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복마전 (2)2021.08.04.
강윤식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 표정은 분명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너도 별수 없구나…… 하고. 속으로 실소를 흘리고 있을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벗어나 거실 한쪽으로 가더니, 그곳에 있는 작은 바에서 양주 한 병을 들고 온다.
“좋군.”
뭐가 좋다는 걸까. 아니, 그전에 대답을 하지 않고서 말을 미루는 모양새가 마뜩잖다. 어떤 대답을 듣던 혹할 나도 아니지만, 그 이전에 저런 태도를 보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을 얕잡아보는 느낌이라.
“지금 여기엔 자네와 나, 이렇게 둘밖에 없지.”
“……사모님께서 계시지 않은 겁니까?”
“처가에 갔어.”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런 거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사이도 아니거니와, 설사 듣는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런 거다. 말이 나왔으니, 묻는 거 전혀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강윤식도 마찬가지인듯했다. 내가 묻는 바에 대답은 해주고 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오히려 소파 쪽으로 다가와 빈 술잔을 내려놓더니 술을 따른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사람은 말이야. 누구나 그릇이란 걸 타고 나는 법이야. 그게 본인의 능력이든, 아니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위 혹은 재화든, 그것도 아니라면…… 기가 막힐 정도로 운이 좋든 간에. 타고난 그릇은 바뀌지 않아.”
“글쎄요. 저와는 생각이 좀 다르시군요.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쉼 없이 갈고 닦으면 그릇이란 커지는 법이라고.”
“아니. 그릇은 커지지 않아. 그렇게 보이는 건, 애당초 타고난 그릇조차 채우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기 때문일 뿐.”
내 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자, 자신의 술잔을 채우더니 쳐드는 그였다.
“아까 물었지? 어떤 자리를 줄 수 있느냐고?”
“…….”
그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날 보지도 않은 채,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난 술을 마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슨 흉계가 있는지도 모르니 조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것보다는 그저 강윤식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그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곤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고 있었다.
“내 바로 옆자리를 주지.”
난 눈을 가늘게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말하는 바를 곰곰이 씹으면서. 옆자리? 그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는 둘째치고, 그걸 내게 준다는 것 자체에 믿음이 가질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 않나. 원래 그런 자리는 자신의 수족과 같은, 즉 온전히 자신의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이가 아니면 주지 않는 법. 그런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비워두는 게 나을 터다. 그런 자리를 내게 준다? 웃기는 소리지.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런 날 봤는지, 강윤식이 술잔을 든 채로 말했다. 한데, 소파에 앉은 채로 올려다본 강윤식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마, 그걸 처음부터 덥석 주겠다는 거로 들은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실망인데?”
“그러셨습니까? 전 잠시나마 설렜는데요.”
“그런 감정…… 나쁘지 않아. 난 솔직한 걸 좋아하거든. 누구처럼 속으로 꽁꽁 싸매고 뒤에서 딴짓거리나 하는 놈은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강윤식이 자신의 사촌인 강형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도 실장님 말씀 듣자니, 힘이 좀 빠지네요. 제가 너무 기대가 컸…….”
스윽. 손을 들어 올려 내 말을 막은 강윤식이 난 지긋이 바라본다. 말을 멈추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해가 있나 본데, 난 지금 스카우트 제의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네.”
“……?”
“거래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거래요?”
“그래, 거래. 자네가 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또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오고 싶다면…… 입증하게. 자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
대체 뭘 입증하란 걸까. 그게 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가장 먼저 시킬 뭔지. 아마도 그건……. 강형식과 관련된 무엇이겠지. 그것도 녀석에게 해를 끼치는. 황당하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강윤식을 바라본다. 저 웃는 면상이 역겨워서 속이 다 울렁거린다. 이런 내 속내를 모르는 강윤식이 여전히 큰 은혜를 베푼다는 얼굴로 지껄여댄다.
“그렇게 한다면, 아까 말한 내 ‘옆자리’도 꿈만은 아닐 걸세.”
소파 자리에 털썩 앉으며 날 묘한 눈길로 쳐다보는 강윤식. 그가 입가에 머금은 비릿한 미소만큼이나 비틀어진 눈길로 날 보고 있었다.
“못 믿나 본데, 난 이제껏 내 입으로 말한 것들 중 단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이 없네.”
“그렇습니까?”
“왜 못 믿겠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란 게 입증된다면,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옆자리로 끌어올릴 걸세.”
난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맞장구도 치지 않은 채 묵묵히 들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걸까. 강윤식이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후 날 바라보며 하는 말투는 살짝 가볍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건 말 그대로 작은 일에 불과하지. 크게 보게. 진정으로 자네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윤식 역시 더는 묻지도,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잠시간 침묵이 오간다. 그 침묵 속에서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고, 나는? 말할 것도 없이 받아들일 생각은 1도 없다. 다만……. 강윤식이 지금 이러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간질. 병법에선 반간계라고도 하던가. 아무튼, 강형식과의 사이를 벌리려는 수작임에는 분명한데. 그래서 그가 얻는 게 뭐지? 겨우 나 따위가……. 그렇군. 내가 아니라 내 뒤군. 난 머릿속에 김진숙 회장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그거군. 강형식에게 힘이 될 만한 요소는 싹 다 배제하겠다 이건데. 웃음밖에 안 나온다. 친구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 녀석이 가진 힘은 강윤식이 가진 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작다. 얼마나 작냐 하면, 강윤식이 창고 열쇠를 쥐고 있는 거라면 강형식은 겨우 쌀 서 말 정도를 힘겹게 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빼앗겠다는 얘긴가? 하아, 진짜 생판 남이라도 그렇게는 안 하겠구만. 하기야 아예 남이면 신경이나 안 쓰지. 형제라면 또 모를까, 사촌에겐 더없이 인색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 하필이면 강형식은 그런 사촌을 지녔을 뿐이다. 그게 녀석의 복이라면 하는 수 없지. 멱살 잡고 죽기 살기로 싸워보는 수밖에. 이렇게까지 전부 빼앗으려고 한다면. 과연 내가 얼마나 힘이 되어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머릿속을 결정하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긍정의 신호로 느껴졌던 걸까. 강윤식 또한 얼굴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마치 자기의 계산대로 되었다는, 어떤 의미에선 항상 누군가를 짓밟고 서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없을까요?”
“시간? 그게 왜 필요하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되묻고 있다 속으론 기가 막혔지만, 여전히 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저로서도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음, 그렇기도 하겠군. 그래서 얼마나 기다려달라는 거지? 설마 내가 오래 기다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제가 가방끈이 짧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아둔한 건 아닙니다. 열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잠시 날 바라보던 강윤식이 픽하고 웃는다. 즉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생각대로 다 되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 증거로 그는 다소 거만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재수 없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이상은 곤란해. 내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앉은 채로 날 배웅한다. 아니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미 자기 사람이라도 된 줄 아는 걸까? 아무튼,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돌아선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별채를 빠져나왔다.
***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그나마 뚫리는 기분이다. 후우, 뭔 놈의 집이 그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이건 단순히 내가 긴장했다거나 뭔가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놈과 한집에 있다는 것, 그것도 마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했을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게, 강윤식은 명제준 시장과 함께 나까지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던 놈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신문에 사진이 실린다는 것은, 그것도 이름 석 자가 함께 거론되는 얘기가 하필이면 성 추문이라는 건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된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놈은 그걸 서슴없이 했다. 그것도 내가 목표가 아닌, 강형식을 잡기 위한 미끼로. 대체 그 일을 어디까지 끌고 갈 예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과연 끝나기는 한 걸까? 어쩌면 아직도 진행 중일지 모르지. 김진숙 회장의 도움으로 잠깐이나마 비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 비가 장대비가 되는 순간 둘 중 하나가 된다. 온몸이 쫄딱 젖거나,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어딘가 누군가의 지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뭐, 굳이 얘기하자면 지금은 김진숙 회장의 처마 밑에 서게 된 꼴이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계속해서 남의 눈치나 보면서 살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여전히 칼자루는 강윤식이 들고 있는데. 아니, 과연 그가 진짜 그 칼의 주인이기나 할까? 혹여 강윤식의 아버지…… 강 회장의 둘째 아들인 강구철 사장이 아닐까? 가만 보면, 강구철 사장은 강형식을…… 개망나니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생애 처음으로 뭔가를 제대로 해보려는 조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모양이던데……. 아무튼지 간에 방책을 구하긴 구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긴 한데,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강윤식이 날 불렀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면전에다 대고 그에게 ‘대체 당신이 꾸민 음모가 뭐지?’하고 물을 수도 없다. 그런다고 사실대로 말해줄 리도 없거니와, 애당초 캐묻는 순간 오히려 뒤를 잡히기 십상이다. 지금이야 그저 심증뿐이라, 명제준 시장을 시작으로 나와 강형식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려 한 게 강윤식일 거라고 믿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런 마음을 들키는 순간 그건 확신이 된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그리고 그 순간 강윤식은 판을 뒤엎겠지. 그러곤 뒤에서 깔짝깔짝 장난처럼 누군가를 조종하던 것과는 강도가 다른 수를 동원할 거다. 그럼 우리는? 비바람이 아니라 폭풍에 휘말려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거다. 그러니 당연히 지난번처럼 대차게 나갈 수만은 없었고. 짜증은 좀 나지만, 참아야 하는 이유다. 대신 말미를 얻을 수 있었다. 열흘. 더 길면 의심스럽고, 짧으면 내가 대책을 세우기엔 그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테니. 그 정도가 딱이다.
“서두를 필요가 있겠네.”
일단은 강형식에게도 오늘 일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 난 한차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개만 돌려서 별채를 보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이명준. 공식적인 직함은 모르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강윤식의 수발을 드는 하수인. 그가 가만히 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거려 인사를 하곤 얼른 그곳을 떠났다. 그러고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강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 주고.
목소리가 밝은 게, 엊그제 일은 마음에서 털어버린 모양이다. 이런 점이 녀석의 장점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지.
“좀 상의할 게 있는데, 오늘 시간 되냐?”
- 글쎄. 야근해야 할 듯싶긴 한데……. 급해?
난 잠시 계산을 해보곤 그에게 말했다.
“아니다. 일 봐라.”
- 뭔데 그래?
얘기해줄까 하다가 관뒀다.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란 생각에.
“시간 날 때 연락해. 내일이든 모레든.”
- 참네. 사람 궁금하게. 알았다. 되도록 내일은 볼 수 있도록 해볼게. 됐지?
“그래. 끊자.”
이번엔 내가 먼저 끊었다. 항상 녀석이 하던 짓을 했더니, 묘하게 상쾌하다. 뭐, 녀석의 성격상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그렇게 막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
계단을 올라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날 기다리고 있구나. 그것은 직감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자 앞에 이르렀을 때, 역시나 예상대로 그가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누구시죠?”
되도록 정중하게 묻는 내게 그가 대답했다.
“관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관장님이시라면?”
사모님?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놀랄 수밖에. 사모님…… 그러니까, 강 회장의 부인. 장희경 여사. 그녀가 왜? 순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 집안 진짜……. 완전 복마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