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복마전 (1)2021.08.01.
지친다. 끊임없이 지적하는 김진호 셰프의 지시를 따르며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나니 몸이 확 퍼져버렸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김진호 셰프가 원래부터 말이 많은 사람인 줄 알 터다. 그만큼 나나 준석이 형의 실수가 잦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다.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됐고, 전혀 모르던 것까지도 습득할 수 있었으니까. 겨우 하루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금세 요리 실력이 늘지 싶었다. 왜 안 그럴까? 머리에는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에 못지않게 손은 칼과 불에 익숙해져 가는데. 그렇다곤 해도, 역시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래서 아저씨가 체력을 얘기한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 연락도 못 드렸네. 간만에 인사라도 드려볼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난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 저에요, 사모님.”
- 응, 진영아. 잘 지내지?
“저야, 잘 지내죠. 아저씨는요?”
- 계속 병원 다니면서 조심하고 있지.
사모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하게 얘기를 이어간다. 혹여라도 아저씨가 들을까 봐서 그러시는 거겠지.
- 그이가 좀 안 됐긴 해. 알잖니, 그 양반에게 쇠 빼면 아무것도 없는 거.”
답답하기도 할 테다. 폐렴도 아니고, 폐암인데 쇳가루와 석탄 가루 난리는 대장간이 가당키나 할까. 그게 아니라도 항암 치료 때문에 부쩍 힘이 달리실 텐데 지금으로선 망치질 한번 하기도 쉽지 않으실 테고.
“그래도 치료는 잘 돼 가고 있는 거죠?”
- 호전 중이래.
“다행이네요.”
- 의사 말로는 일찍 발견한 덕분이라더라.
내게 공을 넘기는 사모님이셨지만, 따지고 보면 내 덕분이라기보단 나레이션 덕분이다. 그걸 말할 수 없어서 이렇게 공치사를 듣고 있다.
“연초에 한번 들를게요.”
- 그전에는 힘드나 보네.
처음 뵀을 때랑은 좀 다르시다. 그때는 전형적인 내유외강의 모습이시더니. 지금은 어쩐지 약해진 모습을 보이신다. 하기야, 반평생을 함께한 남편이 병환으로 힘들어하는데,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 사람답지 못하다는 방증일 테니. 아니면, 그만큼 날 의지하신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조만간 들려야겠다는 마음이 들게끔 한다.
“최대한 빨리 갈게요.”
- 무리하진 말고. 아, 요즘 너 나오는 프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재밌게 보고 있다.
“그래요?”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괜히 걱정하실까 봐. 대신 좋아하실 만한 얘기를 꺼냈다.
“곧 출시될 거 같아요.”
참 별일이다. 그게 뭐라고, 그런다니? 팔리기나 하겠니?
“아시잖아요. 사모님 솜씨 최고인 거.”
- 호호호. 우리 진영이는 말도 참 예쁘게 하지. 너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그럼 저 아들 삼으시면 되죠.”
- 진짜 그럴까 봐. 그이도 너라면 껌벅 죽는데.
“에이. 호적에 올려야만 아들인가요. 제가 아들 역할에 딸 역할까지 다 하죠, 뭐.”
- 그래라 그럼. 너 오늘부터 내 아들. 그이한테 말하면 간만에 웃는 거 볼 수 있겠네.
농담이지만,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싫거나 하진 않다. 나 역시도 그저 빈말로 던지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래들 사셔야 해요. 저 불효자 만들 생각 아니시면요.”
- 그래야겠네. 근데, 그 얘긴 직접 와서 해야겠다. 내가 하면 지어내는 줄 알 테니. 그 양반 네가 하는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테니까, 힘내서 치료받지 않겠니?
“예. 그럴게요. 자주 연락도 드리고요. 근데 오늘은 아저씨랑 통화하기 어려운가 보네요?”
- 하필 잠이 들었네. 너한테 전화 올 줄 알았으면 버티고 있었을 건데.
눈에 훤하다. 투덜거리면서도 아닌 척 전화를 기다리셨겠지.
“뭐, 오늘만 날인가요. 또 통화하면 되죠. 아니면, 직접 하시라고 하든가요.”
- 글쎄다. 너 바쁘다고 내가 전화만 들어도 불호령인데. 손수 전화기 드시겠니? 아, 근데 바쁜 거 아니니?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너무 오래 통화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일 끝나고 막 들어가던 참이에요. 참, 저 며칠 뒤면 광고 찍은 거 나올 건데…….”
금방 끊을 것 같던 통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방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고, 내가 해준 얘기마다 사모님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그렇게 한참을 전화하다가 끊고 났을 때였다. 때마침 톡이 날아들었다. 이하연이었다.
- 일 끝났어요?
- 앙, 보고 싶다.
- 지금 뭐 해요?
- 전화해도 돼요?
- 혹시 자는 건 아니죠?
- 아니면 씻나?
폭탄 수준으로 톡을 연달아 날리는 건 여전하다. 참네. 이러다 언제 씻나. 픽하고 웃고는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응? 누구지? 혹시 김진호 셰프이신가? 아니면 고윤수 주방장님? 강형식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녀석이라면 전화부터 했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방문을 열었는데……. 한 남자가 앞에 서 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강형식의 차가 고장 나기 전날 밤 보았던 남자였다. 그 후로 본 적이 있었고. 누가 보냈는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다만 긴장을 풀지 않고, 기다렸다. 상대가 먼저 말문을 열 때까지. 그러는 동안에도 톡은 계속해서 날아들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강윤식 실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난 가만히 남자를 보다가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모시랍니다.”
따라가야 하나? 솔직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감정과는 달리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만은 강윤식도 날 건드리지 못한다고. 여긴 다른 곳도 아닌 삼한 그룹 강 회장, 그러니까 강윤식의 할아버지가 머무는 저택 안이었고 시기적으로도 명제준 시장 건으로 김진숙 회장이 나름의 저력을 보여준 때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뭔가 일을 꾸민다? 아무리 강윤식이라도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을 거다. 그렇다고 배포가 그리 큰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죠. 한데, 그전에…….”
“……?”
“그쪽 이름이나 좀 압시다.”
어째서? 하는 눈빛이었다. 의아해하면서도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인데, 대답은 해줘야겠지.
“자주 볼 사이인 거 같아서 말입니다.”
“…….”
“강윤식 실장님, 수족 같은 분 아닙니까? 내 생각에는 앞으로도 쭉 그분이랑 난 얽힐 일이 많을 거 같은데, 그럼 그쪽을 자주 만나지 싶어서. 그때마다 애매한 호칭으로 부를 순 없지 않겠어요?”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 드는 어투였다. 마치 잘 갈린 칼처럼.
“이명준입니다.”
“제가 뭐라 불러드리면 됩니까?”
이왕이면 공식적인 직함을 아는 게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지 싶어 물었는데…….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헛참. 철벽일세.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을 때, 이명준이 말했다.
“가시죠.”
“그럽시다.”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나섰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는 중에도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에선 계속해서 톡이 울리고 있었다. ***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때론 자리에서 오기도 하고, 또 때론 돈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혹은 총칼로 강탈하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가 어렵지 그렇게 쟁취한 권력은 강력한 힘과 함께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걸 손쉽게 만들어준다. 왜냐면, 권력의 본질은 사람을 부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정보가 되고, 행동력이 되며, 한편으론 세력이 되어주곤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삼한 그룹의 피붙이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설사 온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따라서 이 저택 안은 사실상 삼한 그룹의 실세들이 모여 암중으로 권력을 다투게 될, 아니 이미 싸우기 시작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하지만 두 사람만은 이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완벽하게 비껴나 있었다. 한 명은 삼한 그룹의 주인인 강 회장이었고, 또 한 명은……. 그의 후처인 장희경. 금마 그룹의 방계라 할 수 있는 제도 철강의 차녀로, 현재 혜암아트홀 관장인 그녀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닌바, 그녀 역시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란 것을. 그렇기에 장희경 관장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싸움터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 또한 자신만의 싸움을 위해 물밑에서 차곡차곡 기반을 쌓아 올리는 중이었다. 지금 그녀의 방에서 오가는 대화도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서진영을 불렀다?”
“예. 방금 이명준이가 직원 숙소에서 서진영과 함께 나오는 걸 확인했습니다.”
“흐음…….”
눈을 가늘게 한 채 묘한 콧소리를 내던 장희경 관장은 문득 떠올렸다. 주방에서 메뉴를 함부로 바꾼 일을 두고 고윤수 주방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 일의 중심에는 서진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서진영은 알게 모르게 집안일 곳곳에 개입한 듯 보인다. 당연한 일이지만, 강형식이 배후에 있음이 분명하다.
‘슬슬 정해야 할 시기가 오는 건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권력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차라리 권력을 가진 자를 손에 쥐는 게 나을 터. 어느 왕조든 나라를 다스린 것은 왕이었지만, 그 뒤에서 왕을 움직인 것은 태후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그녀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다만, 누굴 선택하느냐가 문제일 뿐. 물론 시기도 중요하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선택지로 꼽은 패들의 정확한 힘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고.
“아무래도 한 번쯤은 따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군.”
“그럼 어찌할까요? 지금이라도 부를까요?”
장희경 관장은 눈앞에 있는 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선 사실상 유일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제도 철강에서부터 자신을 따라 온 사람으로, 지금은 혜암아트홀 기획실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지금 끼어들면 강윤식이가 좋아라 하겠네.”
“…….”
“쓸데없는 짓 말고, 일단은 지켜봐. 그러고 있다가 한번 보자고 하고. 그때가 언제인지는 따로 말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남자가 돌아서 방을 나가고 난 뒤, 혼자 남게 된 장희경 관장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 키맨은 귀천이 따로 없는 법이지.”
열쇠가 뭐로 만들어졌든 상관없는 것처럼. 왜냐면, 애당초 열쇠라는 물건은 그저 자물쇠를 여는 것 이외의 용도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서진영이야말로 제격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면, 그 열쇠가 되어줄 사람으로선.
*** 처음 와본 별채는 겉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공간이 무척 넓었다. 그에 비해 상상했던 것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또 보는군.”
참네. 쉬려고 하던 사람을 부른 게 누군데. 난 어이가 없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권하는 자리……. 유리로만 만들어진 테이블을 앞에 두고 강윤식과 마주 앉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 강윤식이 먼저 말하기를.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미 날 부를 때부터 할 말이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 꽤 잘나간다지?”
“덕분입니다.”
성의 없는 대답이라 그런가, 강윤식이 대번에 코웃음을 친다.
“입에 발린 말은 그만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가만히 있었다. 굳이 뭐냐고 묻지 않아도 알아서 얘기할 것을 알기에.
“삼한 전자에 자리를 마련해주지.”
기가 차다. 어디에 뭘 마련해? 그래서 그 자리는 어떤 자린데? 아니, 그전에 내가 거기 가서 뭘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대가로 내게 바라는 건 뭐고?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비웃음이다. 그걸 달리 해석했는지, 강윤식이 한층 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내 밑으로 와. 명예까진 모르겠고, 부만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게 해주지.”
휘유! 자칫했으면 휘파람을 불 뻔했다. 대체 얼마나 엄청난 걸 요구하려고, 그 정도까지 베팅을 하는 건가. 눈을 반짝였다. 마치 혹한다는 듯이. 적어도 왜 불렀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그래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난번처럼 괜스레 자극해서 내가, 아니 강형식이 얻을 게 뭐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머뭇거리다가 입매를 반드시 했다. 흔들리는 결심을 굳힌 것처럼. 그러곤 주저하지 않고 얘기했다.
“삼한 전자라고 하셨는데…… 어떤 자리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