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출시 (2)2021.09.03.
C 마트 본사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성수동. 기존의 C 마트 건물 바로 옆에 신축한 빌딩은 무려 20층이나 된다. 요즘 짓는 빌딩들이 하나같이 높은 층수를 자랑하니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막상 와보면 그 위세가 대단하다. 특히나 강남에 비해 높은 건물들이 많지 않은 한감 이북은 이처럼 높은 빌딩 앞에 서면 절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좀 다르다.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테다. 주차장으로 쏙 들어가는데, 높은 빌딩에 대한 감상 따위 느낄 틈도 없다. 지난번 미팅 때 왔을 때 그랬다는 얘기였다. 요즘 들어 라이칸 하이퍼스포트를 모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나였지만, 오늘만은 혹시나 몰라 벤탈리스타를 타고 온 터였다. 설마 김진숙 회장이 주차장까지 내려올 리는 없겠지만, 보는 눈이 몇 개인가. 우연히라도 날 아는 누군가가 내가 타고 온 차를 보고 한마디 한 게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일.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닐지라도 선물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이쯤이야 뭐. 지하 주차장 한쪽에 차를 세워두곤 회장실이 있는 20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서진영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회장실 앞쪽에 설치된 기다란 안내 데스크 너머로 아리따운 여성이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말하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해 짧게 통화를 한 그녀가 내게 다시 말했을 때, 난 상상했던 것보다 단조로운 느낌의 실내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여긴 처음 와본 터였다.
“이쪽으로.”
“아, 예.”
비서일까? 난 여자를 쫓아 걸어가며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플하다. 그러면서도 조명은 밝다. 어딘지 모르게 김진숙 회장의 성격이 고스란히 느껴진달까. 하긴, 취향이라는 게 그런 법이지. 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통로 끝자락에 이르러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야 옆으로 비켜서는 여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곤 문을 열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요.”
김진숙 회장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날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쵸?”
“예.”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날 소파 쪽으로 이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회장님도요.”
“호호호. 이러고 있으니까, 느낌 참 묘하네. 서 셰프 처음 봤을 땐 우리가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 그땐 진짜 상상조차 못했더랬다. KS 그룹 진 회장 팔순 잔치 때 처음 봤었는데…….
“문득 궁금해지네. 그래서 그때 준 명함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하나?”
그때 받은 명함은 아직까지도 김형식에게 주지 않은 채 내가 가지고 있다. 김진숙 회장은 당시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명함을 줄 거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난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대체 누구한테 주려는 걸까?”
어떻게 생각하면 불쾌할 법도 한데, 마치 게임을 즐기듯 웃고만 있다. 그러면서도 내 눈을 바라보는 시선은 돌리지 않고 있었고. 참 부담스러운 눈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든든한 아군이 생기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군? 서 셰프 말대로라면 난 누군가랑 싸우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누구랑 싸우는 걸까, 나는?”
싱긋이 웃고 있을 때, 비서 한 명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부려놓고 나간다.
“들어요.”
“예. 감사합니다.”
김진숙 회장을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문을 열었다.
“그것까지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압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에 아무것도 묻히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그것이 땀이 될지, 오물이 될지 혹은 피가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깨끗한 손으로 쌓아 올릴 수 있는 금자탑은 없다. 적어도 기업 간의 경쟁이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치열한 세상에서는.
“흠, 우문에 현답이네.”
쓰게 웃고는 김진숙 회장이 날 가만히 쳐다본다. 그 눈길이 아까보다 더 부담스럽게 느껴져 아닌척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서 셰프.”
은근히 날 부르는 목소리에 어째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회장님.”
“내가 서 셰프 아끼는 거 알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본격적으로 활동해볼 생각 없어요?”
김진숙 회장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대체 무슨 말이지? 본격적인 활동? 이해할 수 없는 얘기에 난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지, 회장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네요. 어떤 활동을 말씀하시는 건지?”
“훗, 그래요. 그런 면이 서 셰프 매력이기도 하지.”
다시 한차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내려놓으며 김진숙 회장이 방금보다 한층 강해진 어조로 얘기했다.
“방송.”
“……?”
“직업을 바꾸란 얘기는 아니고.”
대충 예상은 했다만. 이런 얘기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는 동안, 김진숙 회장의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이에요.”
“……방송을 늘리란 얘깁니까?”
따로 계약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사실상 스폰서나 다름없는 그녀의 제안이었기에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제안이 나와 강형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도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걸 쪼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욕심만 앞서서야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방송이든 뭐든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서 셰프가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할 사람도 아니고.”
“그럼?”
내가 되묻자, 김진숙 회장이 싱긋이 웃으며 얘기했다.
“이제 서 셰프도 매니지먼트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긴 했지만, 광고나 그밖에 사업에 관한 것만 떠올렸을 뿐, 설마하니 그런 얘기를 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생각해보고 연락 줘요.”
회장실을 나서기 전 김진숙 회장이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차에 올라탔다.
“연예기획사라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연예기획사 얘기를 할 줄이야. 한데, 차를 몰아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김진숙 회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 광고라든가 방송 출연 시 계약도 성가신 문제고, 무엇보다 스케줄 관리가 골치 아프긴 하다. 확실히 이점은 요즘 들어 느끼는 바였다. 두 주일에 한 번씩 했던 방송 촬영은 그렇다 치고, 인터뷰라든가 광고를 위한 사전 미팅까지 포함해 일주일 한두 번은 주방을 비우게 되는 지금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 않다. 특히나 신현정 피디가 새로 찍게 될 방송은 전반부는 사실상 오디션 프로라 할 수 있었고, 가게를 얻어 실제로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되는 후반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가깝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신없는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날 옆에서 보조해준다면? 편한 만큼 집중할 수 있고, 또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결 여유가 생기겠지.
“나쁘진 않네.”
그렇긴 한데, 문제는 그걸 꼭 김진숙 회장과 해야 하는가이다. 음, 아무래도 이 문제는 강형식과 제대로 의논해봐야 할 듯싶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성수대교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린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통화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예. 피디님.”
- 잘 지내시죠?
통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말씀하신담. 알고 지냈지 꽤 됐는데도 여전히 예의를 지키고 있는 신현정 피디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못 지낼 이유가 있나요.”
……라곤 했지만, 눈앞에서 강윤식의 웃는 낯짝이 떠올라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벌써 약속했던 날짜도 다 지나서, 적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대답을 들려줘야지 싶은데……. 뭐, 정보력은 이쪽보다 한 수 위니 지금쯤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이미 파악했겠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설사 처음부터 다른 생각을 가지고 했던 것일지라도. 어길 이유는 없다. 당연히 미안하거나 부끄럽게 생각진 않는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철저히 이득을 따져 제안하고 또 고민해보겠다고 한 것이니까.
“혹시 대본 나온 건가요?”
- 예. 방금 나왔어요.
흠,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방송국엘 한번 다녀오는 게 나았으려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신현정 피디가 직접 전화해서 이런 얘기를 할 게 아니기 때문. 권위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방송의 큰 줄기를 잡는 것만 해도 정신없이 바쁠 텐데, 이런 잡다한 일들은 조감독이 하는 게 맞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랑은 일면식도 없는 조감독에게 맡기기보다는 신현정 피디가 직접 연락하겠다는 마음으로 전화를 한 듯싶은데……. 뭐, 그것도 첫 촬영이 끝나면 말끔히 해소되겠지만.
“기대되네요.”
- 메일로 보내놨으니 한번 보세요. 그리고…….
“…….”
- 다음 주부터 광고 나가요.
“광고요?”
NEW SJ7 얘기는 아닐 테고. 뭘 말하는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였다.
- 예선이요.
“아!”
<맛있는 도전>이 오디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당연히 광고는 필수다. 사람이 모여야 오디션을 봐도 보는 거니까.
- 서울과 수도권 일대랑 지방 대도시 위주로 1차 예선을 할 예정이에요. 초반부엔 촬영도 그렇게 갈 거고요.
“음……. 심사위원은요?”
- 당연히 서 셰프님께서 봐주셔야죠.
억! 지방까지 전부 나 혼자 커버하란 얘긴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저 혼자서요?”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농담임을 알아차렸다.
- 서울만 봐주세요. 나머진 이미 섭외해놨어요.
다행이란 심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꽤 많을 텐데 용케 섭외하셨네요.”
- 스텝들이 여간 부지런하니까요.
하기야 방송국에 인재가 얼마나 많을까. 관련 학과를 졸업한 데다가 경력들도 상당해서, 겉으로 보기엔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다들 재능이 충만하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조강훈 FD도 Y대 출신 아니었던가.
“하루에 끝나나요?”
- 서류 심사랑 면접뿐이니까요.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진 않겠다고 생각하다가 쓰게 웃었다. 내 생각만 한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나야 하루에 불과하지만, 방송국 입장에선 하루 이틀이 아닐 거다. 각 도별로 두 군데씩만 잡아도 16군데는 족히 넘을 테니. 거기에 수도권 지역은 워낙 인구가 많아서 서울을 포함해 열 군데 정도 될 테고. 그걸 다 합치면 필요한 카메라 수만 수십 대다. 말할 것도 없이 스텝들도 한두 명 필요한 게 아니고. 촬영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는지는 모르지만,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고생하시겠네요.”
- 일인데요.
그렇게 얘기한 신현정 피디는 다음 주에 보자는 말을 남겨놓곤 전화를 끊었다.
“진짜로 시작하는구나.”
나레이션으로부터 비롯된 프로젝트. 규모 면에서 보자면 어지간한 예능 프로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처음에 신현정 피디에게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진짜로 될까 싶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가시적으로 다가오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강윤식인가. 내일쯤 만나봐야겠지. <맛있는 도전>의 촬영 전에는 얘기를 마무리해야 할 테니. 그전에, 우선은 아까 김진숙 회장과 했던 얘기에 대한 것부터. 난 핸들을 쥔 채 한 손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에서 강형식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즈프리였기에 일부러 차를 멈춰 세울 필요는 없었다.
“어, 나야.”
- 무슨 일인데? 오늘 C 마트 본사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서 뭐라고 해?
생각이 깊은 건지 걱정이 많은 건지.
“그런 건 아니고.”
막 김진숙 회장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머리를 울리는 BGM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서진영이 기획사에 적을 둘 요량이면 삼한 그룹과는 관련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게 맞을 터다. 그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