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손맛 (3)2021.07.28.
간만에 또 당황스럽네. 아니, 생각해보면 나레이션이 들려올 때마다 당혹스럽지 않았던 게 오히려 손에 꼽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지가 알람이야? 이제 무슨 위험신호를 딱딱 타이밍에 맞춰서 알려주네? 음,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그때 이후로. 뭔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더니만. 아직까진 그게 뭐라고 딱 집어 얘기하긴 어렵지만, 지금 이 정도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이하연이 막 통화를 시작하고 있는 상대방이 부모님이거나 집안 어른쯤 되겠네. 어쩌면 대현 그룹 이 회장일지도 모르겠다. 난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지켜보며, 만일 오늘 함께 밤을 보낸 게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렸죠?”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전화를 끊은 이하연이 웃으며 내게 물어와 금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아뇨. 근데, 집?”
“예. 어제 왜 안 들어왔냐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뭐라고 했을까? 아니, 저쪽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지가 궁금하다.
“……밤새워 일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했죠, 뭐.”
하아……. 맥이 탁 풀린다. 동시에 미안해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녀에게 거짓말을 시킨 셈이므로. 그래서 미안하려고 말하려는데……. 덥석 하고 그녀가 내 팔짱을 끼어 온다.
“얼른 가요. 이러다 진짜 늦겠어요.”
유난히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그늘이 느껴지는 건 그저 착각일 뿐일까?
*** 저택으로 오는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차라리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거나 뭔가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 한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하연이 내게 손을 내밀지 않는 한, 오롯이 그녀만의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집에다 대고 또다시 거짓말을 하게 될 터다. 원래 거짓말이란 하면 할수록 늘어나고, 또 커지는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이하연의 성격상 언제라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내 존재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남자답게 내가 직접 부딪혀볼 수 있을 테니까. 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려면 실탄부터 마련해야겠지.”
어떤 싸움이든 간에, 철저한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는 종국엔 패배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실탄이란 별게 아니다. 입지를 높이는 것. 그것이 설사 대한민국의 상위 1%, 아니 0.1%인 재벌의 눈에 우습게 보일지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터였다. 방송……. 어떻게든 계속해야겠구나. 물론 KBC에선 나올 생각이다. <내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대한 애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일은 결국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라고. 아무리 승률이 높은 게임도 함께 뛰는 파트너가 개차반이면 그 게임은 질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는가. 아아, 그렇다고 해서 아직 신현정 피디의 후임으로 오는 신임 피디도 보지 못했는데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건 금물이겠지만, 그 이전에 신현정 피디를 쫓아낸, 즉 그 윗선의 사람들이 문제 아니겠는가. 그 사람들과는 한솥밥을 먹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부디 신현정 피디가 JTL과의 얘기가 잘되길 바랄 뿐이다. 쯧, 신현정 피디는 그렇다 치고. 사실 내가 문제긴 문제다. 그녀에게 말한 컨셉대로 밀어붙이려면 진짜 어지간한 공력 없이는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김진호 셰프에게 도움을 청했던 거고. 과연 가능할까? 요리를 손에 익힌다는 건 못해도 몇 년은 족히 걸릴 일인데, 그걸 속성으로나마 몇 달 안에…… 그것도 방송을 이어가며 해내야 한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어쩌랴. 나레이션이 말해준 대로라면, 현재로선 그 길이 가장 빠르고 또 안전한 길인 것을. 그러고 보면 어떨 땐 진짜 얄미운 거 같다. 날 위하는 척, 그래서 결과적으론 강형식을 돕게 만들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는 일을 툭툭 던져 놓곤 그대로 입을 다물기 일쑤. 그 후엔 나 몰라라 하는 게 여간 얄궂은 게 아니다. 아까도 봐라. 이하연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며 고민거리만 던져주곤 그걸로 끝이다.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졌으니까.”
고민에 이어 쓸데없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어느새 차는 저택 앞에 다다랐다. 한데, 문이 열리질 않는다. 아! 그렇지. 이거 아직 등록이 안 되어 있지. 난 차에서 내려 대문 옆쪽 기둥에 달린 CCTV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나와 차를 연달아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내 차라고 말이다. 보안요원들이 용케 알아들었는지, 잠시 후 문을 열어준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남자 한 명이 다가와 나와 차를 살펴보곤 여러 가지를 묻고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차량 통과증을 발급하기 위한 절차라나 뭐라나. 그걸 위해서 내 신분증과 차량등록증까지 줘서 보낸 뒤,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가까워져 있었기에, 숙소까지 들렀다 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하루밖에 안 쉬고 찾은 주방이건만, 느낌이 또 다르다. 연애를 시작해서 그런가? 아니면…….
“왔냐?”
준석이 형이 주방에 김진호 셰프나 고윤수 주방장님이 안 계심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는 거로 봐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데.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사실은…….”
형이 뒤를 힐끔거리며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하고 있을 때였다. 안성댁 아주머니나 혜순이 누나는 오히려 이쪽으론 시선도 던지지 않고 있었지만, 대신 문이 열리며 김진호 셰프가 모습을 드러내셨다. 언제나처럼 위아래로 쫙 맞춰 입은 검은 조리복이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셨다.
“집에 일이 있었다고?”
“예? 아, 예.”
“잘 해결됐고?”
대체 뭘 어떻게 얘기한 거람. 준석이 형을 바라보았지만, 형은 모르는 척 눈도 안 마주치고 있었다. 나참, 나더러 어쩌란 건지. 하기야. 연애하느라 지각했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예.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 뭔지는 모르지만, 잘 됐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얘기한 김진호 셰프가 나와 준석이 형을 함께 부르더니 말씀하셨다.
“원래 좀 더 일찍 오기로 되어 있었다만, 새로 들어오기로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일정이 틀어지고 말았다.”
새 직원을 구한다고 했었던 게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김진호 셰프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알겠지만, 진영이가 주방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면서 사실상 결원이 생긴 셈이라 그동안 준석이가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뽑긴 했다만, 상황이 좀 묘하게 꼬여서 진영이도 앞으론 될 수 있으면 주방에 집중해줬으면 한다.”
김진호 셰프의 얘기에 준석이 형이 의아한 눈빛을 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사실상의 결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방송과 그 밖의 일들로 바쁘던 나였으니까. 더구나 삼한 그룹에서도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라든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날 내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고용계약을 다시 한 상황이니, 준석이 형은 새로 온다는 직원과 어떻게든 손발을 맞춰서 일을 해볼 생각이었을 거다. 한데, 앞으론 나도 주방일에 매진하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
하지만 아직까지 김진호 셰프의 말이 다 끝난 게 아니었기에, 준석이 형은 궁금한 게 있어도 차마 묻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앞으로 준석이가 메인 요리를, 진영이가 서브를 맡고 새로 들어오는 막내가 그 밖의 잡일을 도맡는다.”
“……!”
“……!”
우린 둘 다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아니,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안성댁 아주머니와 혜순이 누나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서도 메인 요리를 책임지는 건 늘 주방장 몫이다. 그리고 아래에 나머지 요리사들이 서열대로 자기가 맡은 음식을 하나 혹은 두 개 정도를 맡아서 시간 내에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시스템이었다. 잡일을 맡은 요리 보조야 밑 재료를 씻고 다듬고, 설거지와 바닥청소 등을 하는 게 보통이었고. 한데 지금 김진호 셰프는 그걸 과감하게 깨고 있었다. 한마디로 준석이 형을 메인 셰프의 자리로 올린 것이다. 덩달아 나까지 위쪽으로 올라간 셈이고. 덕분에 예전엔 꿈도 못 꿨을 요리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문제는……. 그걸 해낼 수 있는가다. 나나 준석이 형이나. 만일에 하나라도 요리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냥 우리만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진호 셰프는 말할 것도 없고, 고윤수 주방장님께까지도 불똥이 튄다. 더구나 여긴 다름 아닌 한국 제일의 재벌가라는 삼한 그룹 총수의 저택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는 건, 한국 요리계에서 축출돼도 할 말이 없다는 얘기인 거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저 그런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는 거야 문제가 될 게 없겠지만, 이제까지 쌓아 올린 것들을 생각하면 바닥까지 추락한 거나 다름없다.
“다,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준석이 형이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하지만 김진호 셰프는 자신의 입으로 한번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삼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해하지 마라. 너희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게 아니니까. 옆에서 계속 지켜볼 거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밀어낼 거다.”
나나 준석이 형이나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밀어낸다? 적어도 그날은 눈앞에서 지옥이 펼쳐진다고 보면 될 터다. 아니, 그로부터 일주일, 어쩌면 한 달이 넘게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지. 더 무서운 점은 어떤 식으로 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거다. 여태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평소엔 과묵하고 진중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김진호 셰프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두렵다.
“저, 전…… 도저히…….”
준석이 형이 안절부절못하다가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 내가 말했다.
“하겠습니다!”
흠칫. 준석이 형이 얼마나 놀랐는지 숨과 함께 말을 도로 삼키며 한껏 커진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 너! 너…….’
이쯤이지 않을까? 후우, 그 심정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청했고, 김진호 셰프가 수락했으며, 어쩌면 고윤수 주방장님의 묵인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피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 거였으면 애당초 부탁하지도 않았다. 뭐, 그게 이런 식으로 부담까지 지워지는 일이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는 게 착오일 뿐. 그저 단순히 트레이닝 차원에서 요리를 좀 더 빡세게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건만. 하나 세상엔 물러설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기호지세라고 하던가. 지금 와서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셈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내일부터 시작할 테니 두 사람 다 마음 단단히 먹도록.”
평소답지 않게 당부까지 하는 김진호 셰프를 준석이 형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난 가만히 손을 말아쥐곤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란 거지. 결심을 굳히는 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강형식과 강윤식. 어쩌다 보니 나와 질긴 인연으로 엮인 두 사람의 얼굴이.
*** 다음 날 아침. 새벽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에 출근한 건 그만큼 긴장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하루였지만, 어제와 오늘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니까. 주방 내 서열이 높아졌네 마네 하는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애당초 반쯤은 주방에서 밀려나 있던 내게는 상관없는 얘기이기도 했고.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오늘부터 손에 익히게 될 요리는 곧바로 실전에 써먹어야 하는 실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거였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주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문을 열었다. 당연히 아직은 아무도 오지 않았을 것임을 알기에 딱히 인사 따위는 하지 않……. 응?
“누구……세요?”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조리복을 단정하게 입은 채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