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출시 (1)2021.09.01.
해가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1월 중순이다. 오늘 아침엔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또 한 번의 주말을 앞두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달까. 그만큼 정신없이 지냈다는 방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잘하고 있는 걸까? 곧 있으면 런칭할 브랜드…… ‘서 셰프의 선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사람들한테 욕먹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다. 누가 만든 건데. 강형식이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에서도 믿음이 갔지만, 그 이전에 레시피 자체가 사모님의 것이다 보니 출시되는 상품에 대해선 아무런 의심이 없다. 다만……. 날 전면에 내세웠다는 게 불안할 뿐.
“후우,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지금 난 ‘서 셰프의 선택’ 광고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와있다.
“서 셰프님, 대본은 확인해 보셨죠?”
삼한 그룹의 계열인 광고사인 애드샤인이 규모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나 국내 최고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인력 풀 또한 어마무시한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톱 3에 들 만큼 뛰어난 감각을 보유한 이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다. 이주한 감독. 서른세 살이라고 했던가? 굳이 말하면 큰 형뻘. 아니 삼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음에도 그는 이제껏 내게 반말 한번 하지 않는다.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필요한 말만 해오고 있었다.
“예. 확인했습니다.”
“좋네요. 그럼 간단히 리허설 한번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곧바로 촬영 들어가도록 하죠.”
이미 메이크업까지 끝마친 상태였기에 언제든 촬영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스텝을 따라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은 꽤 정성껏 꾸며져 있었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은 어느 가정집의 주방을 통째로 뜯어내 가져온 듯한 느낌. 흔하디흔한 스타일의 현대식 부엌은 보편화 된 아파트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서 난 칼국수를 만들었다. 물론 양념은 ‘서 셰프의 선택’을 사용했고.
그렇게 리허설과 본 촬영을 동시에 진행해 마무리한 뒤에도 장소를 옮겨가며 광고를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한 촬영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고, 하루 동안 나와 함께 움직이며 땀깨나 흘렸을 스텝들이 이주한 감독의 촬영종료 선언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힘드셨죠?”
웃으며 다가오는 이주한 감독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이게 내 일인데요.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뵐 거 같은데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세요.”
“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작업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주한 감독을 비롯한 스텝들과 인사를 한 후 돌아 나오는 내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느낌이 좋다. 광고 자체는 평이한데, 어쩐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컨셉이랄까. 어째서 이주한 감독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광고 감독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출시만 하면 되는 건가? 홍보에 쓰일 사진은 이미 찍어둔 뒤였기에, 여기서부턴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강형식이 출시 전에 한 번 보여준다고는 했는데 아직 얘기가 없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난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이곤, 에드샤인이 있는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삑! 손에 쥔 리모컨을 누르자, 검은 차체의 날렵한 모습을 지닌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린다. 라이칸 하이퍼스포트. 며칠 전 강형식에게서 거의 강제로 주어진 차였다. 나참, 페라리 피닌파리나 세르지오가 너무 부담스러워 거절했더니만 그보다 한 단계 윗급으로 가져다주는 녀석의 배포란 진짜……. 연간 7대만 한정 생산된다는 수식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눈앞에 서 있는 차의 가격은 어마무시하다. 340만 달러. 우리 돈으로 36억 원이다. 트윈 터보 엔진을 심장으로 달고 최고출력 719마력에 최고시속은 무려 395km/h, 제로백은 2.8초란 엄청난 스펙을 지녔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슈퍼 스포츠카니까. 하지만, 시트가 금실로 스티치되어 있고, 티타늄으로 처리된 헤드램프에는 총 15캐럿 가치의 다이아몬드 420개가 별처럼 박힌 채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장식의 역할만 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과연 웃을 수 있을까. 중동 최초의 슈퍼카답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타고 다니라는 건지.”
그나마 다행인 건, 페라리 피닌파리나 세르지오와는 달리 오픈카는 아니라는 점. 그렇다곤 해도 주차는 되도록 실내에 할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고.”
사실 마음에 들긴 한다.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남자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갈 만큼 멋진 차를 한차례 둘러본 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우우우우웅. 시동과 함께 들리는 엔진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 다음 날 오전. 서울에서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눈앞에 있었다. 우웅. 도로를 달리는 내내 육중한 엔진음을 토해내던 라이칸 하이퍼스포트의 배기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보조석에서 놓아둔 쇼핑백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차는 다 좋은데 수납공간이 너무 없다는 게…… 음, 내가 이런 불만을 할 처지는 아니지. 강형식에게 선물 받았다는 건 둘째치고, 애초에 이차는 딱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니까. 그저 잘 달리고 잘 멈추는 차. 거기에 더해 남자들의 로망을 현실화한 디자인만으로도 존재 가치는 충분하잖아. 난 픽하고 웃으며 핸들을 살짝 두드리곤 차 문을 열었다. 잠시 후, 집 앞 대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곽기범이란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패가 들어온다. 어쩌다 보니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 지난해 처음 대장간을 찾아갔을 때가 떠올라 웃고 말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 진영이니?
사모님의 목소리였다.
“예. 저 왔어요.”
대문은 열리고, 그와 동시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현관문이 열린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뛰어나오는 사모님을 본 질겁했다.
“그러다 감기 드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호호호.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야?”
“얼른 들어가죠. 바람이 차요.”
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겨울인지라 찬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온다. 특히나 여긴 더하다. 아무래도 강원도다 보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이가 너 온다고 아침부터 일어나서…….”
“객쩍은 소리! 애 춥게시리 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버럭버럭 내지르는 음성에는 희한하게도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사모님과 난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웃고 말았다.
“바쁘다면서? 뭐 한다고 여기까지 기어와?”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가 보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없이 반갑다는 표정이다. 아저씨가 창 쪽을 등지고 앉아계셨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리라. 아마 내가 오기만을 아침부터 기다리셨지 싶다.
“바쁘죠. 바쁜데, 그렇다고 여기 오지 못할 만큼은 아니에요.”
“말하는 본세를 보니 한가한가 보군.”
“아니라니까요. 진짜 바빠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그래도 여긴 와야죠. 아저씨도 아저씨지만, 사모님 뵈러.”
“아직 식전이지?”
사모님이 내게 묻고선 대답도 하기 전에 부엌 쪽으로 움직이신다. 그러는 동안 아저씨는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셨다.
“다람쥐야? 뭘 그렇게 챙겨와?”
“에이, 이거 다 사모님 거예요. 아저씨건…….”
눈에 띄게 언짢아지는 아저씨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여기에 뒀죠. 떨어뜨리기라도 했다간 큰일 나니까요.”
내가 내민 작은 상자를 포장도 푸르지 않은 채 이리저리 보던 아저씨가 내게 눈빛으로 묻는다. ‘이거 뭔데?’ 하면서도 입가엔 은근한 미소 한줄기가 스쳐 가고 있다. 그런 아저씨의 얼굴이 반쪽이다. 젠장. 처음 봤을 때에 비해 기력이 무척 많이 쇠하셨다는 게 한눈에도 보인다. 그놈의 병. 생로병사라는 게 한낱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원망스럽다. 담배를 피운 것도 아니고, 유흥에 겨워 몸을 막 굴린 것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 다만, 그 신성한 노동의 현장이 쇳가루가 날리는 대장간이었다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억울하다면 억울한 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설사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아저씨가 망치를 내려놓을 것 같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미 3차에 걸친 항암치료로 병이 호전되고 있다는 점. 이대로라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예전의 건강했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것이 병원 측의 희망적인 소견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나나 아저씨나 조심스러운 얘기다. 때문에 둘 다 그 얘긴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그러기엔 아저씨의 자존심이 너무 센 탓이겠지. 이런 경우에 해볼 법한, 괜찮냐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였다.
“풀어보세요.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두툼하고 투박한 손으로 선물 상자를 풀어보곤 아저씨가 씨익 웃는다. 마음에 드신 눈치라 나 역시 흐뭇하다.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차면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라보던 아저씨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괜스레 불퉁하게 말씀하신다.
“뭐한데 이런 걸 사와? 돈도 얼마 못 버는 놈이.”
“에이, 아저씨. 그건 아니죠. 제가 얼마나 많이 버는데요. 아참, 돈은 들어갔죠? 혹시…….”
“뭐? 저 사람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간장?”
“간장만 있는 건 아니구요. 된장이랑 고추장…….”
“헛참. 그게 돈이 되는 게 희한하군. 8억 들어왔더라. 근데, 그 돈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겨우 간장 나부랭……. 큼, 이놈아! 그게 어떤 건데, 겨우 8억이야! 그냥 간장이 아니라 저 사람이 산을 뒤져가며 캐온 나물들이랑 수십 년에 걸쳐 개발한 노하우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밖에 안 준다는 게 말이 돼!”
주방 쪽에서 날아오는 사나운 눈초리에 얼른 태세 전환해서 말을 바꾸는 아저씨를 보며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졌다. 이하연도 그러려나? 아, 김칫국인가.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아니, 그전에 그녀와 결혼까지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애 전선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그 눈빛은 뭐냐? 혹시…….”
“예? 아무것도…….”
“너 연애하냐?”
헉.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까셔야 할 거 같은데? *** 간만에 사모님의 음식을 먹는 건 나쁘지 않았다. 백숙에서 다리 하나를 뚝 떼어내 내 국그릇에 올려주신 것도 기분 좋았고. 하지만, 그 후로 내 연애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는 두 분 때문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난 표정관리 한번 제대로 못 한 덕분에 영혼까지 탈탈 털려야 했다. 은근히 관심을 보이며 눈을 빛내는 아저씨는 말할 것도 없었고, 대놓고 짓궂은 질문을 연달아 던지시는 사모님 때문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판이었다.
“자주 올게요.”
“자주 오긴 뭘 자주 와! 일하는 놈이 그렇게 엉덩이가 가벼우면 돼? 실없는 소리 말고 네 일이나 잘해!”
“알지? 저 양반이 말만 저렇게 하지, TV보다가 네 얼굴만 나오면 어찌나 흐뭇해하는지.”
“알아요.”
“빨리 가! 해 떨어질라!”
“가요, 가.”
난 현관문을 열고 나오며 사모님께 꾸벅 인사했다. 그러곤 거실 쪽에 서 계신 아저씨한테도.
“아저씨, 또 올게요.”
“어여 가. 바람 분다. 차 조심하고.”
바람 부는 거랑 차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만. 아저씨 마음은 와닿고도 남는다.
“예.”
한차례 웃어 보인 뒤, 돌아섰다. 그러곤 차에 올라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사모님을 보면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근데, 왜 보자고 하는 걸까? 어제 오후 걸려왔던 전화 한 통. 김진숙 회장이 괜찮으면 잠시 보자고 하기에 오늘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더랬다.
“지난번에 얘기한 광고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달리 없지 싶은데. 뭐, 가보면 알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액셀을 밟았다. 핸들을 꽉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