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맛있는 도전 (4)2021.08.22.
다음 날 아침,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려진 밥상을 둘러싸고 모여앉아 밥을 먹고 나서 강형식과 함께 집을 나섰다.
“택시 타고 가면 된다니까 그러네.”
“웃기지 말고, 페라리 피닌…….”
“피린파리나 세르지오.”
“그래, 그거. 그거 타고 돌아가.”
“이미 준 걸 도로 가져가라고?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
“뭐로 보긴, 강형식으로 보지.”
대답이 이상했나? 녀석이 물끄러미 날 보다가 피식 웃는다. 웃기는…….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긴 하다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댔다. 솔직히 그렇잖냐? 그 차……. 관리나 되겠냐? 그거 몰다가 어디 한군데 고장이라도 나면 어디서 고쳐야 하는데? 아니, 우리나라에 그 차 고칠 줄 아는 사람이나 있어?”
“내가 하면 되지.”
이러니 내가 속이 안 터지냐고.
“관둬 인마. 사업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못 자는 놈이 무슨. 차를 고치든 때려 부수든 그냥 네 취미로 하시고요, 차는 가져가. 내가 감당이 안 돼서 그래. 그리고 나 내일이나 되어야 갈 건데, 그때까지 어디다 세워 두냐? 계속 주차타워에 맡겨? 넌 어떤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냥 돈 지랄이거든?”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오늘은 내가 몰고 갈게. 그리고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럼 됐지?”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차를 녀석 편에 보내는 게 일차적인 목표라서 우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있잖냐.”
“뭐가?”
“그, 저…….”
“왜? 뭐 할 말 있어?”
“아니다.”
자식이. 답지 않게 말을 하다 말아.
“뭔데 그래?”
“수아…… 귀엽더라.”
“걔가 또 한 귀여움 하지. 요새 애들답지 않게 착하기도 하고.”
“몇 살이라고 그랬지?”
“여덟…… 아, 이제 아홉 살인가?”
“그렇구나. 그럼 초등학교 2학년인 거네.”
“그치.”
“흠, 그럼…… 누님 되시는 분은?”
“수연이 누나가 왜?”
“아니. 그냥…… 나이가 어떻게 되나 해서.”
“나이? 나보다 세 살 많으니까…… 와, 그러고 보니 벌써 서른이 넘었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대? 큰일 났네. 노처녀 됐잖아!”
“노처녀는 무슨. 요즘 누가 서른 이전에 결혼한다고.”
“그런가? 있지. 우리 누나가 은근 책임감이 강해서 그동안 연애 한 번 못 하고 죽도록 일만 했거든.”
“…….”
“사실 나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안 했을지 모르는데. 젠장! 내가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 뒷바라지해보겠다고……. 쯧, 누나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 같던데. 내 이름으로 통장도 하나 만들어 놓았더라고. 아으, 그럴 시간에 제 앞가림이나 할 것이지.”
“……좋은 누나네.”
“응. 나한텐 과분한 누나지.”
난 살짝 이를 비틀며 괜스레 소리 내 숨을 들이켰다.
“누나뿐인가. 삼촌도, 외숙모도…… 수아도 다 과분하지. 나 같은 놈한테는……. 너니까 하는 말인데, 나 진짜 가족들 아니었으면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다행이네. 그런 가족들이 있어서.”
“감사한 일이지.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걸까? 나한테 그런 복이 다 있고.”
“그러게. 우주쯤 구했나 보다.”
“크큭. 우주라……. 그럴지도.”
“만나보니 알겠더라. 네가 왜 그렇게 가족 가족 하는지. 그러니까 잘해. 그런 분들 흔치 않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응.”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주차 타워에 도착했다.
“갈게.”
“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보자.”
“오케이. 들어가.”
녀석이 차에 타서 떠나는 걸 보고야 돌아섰다. 신현정 피디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새해 인사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피디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예. 서 셰프님도요. 올해는 하시는 일마다 다 잘되시길 바랄게요. 아, 건강하시고요.
“그러죠. 우리 아프지 말고, 열심히 해서 대박 한번 내보자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어느새 나직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든다.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새해 첫날부터 일하신 거예요?”
- 아뇨. 어젠 저도 집에 있었고요. 오늘 회의하러 방송국 갔다가 나오면서 전화 드리는 거예요.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뭣 때문에…….”
- 프로그램명이 정해졌거든요.
윽.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다. 후회도 들고. 괜히 갓솁 어쩌고 했나? 확 무서워졌다. 이상하다 못해서 괴상한 이름이 붙었을까 봐. 그래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 갓솁과 함께하는…….
음……. 역시나.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
- 맛있는 도전.
어? 나쁘지 않은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걸음조차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신현정 피디가 물어온다.
- 어때요? 갓솁과 함께하는……은 앞에 작게 넣기로 했고요. 맛있는 도전을 크게 해서 부각시키기로 했는데.
“좋은 거 같아요.”
- 마음에 드세요?
“예. 더할 나위 없네요.”
- 그럼 다행이고요. 아, 촬영은 2주 뒤부터 할 거예요. 조금 급하죠?
“괜찮습니다. 저도 대충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신…….”
- ……?
“광고 몇 개 찍기로 한 게 있는데, 그 날짜는 좀 피했으면 하네요.”
- 날짜 확정되면 미리 말씀드릴 테니까, 스케줄 조정하시면 어떨까요?
“그럼 되겠네요.”
- 아참, 그전에 스태프들 안 만나보셔도 되겠어요?
“음, 꼭 그래야 할까요?”
- 이왕이면 그편이 좋겠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죄송하지만, 요즘 이래저래 너무 주방 일에 소홀해서…….”
-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아, 그리고…….
“……?”
- 멋지게 나오셨더군요.
“예?”
- 아……. 아직 광고 안 보셨어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광고를 내보내기로 했던 걸.
“그, 그러게요. 깜빡했네요.”
또다시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 죄송해요. 웃어서. 왠지 서 셰프님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그건……. 괜찮습니다. 아무튼, 전화 끊고 얼른 봐야겠네요.”
- 예. 그러세요. 그럼, 대본 나오면 메일로 보내드리면서 문자 보내드릴게요. 다음번엔 촬영장에서 봬요.
“그러죠. 피디님도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고. 그때 뵙죠.”
전화를 끊고 나서 얼른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이미 배너가 띄워져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밀 작정인지, 메인 화면 정중앙에 떡하니 떠 있다. 잠시 망설이다 배너를 터치했다.
레스토랑의 주방 안. 내가 검은색 일색의 조리복을 입고 요리 중이다. 빠르게 칼질을 하고, 오븐을 데우고, 스테이크를 구워 접시에 플레이팅을 한다. 그렇게 몇 가지 요리를 하느라 집중하던 나는 모든 주문을 소화한 뒤,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 8시 정각. 옷을 갈아입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뒤, 차에 올라탄다. 여전히 차 키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시동을 걸자, NEW SJ7의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거친 배기음과 함께 어느새 NEW SJ7은 도로 위를 달리고. 그 사이 카메라는 차 안을 비춘다. 양복을 입고 있는 내가 보인다. 한데, 차 안은 바깥과 달리 고요하기만 하다. 엔진음은 하나도 안 들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만이 들려올 뿐이다. 편안한 분위기에 내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오고, 핸드폰 화면에 하트 표시가 떠오른다. 한층 짙어진 미소와 함께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자, 음악 소리가 잦아들며 이내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 어디야?
“지금 가는 중이야.”
- 아직도 출발 안 한 거야?
“아니. 차 안.”
- 아, 운전 중이었어?
“응. 30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 거 같은데?”
- 그럼 장 좀 봐오면 안 돼? 나 오늘 늦게까지 일해서,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내가 해준 음식 먹고 싶은 건 아니고?”
- 헤헤, 들켰나?
“마트 들렀다 갈게.”
-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차를 돌린다. 잠시 후, 마트 주차장에 이르러 천천히 주차를 마친 뒤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내 모습이 보이고. 장면이 바뀌며 한껏 장을 봐서 차 트렁크에 싣고 있다. 그러곤 다시 출발. 퇴근시간대와 맞물려 복잡하기만 한 도로를 기가 막힌 솜씨로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NEW SJ7. 차는 어느새 지하주차장에 새워지는데, 건너편에 또 한 대의 차가 주차 중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남자는 방금 주차를 끝냈는지 한 손에 차 키를 들고 있다. 한데 그 남자……. 내게 묘한 눈길을 보낸다. 12층이라고 쓰인 버튼을 누르다가 떨어뜨린 차 키를 남자가 주워주며 눈을 빛낸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남자보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남자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날 힐끔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복도를 걸어 현관문 앞에 이른 나는 번호키를 누르려고 하는데…….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아내가 날 맞이한다. 난 밝게 웃으며 현관으로 발을 들이곤 장바구니를 내려놓는다. 대신 아내를 안아 들어 올리고……. 바닥에 놓인 차 키와 장바구니가 보이는 가운데, 두 남녀의 하체만 카메라에 비치고 있다. 여기까지가 드라마처럼 연출된 광고였고, 그다음은……. 카피가 떠오른다. 그 남자가 모는 차. NEW SJ7. 큭. 내 손발 어쩔 거냐고. 와씨, 이거 생각보다 더 오글거리는데? 미치겠네. 그때 서킷에서 찍은 건 다 어쩌고. 아니 아니. 그건 지금 상황이랑 안 맞으니까 그렇다 치고. 석양을 등지고 찍었던 건 다 어디다 팔아먹고 달랑 이것만 내보는 건데? 덕분에 아주 그냥 로맨스 영화가 되고 말았잖아. 아, 이걸 대한민국 국민이 다 본다고? 하아……. 설마 가족들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어떻게 해서든 이걸 못 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나중엔 결국 다들 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을 때만은 안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내 눈에 비친 광경은…….
“내가 해준 음식 먹고 싶은 건 아니고?”
- 헤헤, 들켰나?
“마트 들렀다 갈게.”
TV 앞에 모여 광고를 보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내, 그러니까 설정상 아내 역을 맡은 배우와 통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헐……. 타이밍도 참. 이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수가 있나? 그럴 리가. 우연치곤 너무 공교롭잖아?
“뭐, 뭐 이런 걸 보고 있…….”
“쉿!”
수연이 누나가 진지한 눈빛으로 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 아씨, 왜 남의 입술에. 인상을 확 구기고 있는 동안에도 가족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광고를 시청하고 있다. 그러길 몇 분. 내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내 광고가 끝났다. 그제야 가족들이 TV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본다. 한데, 수연이 누나의 눈에 장난기가 그득하다. 제기랄.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난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떻게서든 쿨해 보이려는 나름의 시도였는데……. 이빨도 안 박힌다.
“쿡! 서진영……. 큭큭…….”
웃음을 흘리던 수연이 누나가 목소리를 굵게 해 성대모사 아닌 성대모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해준 음식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음…….
“헤헤, 들켰나?”
수아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치자, 수연이 누나는 한층 더 느끼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마트 들렀다 갈게.”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버럭 소리치자, 낄낄거리던 누나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얘기한다.
“오올, 우리 진영이.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다.”
“응. 오빠, 그 언니랑 결혼해.”
“아니, 그건 좀…….”
“왜애, 그분은 꽤 진지해 보이던데.”
아니 왜 또 얘기가 그쪽으로 빠지나? 이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광고 쪽이 낫다. 그렇게 판단해 얼른 화제를 되돌리려던 찰나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갑자기 들려오는 BGM. 요즘 뜸하다 싶었는데, 뜬금없기도 하지. 하필 가족들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더구나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고를 본 뒤에. 하긴 나레이션이 뭐 그런 거 따질 녀석인가. 흠,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나레이션이 친구라도 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웃겨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동시에 옆에선 여전히 수연이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아우, 정신없어. 스테레오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내 울컥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 서진영은 자신의 첫 광고로 인해 사뭇 들떠 있었다. 아니거든! 이게 어딜 봐서 들떠 있는 거로 보이냐고!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난 벙찌고 말았다. 나레이션이 전해준 정보가 그렇게 만들었다. - 하지만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강윤식이 부리는 사람 한 명이 지금 JTL 방송국의 이종무 씨피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