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복마전 (3)2021.08.06.
이젠 좀 질린다. 오해하는 걸 수도 있지만, 장희경 관장이 날 찾는 이유가 내가 짐작하는 바와 그리 틀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만약 그렇다면……. 원래 재벌가는 이런 건가? 아직 강 회장님이 쌩쌩하게 살아계신대도 이 모양인데, 만일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정말이지 볼만하겠다. 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키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면서.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거…….”
응? 조금 다르네? 내가 예상했던 거랑. 그가 내미는 쇼핑백을 내려다보면서, 이걸 받아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헷갈리려 하고 있을 때였다.
“보약입니다.”
헐. 또 한 번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나? 애당초 장희경 관장과는 이렇다 할 관계가 아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원래부터도 재벌가 출신인데 삼한 그룹에 시집온 뒤엔 이 집안이 사실상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이 되면서 그 입지가 더욱 대단해진 여자가 바로 그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나란 놈은 그저 이 집안에 많고 많은 일꾼일 따름. 요 몇 달 보아온 그녀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자면 백이면 백 하찮게 보고 있을 터다. 그런데 보약? 그것도 사람을 직접 보내 가면서? 그 의도가 궁금하다. 대체 내게 뭘 바라고 이러는 걸까? 한층 더 의아해진 눈빛이 되어 남자를 보았다.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주십시오.”
“혹, 그리 말씀하면, 부담 가지실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평소 방송 잘 보고 있으며, 요사이 많이 바쁘셔서 아마도 원기가 상할까 싶어 이렇게 보낸다고도 하셨지요.”
중년의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차분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거참 말 잘하네. 이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은 대개 사짜, 그러니까 사기꾼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이 사람에겐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그만큼 산전수전 다 겪었었거나 본래부터 성격이 선하다는 거겠지. 혹은 자신의 마음을 무지 잘 숨길 수 있다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난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곤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신경 써주셔서 무척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잡을 틈도 없이 돌아서 걸어가는 남자. 통성명이라도 해야 했나 고민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방문을 열었다. 뭐,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게 되겠지.
“후우, 이것 참. 이걸 어쩌라는 건지.”
방으로 들어온 뒤, 쇼핑백을 열어보곤 한숨을 내뱉었다. 안에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어 풀어보니 진짜 보약이다. 낱개로 포장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비닐봉지 안에는 살짝 검은 빛이 감도는 갈색 액체가 꿀렁거린다. 혹시라도 약 말고 다른 거라도 있나 해서 뒤져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진짜 보약만 보낸 모양이다. 아, 물론 뭔가 다른 것, 그러니까 돈 같은 걸 바란 건 아니다. 오히려 경계했을 뿐.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걸 받는다는 건 말 그대로 쥐약일 테니. 난 보약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든 채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장희경 관장이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는. 다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 내가 강윤식을 만나고 온 걸 그녀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강형식과는 친구 사이 이상으로 가깝다는 것 역시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만. 몇 개월 전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어이없을 정도로.
*** 다음 날도 김진호 셰프의 주도하에 강행군이 이어졌다. 준석이 형은 매우 힘들어했는데, 내가 보기엔 실력이 달려서라기보단 오히려 심리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큰 것 같았다. 하기야, 형은 평소에도 김진호 셰프를 무척이나 어려워했으니까. 나 역시도 김진호 셰프를 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이번 경우엔 내 쪽에서 먼저 부탁했던지라 마냥 몸을 사릴 수만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정말이지 빡세게 보내고 난 후였다. 딸각. 맥주 마개를 따는 소리가 어찌나 상쾌하게 들리는지.
“후아!”
숨 한번 들이쉬지 않고서 한큐에 맥주캔을 비워내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자, 강형식이 실소를 흘린다.
“말을 하지. 술이 그렇게 마시고 싶었으면.”
“말도 마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진짜 물 한 모금도 편히 못 마셨다니까.”
“그래? 주방일이 그렇게 힘들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럴 일이 있어.”
설명하려다가 괜히 얘기가 삼천포로 빠질까 싶어서 관뒀다. 우선은 먼저 해야 할 말들이 있었으니까. 난 녀석과 함께 앉아 있는 차량 보관소를 한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도 참 안 변한다.”
여름에 만나서 이제 겨울이 되었다. 며칠만 있으면 새해이고. 그런데도 이곳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게 꼭 녀석 같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 내부 좀 바꿀까?”
내 마음을 모르는 강형식이 나를 따라 내부를 둘러보며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담은 여기까지.
“형식아.”
“……?”
녀석이 날 보고 있다. 뭐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캐치한 건지, 꽤 진지한 눈빛이다.
“어제 강윤식 만났다.”
아무런 대꾸도 없다.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는다. 그런 채로 녀석은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다음을 말하는 거겠지.
“나더러 밑으로 들어오래.”
여전하다. 강형식은 말이 없다. 그렇다고 눈빛이 흔들리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날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녀석의 그런 표정이 무얼 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날 믿는다는 거겠지.
“자기 말만 들으면 한몫 제대로 챙겨줄 모양이더라. 물론 말뿐이겠지만.”
빤한 이야기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단 열흘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왜 그런지 아냐?”
날 빤히 보고 있던 강형식이 나직하게 되물어온다.
“계획이 서 있는 거냐?”
“목적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냐?”
그가 쓰게 웃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고개까지 내젓는다. 그러더니 황당하다는 듯 말한다.
“목 밑까지 칼이 들어온 마당에 계획은 개뿔.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은 거겠지.”
그의 말속에는 주체가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나 나나 잘 알고 있다. 우리. 둘 다 살아야 사는 거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죽는다. 현재로선 그렇다. 나중에도 그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으면…… 물론 이건 수사적 표현이다만, 작게는 이 집에서 쫓겨나는 거고 크게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순간 강형식이 받게 될 타격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건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신규 브랜드 런칭에 제동이 걸리는 거고, 설혹 어렵사리 출시한다고 하더라도 나란 존재가 빠진 상태에선 브랜드 가치가 적어도 절반 이하로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그다음으로, 알게 모르게 그를 서포트하던 내게서 더 이상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곁에 있지 못하는 상황에선 제아무리 나레이션이라고 하더라도 큰 도움을 주긴 어렵다. 뭐, 정 안되면 요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녀석의 회사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 둘 다 강윤식 또는 강구철 사장의 압박에 쭈그러들어 웅크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럼 그 기회를 그들이 놓칠까? 결코, 그럴 리 없다. 완전히 짓밟으려 들겠지. 녀석이나 나나 그대로 당하진 않겠지만, 지금보다도 더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아니, 싸움조차 못 해보고 백기를 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까지가 내가 없는, 혹은 힘을 잃은 녀석의 미래. 그럼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아무리 현재 내게 힘이 되어주는 이들……. 고윤수 주방장님과 김진호 셰프를 비롯해 김진숙 회장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울타리가 되어줄 순 없다. 적어도 이 집 안에서 날 제대로 지켜줄 이는 누가 뭐래도 녀석. 강형식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날아간다? 그 즉시 나 역시 위태롭게 될 거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존재를 치워버린 이들이 그동안 그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던 날 그대로 둘리가 만무하다. 하아, 다시 생각해도 참 위태위태하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살아남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반격하는 시늉이라도 한번 해보려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일지라도 박박 굴려봐야겠지.
“내일, KBC에 가서 계약 해지하려고.”
“음……. 거기까지 손을 썼나 보군.”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바로 알아듣는다. 다만, 대상이 틀렸다.
“난 괜찮은데, 신현정 피디님이 당했지.”
“.....!”
눈을 치떴던 녀석이 입매를 비튼다. 뭔가 울컥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감정을 드러내진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선 그 사이에 또 한층 성장했다고 봐도 좋은 거겠지.
“그래서 피디님이랑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해보려고 하는데…….”
잠시 동안 설명이 이어지고. 묵묵히 내 얘기를 듣던 강형식이 눈을 반짝거렸다.
“좋은데?”
“그래?”
“빈말 아냐. 꽤 좋아. 아니, 무척!”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뭐, 다른 사람이라면 그럭저럭이라고 하겠지만. 너니까. 내가 아는 너라면, 대박도 가능할 거다. 아니, 대박 칠 거야!”
대체 이놈은 날 뭐로 보는 걸까? 무슨 히트 제조기쯤으로 여기는 건 아닐는지.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그걸 시작으로 기틀을 마련해보려고.”
“네가 그러는 동안, 난 신규브랜드 런칭하고 말이지. 모르긴 몰라도, 그것만 성공해도 강윤식이 지금처럼 함부로 굴지는 못할 거다. 그랬다가는 할아버지께서도 가만 두고 보시지 않을 테니까.”
하긴. 한창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사업을 망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손자라고 해도 귀엽게만 보긴 어렵겠지. 다른 무엇보다도 사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강 회장님이라면 말이다. 그런 면에선 또 한 명의 회장님도 빠지진 않겠지.
“뭐, 그랬다가는 C 마트 쪽에서도 그냥 두고만 보진 않겠지.”
같은 이치다. 김진숙 회장의 눈에는 나라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상품. 그것도 꽤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상품인데, 그 상품에 흠집이 나는 걸 두고 볼 회장님이 아니시란 얘기지. 나로서는 당연한 얘기를 한 건데, 녀석 입장에선 처음 듣는지 눈을 동그랗게 묻고 있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 내가 말 안 했나?”
“……?”
“광고 하나 더 찍기로 했다고.”
놀란 표정이 되었던 녀석이 싱긋 웃는다.
“좋은 소식이긴 하다만, 너무 한 거 아니냐?”
“뭐가?”
“네 이름을 달고 나오는 상품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아, 그 얘기군.
“그것도 찍긴 찍어야겠지.”
내 생전에 광고를 이처럼 많이 찍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뭘 그렇게 죽상이야. 남들은 못 찍어서 난리인데.”
“본업에 충실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지.”
“본업?”
그렇게 묻던 강형식이 갑자기 소리 내서 웃는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간만에 웃었다. 네 덕분에. 근데,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너……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 같은데…….”
“…….”
“서진영, 이미 넌 반쯤은 연예인이거든. 아니, 방송인? 아무튼, 공인이라는 거지.”
“고, 공인?”
“참네. 머리도 좋은 놈이 이럴 때 보면……. 얀마. 너 지금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나가봐. 전부는 아닐지라도 열에 다섯쯤은 네가 누군지 알 거라고. 아마 개중엔 사인해달라고 달려드는 사람들도 있을…….”
얘기를 듣고 보니 딴엔 그렇기도 하다. 다른 건 몰라도 요사이 어딜 가나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듯했으니까. 때론 녀석의 말처럼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도 했고. 내 표정이 바뀌는 걸 알아챈 강형식이 말을 바꾼다.
“그러니까 즐겨.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사인해달라고 하는 것도 전부. 이왕 그렇게 된 거, 너무 ‘요리사’라는 틀 안에 널 가두지 말라고. 아, 물론 본처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뭐, 본처 버리고 잘된 놈 못 봤으니까.”
비유를 해도 꼭.
“아, 몰라 몰라. 왜 얘기가 그쪽으로 새는 건데.”
“뭐긴. 광고 얘기하다가 이렇게 된 거지.”
“하아. 요즘 같아선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주방일에, 방송, 광고. 거기에 가끔은 나레이션이 시키는 일도 해야 하는데……. 강윤식까지 지랄이다. 요즘 같아선 진짜 욕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
“걱정 마. 이미 광고 기획 들어갔으니까.”
대충 계획이 서서 그러는지, 웃으면서 놀리고 있다.
“그래 자식아. 돈만 많이 줘봐라. 그깟 광고 백번도 더 찍어주마!”
보란 듯이 대거리를 해줬더니, 녀석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곧 있으면 떼부자가 될 놈이 우는 소리는. 자자, 날도 추운데 마셔.”
맥주캔을 받으며 툴툴거렸다.
“땀이 식어서 그런가, 얼어 죽겠구먼.”
“취하면 금방 열 올라와.”
“참네. 그게 한겨울에 친구한테 할 소리냐?”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진동한다. 응? 꺼내서 확인하니……. 기다리던 전화다. 강형식에게 손을 들어 보이자, 녀석이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문다. 통화버튼을 터치하며 말했다.
“예. 피디님.”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음성이 들려온다.
- 너무 늦게 전화 드렸죠?
신현정 피디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