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출시 (3)2021.09.05.
강형식에게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 뭐야, 왜 얘기를 하다가 말아?
“어? 아니……. 할 말이 있어서.”
- 할 말? 무슨?
“음, 내일쯤 강윤식을 만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해서.”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그만큼 강윤식이란 이름은 조심스럽다. 정확히 말하면 강윤식이라기보단 그 뒤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되겠지만.
- 내가 먼저 만나보면 어떨까?
녀석이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나름대로 참고 있는 걸 테다. 마음 같아선 내키는 대로 힘껏 들이받고 싶겠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하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거겠지.
“아니. 그 문제는 나한테 맡겨뒀으면 좋겠어.”
이미 일전에 얘기했던 대로 진행하는 게 베스트다. 녀석도 그걸 알고 있다 보니, 금방 수긍한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엔 다소 힘이 빠져있다.
-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걱정하지 마. 별 탈 없을 테니까.”
……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얼른 끝내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준비는 잘 돼가?”
- 그거야 이미 끝났지. 며칠 내로 광고도 나갈 거다.
“바쁘겠네.”
- 정신없긴 하지.
“그래. 애쓰고. 나중에 보자.”
- 오케이. 저녁에 들어가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형식과 통화를 하는 동안, 나레이션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나레이션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후우. 맞는 얘기이기는 한데…….”
지독히도 냉철하다. 차가울 정도로. 하긴. 지금의 삼한은 전쟁터나 다름없으니까. 적어도 강형식에게는. 더구나 강윤식을 비롯해 강형식에게 적대적인 세력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내 몸을 의탁한다는 건 어찌 보면 뱀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럼 어쩐다? 김진숙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강형식과 의논해서 새로 회사라도 만들라고 할까? 흠, 그러기엔 녀석이 너무 바쁜데.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거 같더구먼.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었다.
“아우, 몰라.”
안 그래도 복잡한데…….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자꾸만 떠오르려는 잡생각을 애써 떨치며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어느새 해가 지려는지, 서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
“이건가?”
강윤식이 기다란 유리병을 들어 올리자, 부하직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출시하는 건 총 8종으로 고추장 2종, 된장 3종, 간장 3종인데…….”
남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얘기를 한참 동안 말없이 듣던 강윤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지.”
고개를 내젓는 강윤식. 그는 머릿속에 서진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그럴 생각이었군.’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안을 했을 때, 서진영이 열흘을 기다려달라고 말하던 순간에. 아니 그전에 짐작하고 있었다. 서진영이 절대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서진영은 자신의 사촌과는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하기엔 단단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뭔지는 모른다. 다만…….
“시답지 않기는.”
자신이 속한 혈족은 옛날로 치면 왕족이다. 21세기에 있어서 재계 1위에 올라 있는 삼한 그룹은 사실상 청와대의 윗줄에 놓여 있으니까. 그에 비해 서진영은 평민일 뿐. 겁도 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숨어서 간교한 술책을 쓰려 한다면, 그저 가볍게 밟아주면 그만. 대체 무엇이 강형식을 변화시켰는지 궁금했고, 그 원인을 따라가다 보니 서진영이란 인물이 나왔기에 관심을 가져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필요 없다. 적으로 돌아선 이를 용서할 만큼 그는 자비롭지 않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할아버지……. 삼한 그룹의 가장 높은 곳, 권좌에 앉아 내려올 생각을 않는 회장님께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경쟁은 용인하다.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쳐내는 것도 눈감아 준다. 하나, 그룹의 성장을 방해하는 건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 자신과 강형식의 할아버지이기 전에 대한민국 아니 세계까지 뻗어있는 거대한 그룹의 총수가 내세운 단 하나의 룰이다. 그걸 어겼다가는 설사 아버지가 막아선다 해도 화를 면치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웃어도 좋다. 머잖아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지.’
서슬 퍼런 기세를 흘리며 강윤식이 들고 있던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물었다.
“주식 매입 상황은 어떻지?”
그렇게 묻는 그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서진영은 물론이고 강형식이란 존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평상심을 되찾은 강윤식은 이제, 더욱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선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 박 실장이 가져온 상품들을 보면서 김진숙 회장은 몇 차례인가 눈을 빛내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픽하고 웃고 말았다.
“참, 재주가 좋아? 그치?”
“그렇습니다. 설마하니 이런 재능까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 셰프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인 모양입니다.”
박 실장의 얘기에 김진숙 회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거야 당연한 얘기고. 지금 말한 건 강형식인데?”
“아!”
피식.
“참 용하단 말이야. 어찌 알았을까? 서 셰프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인걸. 역시 피는 못 속은 걸까?”
“어릴 때부터 똑똑하기로 소문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렇긴 한데…… 둘이 만난 건 얼마 안 됐다면서?”
“예. 서 셰프가 삼한 그룹 회장 자택으로 들어간 게 반년이 채 안 됩니다.”
“용해. 그 짧은 기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진숙 회장이 병을 들어 올리곤 이리저리 살핀다.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겠네.”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좀 더 강하게 푸시해 볼까요?”
“아서. 괜히 역효과만 날 거야. 서 셰프, 보기엔 순해 보여도 심지가 굳잖아. 그런 사람은 억지로 밀어붙이면 될 일도 안 돼. 지금껏 한 대로만 해. 그게 최선이야.”
“…….”
“욕심대로 다 되면 사업 어렵다는 얘기가 왜 나오겠어? 그러니 박 실장도 명심해. 내가 보기엔 서 셰프……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 가치가 절대로 작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늘 살펴보고 남들하곤 다르게 다가가는 게 맞아. 진심은 언제든 통하는 법이니까.”
물론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돈과 지위 등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그것까지 얘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김진숙 회장이었다.
“그럼 광고는?”
박 실장의 얘기에 김진숙 회장이 다시 한번 웃어 보인다. 더없이 밝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음성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어쩌긴? 물들어오기 전에 배부터 띄워야 하지 않겠어?”
조속히 시행하란 얘기. 오랜 기간 옆에서 김진숙 회장을 보좌해온 만큼 박 실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서 셰프한테 연락해보겠습니다.”
*** C 마트의 박 실장에게서 연락이 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 혹시 바쁘신가요?
“아뇨. 방금 들어왔습니다.”
차 키를 협탁에 올려두곤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양말부터 벗으며 말했다.
“혹시 매니지먼트 때문에 연락하신 건가요?”
오늘 김진숙 회장을 만나고 왔는데, 이렇게 빨리 전화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분명히 말했을 텐데. 생각해보고 연락한다고. 한데 이러는 건 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 아뇨. 그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음, 그래요? 그럼?”
- 일전에 회장님께서 말씀해두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 본사 광고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아, 그렇군요.”
요즘 이래저래 예민해져 있어서 오해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 저희 측 입장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광고를 찍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2월이면 연휴가 시작되는데…….
잠깐 동안 설명하는 박 실장의 얘기는 핵심만 짚어서인지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요는 음력 1월 1일 일주일 전부터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이 주 전에는 광고 촬영이 끝나야 하니, 사실 지금도 그리 빠르다고 하긴 어려울 터다. 안 할 거면 모를까,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저쪽 스케줄에 맞춰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되도록 C 마트 쪽 스케줄에 따를 테니, 미리 얘기만 해주시면 될 것 같네요.”
이후의 얘기는 촬영을 담당할 대일 기획 쪽과 협의하기로 했고, 계약 직후 바로 촬영하는 거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박 실장과 통화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주방에 들렀다가 점심 무렵 저택을 빠져나왔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계속해서 주방일에 소홀하게 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일들이 연거푸 터졌고, 그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주방 식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저택을 나서는 길이었다.
“내가 요리사인지 아닌지도 이젠 모를 지경이네.”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며 차를 몰아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40여 분 뒤. 일부러 주변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곤 목적지까지 걸어갔더랬다. 그편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도착해서 눈앞에 서 있는 높다란 빌딩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엄청난 위용이긴 하네. 삼한그룹 본사가 둥지를 틀고 있는 빌딩은 말 그대로 근방의 건물들을 압살하는 수준이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을까. 머리를 스쳐 가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솔직히 말하면 만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약속은 약속. 그렇긴 해도 강윤식을 만나기 위해 적진에 몸을 던지는 꼴이다. 겁을 먹거나 한 건 아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적아를 구분 짓는 선을 긋게 되는 셈이니 긴장이 좀 되는 거지. 그래, 까짓 강윤식 따위가 뭐라고. 그와 약속한 시각이 열흘이었지만, 하루 이틀 먼저 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터다. 마음을 다잡은 뒤, 건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생각은 좀 해봤나?”
강윤식은 책상에 앉은 채로 여유롭게 묻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길게 늘어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얘기는 짧을수록 좋으니까. 그런 날 강윤식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는 게 보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구나. 하기야 모르려야 모를 수 없겠지.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강형식이 런칭을 준비 중인 ‘서 셰프의 선택’에 대한 얘기는 그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알든 모르든 간에 이젠 돌이킬 수도 없고, 설사 이제 와서 그가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이쪽대로 시간을 벌었으니까.
“알겠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
이걸로 끝? 조금은 당황스러운 결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그가 묻는다.
“더 할 말이 남았나?”
“……아뇨.”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곤 군말 없이 물러났다. 그렇게 다소 긴장하고 있었던 일은 맥없이 끝났다.
“잘된 건가?”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 예전부터 강형식과는 한배를 타고 있었지만, 오늘로써 그 사실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 물론 후회하거나 하진 않는다. 굳이 나레이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제 와선 녀석…… 강형식은 내게 있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렸으니까.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전화를 걸었다.
“방금 강윤식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 음, 그래? 괜찮은 거지?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 그렇긴 하지. 오케이. 어젠 내가 바빠서 못 만났지만, 오늘 저녁에 잠시 보자. 술이나 한잔하자고.
“바쁜 거 아니었어?”
- 다 끝났어. 아, 그렇다고 해서 발매 전까진 마음 놓을 순 없지만, 하루 정도는 좀 쉬어도 될 거 같아.
“알겠다. 집에 가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 속도를 높였다. 녀석과 통화를 해서 그런지, 살짝 복잡해졌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제 시작인 건가?”
‘서 셰프의 선택’ 출시를 비롯해 <맛있는 도전> 촬영과 방영까지. 결코 쉽지 않겠지만, 하나씩 이뤄나가다 보면 분명 성과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녀석이나 나나 나름 성장하지 않을까? 적어도 난 자신 있었다. 보조라는 수식어를 뗀, 한 명의 요리사로서 바로 설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