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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꼭 그걸로 해야 합니까? (1) (134/204)

#134. 꼭 그걸로 해야 합니까? (1)2021.08.08.

기다리던 사람한테 온 전화만큼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전혀요. 바쁘신 거 아는데요.”

- 죄송해요. 신규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파일럿부터 시작할 순 없다 고집을 부렸더니, 얘기가 길어져 버렸어요.

“괜찮습니다. 방송 쪽 일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려고요.”

- 그렇게 얘기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아, 이 소식부터 말씀드려야 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기획안은 통과됐어요.

“아! 그렇습니까!”

나레이션이 했던 얘기도 있거니와 기획 자체가 나쁘지 않으니 될 거라곤 생각했지만, 막상 됐다는 얘기를 들으니 한시름 놓게 된다. 방금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강형식을 한차례 보자, 녀석이 빙글거리고 있다. 스피커폰도 아닌데도 다 들리나 보다. 평소 이하연과 통화할 때 통화음량을 높여놔서 그런가. 아무튼, 기획안이 통과됐다니 더없이 기분 좋다. 하지만 기뻐하는 건 좀 일렀던가. 신현정 피디의 얘기는 다 끝난 게 아니었다.

-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예? 문제요?”

- CP님께서 서 셰프님을 좀 보자고 하시네요.

어? CP면 PD들 중에서도 가장 위쪽. 그러니까 총괄 프로듀서라고 봐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날 왜 보자는 거지?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살짝 어두워진 마음으로 물었다.

“제가 출연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건가요?”

- 아뇨. 그럴 리가요. 서 셰프님이 출연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던걸요.

“그럼 왜?”

- 계약 때문에 그래요.

“아!”

대충 알겠다. 몸값이 문제가 되나 보다. 사실 처음 방송 출연할 때…… 그러니까, KBC에서 <내 마음에 요리를 들어봐!>와 계약할 때는 별문제가 안됐다. 신인이기도 했고, 그땐 그 정도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었으니까. 뭐, 지금도 그리 돈에 연연하는 건 아니다만.

“그런 얘기라면 만나보긴 해야겠네요. 근데…….”

- 말씀하세요.

“어째서 이번엔 피디님이랑 계약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좀 부담스러운 질문인지라 말끝을 흐렸다. 이 정도만 해도 알아들으리란 생각도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신현정 피디는 바로 알아듣고 대답한다.

- JTL이 KBC와 달리 규모가 작아서이기도 하지만, 것보다는 그만큼 방송국에서 이번 개편안 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럴 거예요. 아무래도 지상파가 아니니까 시청률 1%에도 민감하거든요.

“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한마디로 말해서, 담당 CP가 돈 얘기도 할 겸 날 직접 보면서 판단하려나 보다. 기획한 프로그램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를. 하기야 기획안이 통과됐다고 해서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법도 없으니까. 신현정 피디에게 듣기로는 JTL에서 날 나쁘지 않게 본 것 같긴 하지만, 그게 꼭 이번 방송에 내가 어울린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아무래도 신규 방송인 만큼 되도록 안전하게 가고 싶은 거겠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뵈면 될까요?”

- 외람되긴 한데…….

“편하게 얘기하셔도 됩니다.”

- 예. 그럴게요.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신현정 피디가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 해를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음, 생각보다 빠른데? 뭐 나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강윤식한테 열흘의 시간을 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바로 내일이라도 만났으면 하지만. 문제는……. 하필이면 선약이 있다는 거다. 참네, 하여간 꼭 몰아쳐 온다니까. 그렇긴 한데……. 상관없나? 내일 낮에 만나기로 한 사람은 신현정 피디에 이어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맡아 연출할 피디였다. 용건은 계약해지. 뭐, 말이 계약해지지, 회차당 계약인지라 말 몇 마디만 하면 끝날 문제이긴 하다. 사실 이 부분은 신현정 피디가 처음에 내게 출연료를 얼마 주지 못한다면서, 나중에 프로그램이 잘되면 돈을 올려줄 심산으로 배려한 까닭에 그리된 터였다. 그땐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와선 잘된 일이랄까. 덕분에 지금 당장에라도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여태껏 기다렸던 건, 담당피디가 결정되지 않아서 그랬을 뿐. 그거야 별거 아닌데, 점심 때 한진석이랑 조강훈 FD를 비롯한 스태프들하고 식사 약속한 게 마음에 걸린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해서든 내일 보는 거로.

“내일 저녁 때 어떨까요?”

- 좋아요. CP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시간은…….

그렇게 약속이 잡혔다. 잠시 후 전화를 끊고 나서, 강형식을 돌아보자 녀석이 맥주캔을 홀짝거리며 툭 하고 내뱉는다.

“1월 10일.”

“1월 10일?”

“광고 촬영 말이야. 그날 찍자고.”

하아, 진짜 쉴 틈을 안 주는구만. 난 고개를 내저으며 녀석의 손에서 맥주캔을 빼앗아 입안에 들이부었다. 그런 날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금세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그것도 저택 안에서가 아니라 저택 밖에서. 김진호 셰프에겐 사정을 설명하곤 오전 근무만 한 채 저택을 나섰다. 준석이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이 정신없이 돌아가는걸. 따지고 보면 삼한 그룹 측과 한 계약에도 ‘언제든 필요하면’ 주방 일은 빠질 수 있다고 되어 있기는 했지만, 어디 사람 사는 게 그런가. 그저 형한테 미안할 따름이다. 안 그래도 요즘 메인 요리를 맡아서 잔뜩 얼어 있는 판인데. 그래도 하는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성사시켜야 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열흘 안에는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래야만 강윤식에게 뒤를 잡히지 않을 터다. 저택을 나서며 마음속으로 형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KBC로 향했다. 우선은 계약해지부터 해야 할 테니까.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새로 맡게 된 PD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이미 전화로는 조강훈 FD를 통해 사정을 설명한 후였기 때문에 얘기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사실 좀 더 빨리 얘기를 해야 했지만, 아직 담당 PD가 결정 나지 않았다기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온 터였다.

“그래요? 아쉽군요. 함께 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라고 담당 PD는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뭐랄까. 오히려 반기는 듯한 인상이랄까. 음, 왠지 알 것도 같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은 거겠지. 하긴, 자신이 맡게 된 프로에 전임 피디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건 그리 반길 만한 일은 아닐 테지. 더구나 내가 신현정 피디와 꽤 친하다는 건 스태프들을 통해 들어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 게다가 몇 마디 나눠보니, 어떤 스타일인지 대충 감이 온다. 연예인도 아니고, 그저 메인 셰프라면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마스크와 입담 그리고 어느 정도 되는 요리 실력만 갖췄다면, 누구라도 데려다 써도 그만이란 생각인 듯하다. 그래도 나름 애정을 가지고 방송 촬영을 해왔던 나로서는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이상할 만치 아무렇지도 않다. 외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지 않아서 감사하라고나 할까. 나 또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담당 피디가 물어온다.

“계약서 살펴보니 회차당 계약하는 거로 되어 있더군요. 그러니 딱히 해지를 따로 할 필요는 없는 거 같고 그저 상호 간 협의만 하면 되는 듯한데, 괜찮으신 거죠?”

당연히 괜찮지.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시간을 낸 건데.

“예. 괜찮습니다.”

그래도 너무 티 내면 안 되기에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래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일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긴 해도 어쩌겠습니까? 이미 그리 마음먹으신 거 같은데. 암튼, 이제라도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살다 보면 또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빈말일진 몰라도 나 잘되라고 하는 얘기인데 웃어야겠지.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피디님도요. 그리고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종전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서 컨셉부터 싹 다 다시 잡았으니까요.”

역시. 이쯤에서 빠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하자, 담당 피디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래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어떻게 바뀌는 거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금세 접었다. 이제 와서 내가 알아봐야 의미 없기도 하고, 괜히 이상한 얘기라도 들었다간 찝찝하기만 할 테니까. 담당 피디와 헤어진 후 방송국을 나오기 전, 한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여태껏 한솥밥을 먹은 식구인데, 이대로 얼굴도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예, 진석 씨. 접니다.”

그와 얘기를 나누며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

“진짜 놀랐다니까요!”

역시나 수다스럽다. 맞은편에서 떠들썩하게 얘기하고 있는 한진석을 보며 웃고 말았다. 못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같이 촬영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든 걸까. 한진석이라는 사람 자체가 워낙 살갑고 유쾌해서 그런지 금세 친해지기도 했다.

“갑자기 피디님 그만두시고, 서 셰프님까지 하차하신다는 얘기 듣는데, 와아!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게…….”

점심으로 곱창을 먹으면서 술을 몇 잔 마시더니 끝도 없이 떠드는 그였다. 반면 조강훈 FD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서운한 거겠지. 신현정 피디도 떠난 마당에 나까지 그만둔다고 하니, 자신만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대개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이들이 보이곤 하는 모습에 다른 의미로 웃음이 난다. 저런 순수한 모습도 머잖아 희석될 터다. 수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또 새로이 받아들이면서, 흔히들 말하는 닳고 닳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경험이 많은 거로 포장하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이 아닌 일이 먼저가 되어가는 걸 테지.

“자, 한 잔씩 하죠! 우리 서 셰프님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헐이다, 진짜. 무한한 영광은 무슨. 건배사도 참.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따라 술잔을 들고 있는 나는 뭔지.

“위하여!”

한진석의 선창에 모두가 제창하고는 술잔을 쭉 들이켜고 있었다. 점심시간, 겨우 한 시간 만에 비운 술병만 소주로 스물다섯 병이었다. 한진석 포함해서 스태프 열여덟 명이서. 거기에 곱창 삼십 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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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술 한번 제대로 마신 셈이다.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냥 말없이 가기 뭐해서 그간 고생한 동료들에게 밥이나 한 끼 사주려던 게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다. 물론 난 마시지 않았다. 저녁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입에만 댔다가 뗐을 뿐이다. 그것도 한진석이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들었을 때에만.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뭐가요?”

회식 아닌 회식이 되어버린 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진석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었다.

“이거…… 어디 가서 막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는 한진석. 그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면서 내게 속닥거렸다.

“이번에 새로 오신 피디님 말이에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까 뵈니까 꽤 능력 있으신 분 같던데. 의욕도 넘치시는 거 같고.”

떠나는 마당에 악담을 할 생각은 없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하는 것도 별로고. 그래서 되도록 좋게 얘기했건만…….

“그게 문제라는 거 아닙니까? 의욕이 너무 넘치셔서 탈이에요, 탈!”

한숨을 푹 내쉰 한진석이 한참을 토로한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바뀔 예정이고, 또 새로운 패널도 영입했다는 얘기까지. 심지어 내가 그만둔다는 얘기를 하기도 전에 다른 셰프까지 알아보더라는 말까지 해준다. 본의 아니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다 듣게 된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하곤 이제 더 이상 관계가 없게 되었지만, 이왕이면 잘되었으면 좋겠는데……. 어째 예감이 별로다. 그렇긴 하지만, 말이라도 좋게 해야겠지. 한진석의 불만 아닌 불만까지 모두 듣고 난 뒤에야 말할 수 있었다.

“다들 건승하십시오.”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한진석을 비롯한 모두에게 그렇게 얘기하며 지갑을 꺼내려 했다.

“에헤이! 송별회에서 떠나는 사람이 돈을 내는 법이 어딨습니까?”

한진석이 극구 말린다. 하지만 사람들을 부른 건 나니까 내가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도 물러설 마음이 없다. 그 탓에 둘이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저어, 서 셰프님.”

언제 옆으로 왔는지, 조강훈 FD가 날 부르고 있었다.

“예?”

나도 모르게 얼떨결에 대답하는데, 그가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한 손으로 스피커 쪽을 막고서. 내 눈빛으로 ‘뭐죠?’하고 묻자, 조강훈 FD가 말했다.

“서 셰프님한테 온 전화인데요?”

나한테 온 전화? 근데, 그걸 왜 조강훈 FD한테? 의아해져서 물었다.

“……누군데요?”

조강훈 FD가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명제준 시장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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