 보고 저렇게 장담하는 건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빌딩 숲 사이로 퍼져있던 촬영 스텝들이 웅성거린다. 그러더니 인파가 갈라지며 누군가가 다가온다. 응? 여배우인가 본데? 누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는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배우였다. 신연수.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연기 또한 출중한 여배우였다. 그 덕분에 그녀는 이미 두 차례나 드라마 주연을 맡았고, 매번 공전의 히트를 하며 스타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아, 신연수 배우님 오셨습니까?”

묘한 어감이다. 배우님이라……. 그런 단어도 있었나? 뭐, 말이라는 게 적당히 마음만 전해지면 되는 거겠지.

“오랜만이네요. 감독님.”

인기 스타는 CF 단골 모델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요즘 핫하디 핫한 신연수가 작년 한 해 동안에만 찍은 CF가 두 자릿수를 넘겼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대일 기획과 함께 찍은 것도 있었고, 보아하니 권태홍 감독과도 구면인 모양이었다.

“인사하시죠. 여기는 오늘 광고를 함께 찍게 될 서 셰프님. 그리고 여긴…….”

“신연수예요.”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엔 대본 리딩도 한다던데, CF는 그런 게 없는 건가? 아니면 여기서만 그러는 건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난 신연수는 소문대로였다. 예쁘긴 예쁘네. 물론 이하연만은 못하지만. 머릿속으로 이하연의 커다란 눈망울을 떠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서진영입니다.”

조금은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신연수가 배시시 웃는다.

“자자, 그럼 조금 쉬었다가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권태홍 감독의 말에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메이크업부터 할게요.”

그러라고 대답하자,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가 내게 달라붙었다.

  ***

“테이크 1-1.”

슬레이트 클래퍼 보드가 딱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의 지미집 카메라가 보였지만, 없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후우,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우주비행사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내 팔뚝의 두 배는 됨직한 부피는 둘째치고, 등에 걸머메고 있는 산소통…… 정확히는 산소통 모형이 생각보다 무겁다. 무엇보다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헬멧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채로 신연수를 비롯한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콰앙! 갑자기 들려오는 폭음. 화들짝 놀란 신연수가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쐐액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에서 돌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앞뒤에서 날아든 돌들이 바닥에 부딪히며 부서져 나가는 모습이 사뭇 위력적이다. 하지만, 안다. 저 돌들이 우릴 덮칠 일은 없다는 걸. 동시에 이것도 알고 있다.

“크악!”

함께 촬영 중인 배우들 중 한 명이 바닥에 나뒹구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중에 CG로 입혀질 장면이지만, 일단은 설정상 저 배우가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쏟아진 돌들을 맞고 쓰러지고 있다는 것. 그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기묘한 장면의 진실이다.

“광호야!”

“안 돼요! 이미 늦었어요!”

권태홍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땅이 갈라지고, 그 틈바구니로 광호라고 불린 남자가 빨려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죽는 거다. 그리고 우린 쫓기듯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 거고.

“달려!”

내가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리자, 머뭇거리던 이들이 뒤따랐다. 그중에 가장 빠른 건 신연수였다. 가느다란 다리임에도 악착같이 쫓아오는 모습이 남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컷!”

권태홍 감독의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들려온다.

“나쁘지 않아요! 그래도 한 번 더 가봅시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었다. *** 때는 2130년경. 번성하던 인류 문명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천재지변으로 지구를 떠난 지 어언 백 년여가 지난 후였다. 화성에서 출발한 탐사대가 찾은 고향은 말 그대로 폐허였다. 그 속에서 탐사대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도시를 샅샅이 수색. 그러다가 마주한 건물. C 마트라고 적힌 간판과 함께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깨닫는다. 이곳이야말로 인류가 남긴 거대한 보고임을.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이 사용하던 모든 물품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선반 위에 쌓여있는 모습은 가히 경이로운 정도였다……라는 게 광고의 컨셉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C 마트는 100년이 지나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쇼핑센터라는 거고, 한편으로는 언제 어느 때 찾아도 놀랄 만큼 좋은 물건들만 판매하는 기업이란 이미지 광고다. 그걸 조금은 극적인 장면들로 연출해 SF적인 감각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게 이번 광고의 핵심이었다.

“좋습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죠!”

어둠에 내려앉은 거리를 헤매다가 들개 떼로부터 습격을 받고 처절하게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끝으로 오늘 촬영이 끝났다.

“후아! 장난 아니네요.”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숨을 몰아쉬자, 신연수가 풉하고 웃는다.

“잘하시던데요, 뭘.”

“아, 잘하기는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죽겠습니다.”

스텝 중 한 명이 나눠 주는 생수를 따서 마시며 앓는 소리를 하자, 그녀가 농담을 건네온다.

“승렬이 오빠가 그러던데요? 뭐든 잘하는 분이라고.”

“어? 승렬이랑 친한가 봐요?”

“영화 같이 찍은 적 있거든요.”

“그래요?”

참네,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 못 사는 거다. 어떻게 한 다리만 건너면 죄다 지인이니.

“요리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대체 뭘 소리를 한 건지……. 전혀 아닙니다. 요리도 아직 멀었지만, 그나마 그거라도 할 줄 알아서 목구멍에 풀칠하고 사는 거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만, 저 고졸이에요.”

이상한 일이다. 겨우 하루다. 알고 지낸 지. 그런데도 류승렬이라는 공통 인자가 끼니, 이렇게 쉽게 얘기가 오간다.

“지난번에 찍은 자동차 광고……. 직접 운전하셨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어이가 없어서 눈을 치뜨자, 신연수가 눈짓으로 권태홍 감독을 바라본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대역 없이 운전하셨다고. 그때 카레이서 팀에서 영입 제의까지 할 정도였다고 침까지 튀기며 얘기하시던데요?”

“아! 진짜…….”

입이 가벼울 거 같은 인상이긴 했다만, 그런 얘기까지 하고 다닐 줄 몰랐네. 난 권태홍 감독을 한차례 쳐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 오법니다. 운전대 잡고 액셀 밟는 정도는 다들 하잖습니까? 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은 아니죠.”

신연수가 웃음을 참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때 그녀의 매니저가 다가오고…….

“그럼, 내일 뵐게요.”

“예. 내일 봬요.”

겨우 하루였지만, 생각보다 힘든 일정에 기운이 쭉 빠져서 간신히 대답하곤 돌아섰다. *** 다음 날 오전부터 촬영은 재개되었다.

“이번 씬은 들개 떼로부터 도망쳐 A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입니다. 다들 안전 주의해주시고요. 자, 그럼 리허설부터 가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나와 신연수를 비롯해 몇 명의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저희가 보조해드릴 테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고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대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와이어 액션이라곤 하나 그리 어렵지 않다는 듯 얘기하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말처럼 쉬우면 스턴트맨이 왜 필요하겠냐고. 흠, 어쩔까? 이미 계약 단계에서 얘기가 오간 부분이긴 하다. 테이크를 끊지 않고 가는 게 역동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기왕이면 내가 직접 연기하는 게 베스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스턴트맨이 대역을 하고, 연기를 시작할 때와 끝낼 때만 내가 나서도 된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할 때 권태홍 감독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빛나곤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가뿐히 무시해줘도 되겠지. 당연한 얘기지만, 객기 부릴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아무래도 전 힘들 거 같아요.”

신연수가 4층 옥상 난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고 있다. 예상하던 반응들이다. 하기야, 말이 쉽지 무려 4층 높이에서 기울어진 벽을……. 정확히는 세트장이지만, 아무튼 아찔한 높이의 벽을 타고 내달리며 도로 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무섭지 않을 리 없지.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기에 당연히 못 하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얼씨구? 이 타이밍에 나레이션? 대충 감이 온다. 동시에 기시감도 들었다. 서킷에서 핸들을 잡았을 때도 이랬지. 덕분에 미친 듯이 트랙을 돌며 액셀을 밟아대던 게 눈에 선하다. 아니나 다를까. - 와이어 액션은……. 빠르게 설명하는 나레이션. 현재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조언이 이어졌다. 어딜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또 어떤 식으로 발을 놀려야 하는지. 뛸 때는 디딤발을 중심으로 몸을 어느 쪽으로 기울여야 하는지 등등.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나레이션에 나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렇게 실시간 속성 과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번 해보죠.”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그렇게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겁나지 않냐고? 음,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긴 한데……. 두렵기보단 기대가 된다. 희한할 정도다. 뭐랄까. 꼭 놀이공원에 와서 어트랙션을 타기 직전 느끼는 흥분감이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마도요?”

고개를 끄덕이자, 저만치서 권태홍 감독이 묘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녹색으로 뒤덮인 비탈진 세트장은 대략 2층 높이. 바닥 역시 녹색이었는데, 나중에 CG가 입혀질 거라고 했다. 현재 내 몸에는 보호대가 채워진 상태였고, 등 뒤쪽으로는 와이어가 늘어져 있었다.

“테이크 7-4. 레디 액션!”

권태홍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스턴트맨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 한 명이 발을 헛디디며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흠칫.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액션이었다.

“뛰어!”

누군가 소리쳤고, 다른 두 명의 스턴트맨들이 짧은 도움닫기로 몸을 날리는 가운데 나레이션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나 하는 느낌이었다. - 정신 바짝 차려라! 헐. 황당했지만,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타닷! 기울어져 있는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찰나, 나는 이미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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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아래쪽을 바라보는데……. 발아래 쑥 꺼진 공간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더구나 몸을 날리는 바람에 더해진 속도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큭! 이러다가 죽는 거 아냐? - 겁먹지 말고 앞만 바라보는 거다! 망할 나레이션!

“으아아아악!”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2m? 3m? 건너편 건물…… 정확히는 나중에 CG가 입혀질 구조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억!”

턱!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 속에 몸이 쑥하고 밑으로 꺼져버린다. 그 순간,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끄어어억!”

정말이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매달렸다. 사방은 고요했고, 오로지 내가 내는 신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거려 몸을 끌어올렸다.

“후아!”

위쪽으로 기어올라 몸을 던지곤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때였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냈구나.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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