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맛있는 도전 (2)2021.08.18.
거울을 본 건 아니지만, 아마 지금 내 표정을 썩어있을 것이다. 떠들어 대는 것도 좋고, 말을 옮기는 것도 좋다. 근데, 뉘앙스가 상당히 불량하다. 듣기에 따라선 신현정 피디랑 내가 공모해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떠난 것…… 아니, 버린 것 같이 들리지 않는가. 물론 류승렬이 워낙 직설적인 성격인지라 저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지만, 직감적으로 저 녀석의 문제가 아니란 느낌이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말을 퍼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 나랑 신현정 피디님이랑 함께 그만뒀다고들 하냐?”
- 말도 마요. 오늘 특집 방송 많았잖아요.
그렇겠지. 개중에는 생방송도 많았을 테고.
“그런데?”
- 우연히 지나가다가 듣게 됐거든요. 형이랑 피디님이 그만뒀다는 얘기를. 솔직히 형한테 직접 들은 게 아니라서 루머라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한마디 하려고 다가갔더니, 날 슬쩍 피하면서…….
대충 감이 온다. 녀석이 나랑 친하다는 건 방송국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테니. 뒷담화를 하다가 류승렬이 오니까 피한 거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을 때, 녀석이 계속해서 얘기했다.
- 뭐 어쩌겠어요? 피하는 사람들을 쫓아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근데, 아까 방송 끝나고 나올 때 보니까,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더라고요. 여기저기 모여서 수군거리는데, 짜증 났거든요. 그래서 형한테 확인차 전화한 거예요. 진짜 그만뒀는지도 궁금하고, 혹시 누가 형 협박이라도 한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해서요.
난 가만히 있다가 머릿속을 정리하곤 얘기했다.
“승렬아. 이 얘기는 전화로 할 건 아닌 거 같다. 일단은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고만 알아둬라. 아, 그리고 피디님이랑 나랑 둘 다 그만둔 건 맞는데, 같이는 아냐. 방송국에서 피디님한테 프로그램에서 손 떼라고 하는 거 보고…….”
- 미친! 왜요? 잘하고 있는 사람을 왜…….
“됐다.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좀 이르지만, 새해 복 많이 받고. 시간 나면 밥이나 한 끼 먹자.”
- 하우, 열 받네. 알았어요. 형. 그리고…….
“응?”
- 너무 상심하시지 말고요. 혹시 방송 중에 형이 나갈 만한 게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요.
녀석하곤……. 기꺼운 마음이 들어 한차례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자, 뒤늦게 현타가 밀려온다.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었네. 나야 내 발로 떠났으니 상관없다만, 신현정 피디는 그야말로 내쫓긴 것도 모자라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새로운 담당 피디 얼굴을. 얍삽하게 생겼더라니, 하는 짓도 딱 생긴 대로 놀고 있다. 의심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앞뒤를 잴 때 원인을 파악하려면 결과부터 하는 법. 이 일로 손해 볼 사람이 정해져 있듯, 이익을 볼 사람 역시 정해져 있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사람들 하나하나 찾아가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이래저래 꼭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
새해 아침이 밝았다. 물론 일어나기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지만. 그래서 그런지 살짝 피곤한 감이 없잖아 있다. 어젯밤에 잠들기 전, 이하연과 꽤 오랜 시간 통화를 한 탓도 있을 터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예전과 달리 이젠 연인 사이니까. 그런데도 한해의 마지막 날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하는 걸로 만족하는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거 아닐까? 뭐, 그녀도 새해 아침부터 너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을 거라고 했으니 미안해할 필요까진 없지만. 그래도 아쉽긴 하다.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맞는 새해인데.
“오늘 하루 힘들더라도 애들 좀 쓰라우.”
이례적으로 새벽부터 나오신 고윤수 주방장님의 얘기를 들으며 다들 바짝 긴장한다. 쯧, 다들이라고 해봐야 준석이 형이랑 나밖엔……. 아니, 한 명 더 있구나. 막내.
“청아야. 떡 맞춘 거 확인했냐?”
“오빠도 참. 그 정도는 당연한 거잖아요.”
준석이 형의 물음에 한청이 재빨리 대답하며 웃어 보이고 있다. 사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 녀석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어서인지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해내곤 한다. 그러면서도 주방 식구들한테 살갑게 굴어 모두에게 예쁨을 듬뿍 받고 있다. 주방장님과 김진호 셰프는 말할 것도 없고, 혜순이 누나도 귀여워한다. 심지어 깐깐한 안성댁 아주머니도 녀석을 살뜰히 챙길 정도니 말 다 했지. 한데, 왜 나한테만 틱틱거리는 걸까? 음, 내가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나? 에이, 모르겠다. 어쩌겠냐고.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걸. 게다가 삼한 그룹 측과도 그렇게 계약한 상황이고.
“청아, 떡국 끓여야 하니까 고기부터 준비해.”
“알았어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한청.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거리가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뭘까. 방금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다시 신경이 쓰인다.
“얀마.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서 있어? 얼른 칼부터 잡지 않고.”
준석이 형의 말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도마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빈말 하나 보태지 않고, 정말 정신없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해가 뜨기 무섭게 강 회장댁 식구들이 한데 모이고, 강구철 사장을 필두로 세배를 했다. 당연히 강형식도 오늘만은 일찍부터 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바쁘다. 작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보니 꽤 점잖은 느낌이 들어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가족들 간의 새해맞이가 끝나고 나서부터가 진짜였다. 아침 8시. 강 회장댁 식구들이 떡국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삼한 그룹 내 임원들과 직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강 회장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우린 그에 맞춰 음식을 내놓았다. 상을 차렸다 치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새해 손님맞이가 끝났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온종일 일하다 보니 진이 다 빠져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나마 저녁 식사는 차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강 회장뿐만 아니라 모든 식구가 약속이 있다며 외출을 한 까닭이었다. 참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이 집 식구들은 정말이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재벌가는 원래 이런가? 나중에 이하연을 만나면 물어볼까 싶을 정도다.
“다들 수고들 했다. 내일은 푹 쉬고, 모레들 보자우. 기럼, 들어들 가라.”
고윤수 주방장님이 주방 식구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들겨주곤 상여금이 든 봉투를 주고 난 뒤 한 얘기였다. 주방 식구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숙소로 돌아오는데,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 익숙하다. 체구 자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형식임을 알아차렸다.
“이제 오냐?”
“하아, 말도 마라. 녹다운되기 일보 직전이다.”
“힘들다고 하더라.”
누가 그런 얘기를 해줬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터다. 고윤수 주방장님과 녀석이 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 집 주방에서 일하면 일 년에 세 번 힘든 날이 있는데, 신정 구정 그리고 할아버지 생신 때라고 하더군.”
“실감한다.”
“자식하곤. 그 체력으로 어쩌려고 그래?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가뿐히 넘길 수 있어야지.”
실실 웃으면서 하는 말……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얄밉다.
“해보고나 말해라. 차라리 노다가 뛰는 게 낫지, 진짜 장난 아니다. 후우, 일 년에 세 번뿐이란 게 정말 감사할 지경이라니까.”
“세 번이나가 아니라?”
“실없긴. 아, 얘기는 이따가 하고, 일단 들어가자. 서 있기도 힘들어.”
“그럴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문밖에서 계속 서서 얘기할 수만도 없어서 녀석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 좀 씻어도 되냐?”
“집주인 마음이지.”
참네. 진짜 집주인이 누군데. 난 픽하고 웃고는 샤워부터 했다. 잠시 후, 간단한 옷차림으로 샤워실을 나오며 물었다.
“바쁜 거 아냐? 아까 보니까, 니네 식구들 다 약속 있다며 나가던데.”
녀석이 비릿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바쁘려고 하면 한없이 바쁜 날이 오늘이지. 근데 너 그거 아냐? 우리 집 사람들 말이야, 오늘 같은 날이면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집에 붙어있질 않는 거거든.”
“그게 뭔데?”
“뭐겠냐? 왕처럼, 혹은 여왕처럼 떠받들어지는 거지.”
흠…….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평소에도 그러지 않나?”
“아니. 평소랑은 다르지. 오늘은 어디를 가도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 뭐,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전제 하의 얘기지만. 상관없잖아? 동창들 만나거나 자기 부하직원들 만나는데 할아버지가 오시겠냐고.”
일테면, 파티의 주인공 같은 건가? 알 것도 같아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넌 아니라는 말투다, 어째?”
녀석이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린다.
“몇 번 해봤는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더라고. 나중엔 오히려 광대가 되는 느낌만 들더라.”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자식. 그걸 꼭 해봐야 아냐? 암튼, 난 지금 이 순간이 훨씬 편하고 좋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눈을 감는 녀석의 표정이 한없이 편해 보인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안쓰럽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다. 그만큼 날 편하게 생각한다는 얘기일 테니. 그렇긴 한데…….
“어쩌냐? 나 조금 있다가 나갈 건데.”
“알아.”
누운 채로 대꾸하는 강형식. 녀석이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서 말했다.
“집에 갈 거잖아. 오이도라고 했던가?”
“응.”
“좋겠네. 가족들도 보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다른 문제 같으면 ‘넌 인마 오늘 하루 종일 가족들이랑 있었잖아!’ 따위로 농담이라도 해보겠는데. 그럴 마음이 안 생긴다. 녀석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좋지. 그러니까 가려는 거고. 원래는 내일 간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늘 일찍 끝난 덕분에 말이지.”
“얘기 안 해주디? 매년 저녁 식사 전에 쫑났는데.”
“그럼 내가 못 들었나 보지.”
워낙 자주 주방을 비우다 보니, 고윤수 주방장님이나 김진호 셰프가 말했을 텐데도 못 들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준석이 형이 말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요즘 형이 정신이 워낙 없어서. 아마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나한테 뭔가를 얘기해준다는 것 자체를.
“언제 갈 건데?”
“한 삼십 분 있다가?”
“갈 거면 얼른 가지. 뭐하러 삼십 분이나…….”
“옷도 챙겨 입어야 하고, 가족들 줄 선물도 챙겨야 하니까.”
“어? 짐이 많아? 내가 데려다줄……. 아, 너 차 있지?”
흐뭇하게 웃자, 녀석이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 인마! 차가 필요하면 나한테 말을 할 것이지. 왜 그 여자한테 손을 벌리고 그래?”
나참, C 마트 회장보고 그 여자란다. 진짜 재벌 3세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뭐 어때?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다 거래인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겨우 차 한 대 가지고 코 꿰는 거 같으니까 그러지.”
“내가 애냐? 그 정도 딜도 못할 거 같이 보이냐고.”
“아우, 진짜 말이나 못 하면. 아무튼, 다음부턴…… 아니다. 너 내가 차 한 대 줄게. 원래 네 생일 때 주려고 했는데,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그거 타라.”
“헐. 미쳤네. 무슨 열쇠고리 주는 것처럼 얘기하네.”
“열쇠가 달려 있으니까, 반쯤은 맞네.”
씩하고 웃은 강형식이 침대에서 벗어나며 얘기한다.
“금방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뭐래. 진짜 주려고?”
“내가 인마. 너 주려고 일찌감치 찍어놓은 거 있어. 그러니까, 기대하라고.”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녀석이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받아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녀석이 사라진 뒤, 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친구 간이라도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벌 집 자식을 친구로 두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기도 해서. 아무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옷부터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다. 강형식이다.
- 준비 다 됐으면 내려와. 아, 짐이 많은가? 내가 올라갈까?
“됐어. 나 혼자서 들 수 있어.”
선물이라고 해봐야 쇼핑백 두 개다. 지난번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새해 선물인지라 나름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외출했을 때 틈틈이 쇼핑한 게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근데, 연락하지 않고 가도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살며시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수연이 누나가 깜짝 놀라는 거 한번 보지 뭐.”
말이 놀라는 거지. 엄청 좋아들 할 거다. 나 역시 한껏 기대에 부풀어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숙소 건물 밖으로 나갔는데…….
“……!”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해? 얼른 짐부터 싣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강형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야이, 미친놈아!”
지금 이 차를 주겠다고? 진짜 어이가 없네. 생각 같아선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녀석이 뭐가 문젠데? 하는 얼굴로 얘기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
“같이 가자. 흐흐, 오늘은 특별히 내가 운전기사 노릇을 해주지.”
염병! 이젠 별 거지 같은 소리를 다 하고 앉았다. 페라리 피닌…… 뭐라고 하더라. 아무튼, 녀석이 했던 말대로라면 전 세계에 딱 6대밖에 없는, 내가 평생 일해도 못 살 차에 앉아 빙글빙글 웃고 있는 녀석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