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거침없이 나아가라. (1)2021.08.25.
하아, 그럼 그렇지.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내가 겪어온 삶을 돌아봐도 이렇게 순순히 일이 되어간다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 지금은 강윤식이라는 요주의 인물까지 있는 상황. 그런데 별 탈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기야 강윤식이 바보천치도 아니고, 날 주시하고 있었겠지. 아마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을 때 내가 열흘의 말미를 달라고 한 시점에서 이미 그러고 있었을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나레이션이 평소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전해준다. - 장소는 서울시 마포구 성암로 2XX. 카페 미주암이다. 그걸 끝으로 나레이션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장소까지 알려줬으니 알아서 하란 얘기다. 난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 이종무 씨피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좀 전까지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조금은 경망스럽게 느껴지던 활달함도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런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남자…… 삼한 그룹 비서실에서 나왔다는 남자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광고는 저희가 확실하게 책임지겠습니다. 아, PPL이라든가 다른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 측에서 바라는 건…….”
한참 설명이 이어지는 걸 듣던 이종무 씨피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말을 멈춘 채 바라보자, 이종무 씨피가 대뜸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예?”
“그렇게 해서 그쪽이 얻는 게 뭐죠?”
“아, 그건…….”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프로그램의 메인 셰프를 다른 요리사로 바꾸면 그쪽이 얻는 게 있습니까? 아니, 그전에…… 우리가 기획한 신규 프로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대외비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막 결정된 사안에 대해 그토록 빨리 정보를……. 아, 이 문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진짜로 이해가 안 가는 게, 메인 셰프…… 그러니까, 서진영 셰프에 대해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오해십니다. 그런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저희 쪽 필요에 의해서…….”
“그러니까요. 그게 뭐냐 이겁니다. 하아, 진짜 이해가 안 가네. 그렇다고 PPL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서진영 셰프 대신 다른 요리사를 밀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종무 씨피가 한숨을 푹 내쉰다.
“이렇게 합시다. 일단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도 좀 생각이란 건 해봅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쪽이 뭘 얻을 수 있는지 심도 있게 고려해봐야겠습니다.”
“그, 그렇게 하시죠.”
앞서 30분간의 대화에서, 이종무 씨피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기에 그런가. 남자는 당연히 자신의 말발이 먹혀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듯하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종무 씨피가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만만찮은 상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남자. 그에게 한차례 고개만 끄덕여 보인 이종무 씨피가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방송국으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거참.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였다. 그래 안다. 피디 생활을 얼마나 했는데 그걸 모를까. 방송국이 광고에 목매는 까닭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룹 쪽에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간섭하며 출연진을 바꾸라 말라 하는 요구는…….
“미친놈들!”
자신의 심정을 욕 한마디로 단적으로 드러낸 이종무 씨피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삼한그룹에서 나왔다던 남자를 만나 본격적인 얘기를 듣기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지.’
C 마트 쪽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신현정 피디를 언급하며, 그녀가 새로 옮긴 JTL 방송국에서 이번에 뭘 기획하든 간에 적극적으로 광고를 붙일 계획이라고 했던가.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다고 자리를 피한 후, 5분쯤 이어진 통화에서 이종무 씨피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걸 실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KBC 방송국을 떠난 신현정 피디를 적극적으로 영입한 게 옳았다는 게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C 마트 측의 푸시는 대단했다. 계열사들의 광고만 세 개에다 형제 그룹이나 다름없는 KS 그룹 쪽과도 연결 시켜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대신, 신현정 피디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야만 지난번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때처럼 대박이 나지 않겠냐고 하면서. 박 실장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자신도 회장님께 칭찬 한번 들어보자고 너스레 아닌 너스레를 떨던 걸 떠올리며 이종무 씨피는 픽하고 웃고 말았다. 삼한 그룹에서 나온 놈과는 정말이지 비교도 안 되는 매너였다. 제안 자체가 합리적이기도 했고.
“액땜했다고 생각하지 뭐.”
그제야 그의 표정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조금은 가벼운 듯 보이는 걸음걸이와 살짝 실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진지해져 있었다. *** 전화가 다시 걸려온 것은 박 실장과 통화를 한 후 30분 정도 지나서였다.
“회장님!”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박 실장이 아닌 김진숙 회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민망하다. 왠지 애들 싸움을 어른한테 가서 이른 듯 느껴져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사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주소를 알려주면 뭐? 거기까지 가는 데만 한 시간도 넘게 걸릴 텐데, 그동안 일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겠지.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엔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강윤식이 뭔가 또 뒤에서 부리는 술수인데 그게 간단할 리 없다는 것. 또 한 가지는……. 이종무 씨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단지 그의 행동이 가벼워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것보다는 아직 이종무 씨피에 대해서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 뭔가를 확신하기엔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떠올린 인물이 바로 박 실장이었는데…….
- 얘기 들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래요. 우리 사이에.
흠,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일까? 잠시 머리를 굴려보지만,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진다. 그래서 관뒀다.
“그래도 별거 아닌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게 아닌가 해서…….”
- 됐어요. 사람마다 잘하는 게 있는 거지. 서 셰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 뭐, 공치사나 듣자고 전화한 건 아니고.
“…….”
- 서 셰프도 강윤식한테 어지간히 밉보였나 봐?
“……그러게요.”
- 훗. 신경 쓸 거 없어요. 내가 약속했잖아? 서 셰프가 제대로만 해주면,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물론 그게 공짜일 리는 없다.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유통 전문 회사의 총수가 하는 말이다. 당연히 기브 앤 테이크.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이번만은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러고 저러고 간에 믿을 수 있는 패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건 확실히 든든하니까.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래요. 그것만 기억하면 돼. 앞으로 서 셰프 앞에는 꽃길만 깔려있다곤 말하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거치적거리는 건 없게 하지. 그러니까, 거침없이 가요. 그게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거니까.
알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라. 참 좋은 말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왠지 힘이 난다. 방금 전화를 끊은 김진숙 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강형식을 비롯해 고윤수 주방장님과 김진호 셰프. 그리고 아저씨와 사모님. 또 걱정된다고 전화를 걸어온 류승렬까지. 하나같이 뒤에서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 거참, 인생이란 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많은 이들이 믿고 밀어주는 건지. 꾹.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가보자.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강형식이 내 편이잖아? 그러니까…….
“더는 망설이지 않고…….”
간다. 누가 앞을 가로막더라도. 다시 한번 결심을 굳히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연휴도 끝나고 주방으로 복귀했고, 준석이 형과 함께 김진호 셰프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해나가는 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칼질을 비롯해 요리 실력이 하루하루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이러다간 올해가 끝날 즈음에는, 어지간한 요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중첩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KS 자동차의 NEW SJ7 광고. 광고가 처음 나간 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인터넷 게시판은 말할 것도 없고, SNS에서 말들이 많았다. 광고가 나간 첫날엔 내 이름 석 자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었다. 얼마나 이슈가 되었는지는 게시물마다 달린 댓글이 입증해준다. - 꺄아아악! 갓솁! 너무 멋져요! - 아, 부드러운 저 미소. 전화가 걸려왔을 때 짓는 미소는 진짜 백만 불짜리 아님? - 웟분 말에 동감. 남자인 내가 봐도 장난 아님. - 내가 해준 음식 먹고 싶은 건 아니고? 헐. 심멎하는 줄. - 요리할 때 모습도 멋졌음. - 마누라가 구박함. 장 보는 건 둘째치고, 쓰레기 버리는 거라도 좀 도와달라고. - 검은색 조리복 입은 갓솁. 포스 작렬. - 진멋이 뭔지 확실히 보여줌. - 저 차는 뭔가요? 되게 중후해 보이던데. 많이 비싼가요? - NEW SJ7. KS에서 새로 출시한 신차예요. - 중형차니까 싸진 않죠. - 그래도 저 사양에 저 가격이면 나쁘지 않죠. 같은 옵션이라도 수입차의 경우엔 두 배 정도 할걸요? - 근데……. 차 사면 갓솁도 딸려오는 건가? - ㅎㅎㅎ. 사심은 넣어두셈. 나는 물론이고 NEW SJ7에 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져 가는 가운데, 광고가 뒤이어 떴다. 일테면 2탄이다. 그걸 보고야 난 깨달았다. 서킷에서 찍은 게 여기 다 있구나. 난 무슨 영화 보는 줄 알았다. ‘분노의 쾌주’처럼 호쾌한 질주 신이 광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뒤늦게 출반한 NEW SJ7이 앞선 차들을 하나하나 따라잡고, 제치면서 나아가는 모습이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무슨 신의 스킬이라도 지닌 줄 알겠다. 오죽하면 광고를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얘기할까. 나보고 프로 레이서 아니냐고. 또다시 난리가 났다. 다시 한번 내 이름이 실검에 올랐고, 기사까지 떴다.
[갓솁, 기막힌 드리프트로 호쾌한 질주.] 제목부터 심상치 않아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었나 보다.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 와씨! 갓솁, 뭐임? 완전 상남자! - 차 잘 몰면 남자다운 거임? -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완전 끝내줌. - 레이싱 박진감 죽인다. - 운전 실력이 거의 프로임. - 윗분, 너무 오버 아닌가요? - 아뇨. 제가 소싯적에 차 좀 몰아봐서 아는데, 갓솁 운전 실력 보통 아니에요. 저 정도까지 차를 제어하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론 어림없어요. - ㅋㅋㅋ 소싯적 나옴. - 정말임. 내 친구가 카레이서 팀에 있는데, 갓솁 운전 실력이면 어지간한 팀에서 스카우트하려고 눈에 불을 켤 거라고 하더라고요. - ㅋ 이번엔 내 친구 나옴. 민망하기 짝이 없다. 권태홍 감독이 편집을 얼마나 잘했는지, 내가 봐도 광고 속의 나는 엄청난 실력을 갖춘 카레이서로 비친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편집발로 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테이크를 안 끊고 한 큐에 가서 차창을 통해 내 얼굴이 보이는 가운데, 무려 석 대를 제치며 결승선으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차가 결승선을 통화하는 시점에서 절묘하게 화면이 바뀌며 NEW SJ7이 산길을 내달리다가 석양을 등지고 서고 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내린 내가 뒷모습만 보인 채……. 헐. 손이 오그라들어 연탄불에 구워진 오징어 꼴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오글거리게 만드는 광고는 내 이름값을 끝도 없이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NEW SJ7의 판매도 순조롭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다만. 아무튼, NEW SJ7의 광고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이슈가 되고 있을 때, 후속타가 터졌다. 잡지가 발매된 것이다. 상의를 벗고 웃통을 드러낸 채 반 누드로 찍은 내가 표지로 나온 잡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