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 거침없이 나아가라. (3) (143/204)

#143. 거침없이 나아가라. (3)2021.08.29.

한국에서 촬영할 때 보고 두 번째 보는 거였다. 이사벨라라고 했던가? 이국적인 금발 머리의 여자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말하면 돼요? 아, 근데 저 영어 잘 못 하는데…….”

“괜찮아요. 그냥 한국어로 얘기하시면 제가 통역해줄게요.”

그렇다면야.

“안녕하세요. 저번에 뵀죠? 음, 근데 기분이 좀 묘하네요. 이렇게 영상통화로 얘기하려니까. 아, 거긴 오전인가요?”

- 예. 저도 출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아직 다른 직원들은 오기 전이고요. 아, 하지만 한 명…… 레이첼. 그러니까, 제 상사인데 우리 잡지사의 디렉터 중 한 명이죠. 인사해, 레이첼.

- 하이!

“아, 예. 안녕하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묘하다. 옆에는 한 명의 여자가, 화면 너머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는 상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것 참. 꽃밭은 꽃밭인데, 뭔가 최첨단이네. 머릿속으로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사벨라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 날 배려하려는지 천천히 말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다. 하지만 남윤주 팀장이 바로바로 통역해줘서 대화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이사벨라와 대화를 나누다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땐 레이첼이 보충설명을 하는 식으로 영상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고요. 괜찮으면 좀 생각해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 당연하죠. 언제든 결심이 서면 전화 주세요. 그러면 곧바로 서울로 날아갈 테니까.

당연하다고 하면서 서울로 온단다. 애당초 내가 승낙할 걸 전제로 얘기하고 있는 이사벨라를 보자니, 웃음부터 나온다. 남윤주 팀장도 한없이 밝은 편인데, 저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왠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지는 느낌이라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레이첼이란 여자는 자꾸만 은근한 눈길로 날 바라봐서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얘기 다 끝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리 주세요.”

내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남윤주 팀장이 좀 전까지 나누던 대화랑은 차원이 다른 속도로 영어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인사를 나누는 거 같긴 한데 그런 것치고는 좀 길게 얘기하는데? 뭐, 상관없지. 어차피 내가 들어야 할 얘기는 다 들었으니까. 후식으로 나온 주스를 마시고 있을 때, 통화를 끝낸 남윤주 팀장이 가볍게 웃으며 날 바라본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서 셰프님은 딜도 잘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요?”

“예. 보통 이런 제안을 들으면 대부분 승낙부터 하거든요. 보그라는 잡지가 워낙 메이저라서 그렇기도 하고, 이사벨라가 눈에 확 띌 정도의 미인이라서 껌벅 죽는달까. 아무튼, 남자들 반응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서 셰프님은 안 그러신 거 같아요. 침착하게 얘기 다 듣고 나서도 결정은 나중으로 미루시는 것도 그렇고.”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요즘 이런저런 스케줄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붕어처럼 던져주는 먹이마다 덥석덥석 물다가는 배 터져 죽을 게 뻔하니까, 나도 모르는 새 대답을 미루는 버릇이 생겼나 보죠.”

어디서 터졌는지는 몰라도 남윤주 팀장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람 인연이 참 희한하구나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남윤주 팀장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이하연과 핸즈프리로 얘기를 나눴다.

- 그럼, 보그에도 실리는 거예요?

“아직 결정 안 했는데요?”

- 왜요?

“한국에만 발매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 발매한다고 하니까 엄청 부담스럽더라고요.”

솔직히 말하자, 이하연이 그 특유의 코 먹는 듯한 웃음을 흘린다.

- 진영 씨답네요.

“그런가요?”

- 예. 그래도 좀 아쉽긴 하네요. 거기 패션 쪽에선 거의 탑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곳인데, 이 기회에 세계적인 샐럽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깝네요.

“그럴 리가요. 괜히 망신살 뻗치지 않으면 다행이죠.”

- 아!

“……?”

- ……가끔 보면 진영 씨는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같아요.

“흠, 그건 아닐걸요.”

나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우연히 시작한 일들이긴 해도 여러 가지 사정이 맞물려 내게 어느 정도는 인지도가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그뿐이다. 나 역시 노력한 건 맞지만, 그 공의 절반 이상은 나레이션에게 있었고 나머지 중 팔 할 이상도 날 도와준 사람들에게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뭐,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적어도 허세에 쩔어서 신세 망칠 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오, 간만에 들려오네. 수화기 너머로 이하연의 음성이 들려오는 동안에도 머릿속을 울리고 있는 BGM을 들으며 픽하고 웃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급습했다. - 서진영은 멍청이다. 이런. 느닷없이 등장해서 한다는 말이 겨우 이거냐? 그리고 내가 부족한 건 맞지만, 그런 말을 들어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거든! - 아니, 서진영은 멍청이가 맞다. 헐.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고 있는 사이,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자신의 인지도는 둘째치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면 무조건 잡아야 했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서진영이다. 남들은 기회가 없어서 난리인데도 너무 자주 그런 기회들이 오다 보니 그는 지금 판단력이 흐려져 있는 게 분명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강윤식으로 인해 자칫하면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네임밸류를 높이는 게 도움이 될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을 일반인의 범주에 놓고서 ‘내가 감히 어떻게?’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 서진영은 멍청이가 맞다.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후……!”

- 갑자기 왜 그래요?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이하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대꾸했다. 어느새 나레이션은 물론이고 인간X극장을 연상케 하는 음악 소리도 사라진 뒤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럽니다.”

- 아, 미안해요. 내 생각만 했나 봐.

“무슨 말이에요. 저도 좋습니다. 하연 씨랑 이렇게 통화하는 거. 그냥 체력이 저질이라 그런 거지.”

엉겁결에 내뱉은 변명에 이하연만 희생시키는 거 같아서, 얼른 수습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그렇게 한참 그녀와 통화를 이어가다가 전화를 끊고 나서 난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패션잡지 보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거야, 당장에라도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는 문제고. 진짜 문제는……. 아까 들려온 나레이션이 말미에 남겨놓은 말들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일반인의 범주에 놓고 있다라……. 뼈를 때리는 소리다. 하긴,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에 출연료를 억대로 받는 광고를 찍고, 예능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고정출연한다. 뿐만 아니라 얼마 뒤에는 내 이름을 건 상품이 출시될 터다. 이 정도면 거의 샐럽 아닌가.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일반인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핸들을 잡고 전방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 삼한그룹 본사. 그 시각, 강윤식은 책상 앞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길 한참. 그가 중얼거렸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대충 판세는 읽힌다. 바둑으로 치면 축(逐:단수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반상에서 벌어지는 각축. 흑백이 물리고 물리는 가운데 한쪽은 무조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형국. 당연한 얘기지만, 거듭되는 단수로 죽을 위기까지 몰리던 흑석이라도 중도에 포석해둔 돌을 만나면 무조건 산다. 반대로 그때까지 흑을 맹렬히 뒤쫓던 백은 빈손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고. 공연히 힘만 뺄 뿐 얻는 건 없이 상대편에게 이득만 주는 셈. 지금 상황이 그 짝이다. 강윤식은 지난번 만났을 때 열흘의 말미를 달라고 하던 서진영의 얼굴을 떠올리곤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마, 자신이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래 봐야, 꽃놀이패지.”

꽃놀이패. 한쪽이 져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으나, 다른 한쪽은 반드시 이겨야만 큰 피해를 모면할 수 있는 패. 하지만 이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지대패(天地大覇: 이기는 쪽은 큰 이득을 얻고, 반면 지는 쪽은 매우 큰 피해를 입는 패) 정도는 되어야 만족할 터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만패불청(萬霸不聽) 즉 그쯤 되면 놈들이 뭘 하든 간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란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확실히 밟아놔야 할 터다. 결심을 굳힌 강윤식이 비서를 호출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어제 이종무 씨피에게 접근했던 자였다.

“부르셨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려 있다. 어제 있었던 일은 이미 보고를 올린 뒤였기에, 오늘 또다시 자신을 부른 이유를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설마 어제는 아무 말 않더니 오늘 와서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며 실책을 탓하려는 건 아니겠지. 남자는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강윤식을 바라보았다. 그런 남자의 귓가로 강윤식의 차분하면서도 권위적인 말투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삼한 식품에서 이번에 새로 브랜드 하나를 런칭한다는데…….”

이어지는 얘기에 남자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지금 강윤식이 하는 말이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사달이 나도 보통 사달이 날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승계 다툼이야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겠지만, 그로 인해 삼한 그룹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히게 된다면 그때에도 과연 회장님이 가만두고만 볼까? 아니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직속상관은 누가 뭐래도 강윤식인 것을. 남자는 얘기를 듣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혹여 자신이 줄을 잘못 선 건 아닌지. 이제까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의심이 새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

“이제 일주일밖에는 남지 않았네요.”

간만에 룸이 아닌 바에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강형식의 얘기에 장동일 상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어찌어찌 여기까진 왔군.”

술잔을 흔들다 입으로 가져가는 그를 보며 강형식이 눈을 내리깐다. 얼마 전의 일이 기억난 듯 보였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겠죠?”

“글쎄다. 그놈 성정으로 봐선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것 같진 않은데…….”

그놈이 누군지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강윤식. 깅형식과 마찬가지로 강 회장의 손자인 재벌 3세. 같은 삼한 그룹의 총수의 핏줄이지만, 위상은 비교가 안 된다. 한쪽은 장남의 자식이지만 안타깝게도 뒷배가 되어줄 부모가 일찍 죽어버린 상황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차남의 자식이래도 부모가 실권을 잡은 채로 떡하니 뒤에 버티고 있어서 사실상 이쪽이 황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황태손이라고 할까. 아무튼, 사내에서의 위상이 다른 것만은 틀림없었다. 뭐, 강형식은 애당초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도 없는 듯 보였지만. 녀석이 그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해온 것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장동일이다.

‘그저 외로웠던 거겠지.’

이러나저러나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자손. 그런 강형식을 무시할 사람은 적어도 이 땅엔 없었다. 문제는 진심이다. 어느 누구도 강형식에게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그걸 깨달아버린 강형식이 비뚤어져 버린 것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 탓에 녀석은 속마음을 감추는 법을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버린 것일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형식이 남이 밟으면 밟는 대로 밟혀줄 위인도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녀석에게는 강 회장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형식아. 만약 말이다. 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는지, 강형식이 장동일 상무의 말을 중도에 막아섰다. 몇 달 전, 서진영을 만난 이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 싸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다는 걸요.”

그렇기에 장동일 상무는 하던 말을 멈춘 채 강형식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만큼 녀석의 결의가 단단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설사 제 손에 피가 묻는다고 하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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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눈빛에 싸늘해져 버린 강형식이 술잔을 노려보다가 굳은 어조로 내뱉고 있었다.

“적어도…… 날 믿고 있는 이의 날개가 꺾이는 걸 두고만 보진 않을 겁니다.”

어쩐지 이 말은 자신이 아닌 강형식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장동일 상무는 안쓰러운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지난번 그일…… 강윤식이 흉계를 꾸미던 그날 밤을 기점으로 강형식이 깨달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은 철저한 먹이사슬의 세계. 특히, 삼한 그룹의 정점을 목표로 한 이들의 싸움은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음을 확실하게 몸에 새긴 듯 보였으니까. 그만큼 성장한 듯 보여, 장동일 상무는 말없이 강형식을 바라보다가 비어 있는 녀석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새해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항간에 갓솁으로 불리는 서진영이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 ‘서 셰프의 선택’의 출시가 일주일을 남겨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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