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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손맛 (2) (128/204)

#128. 손맛 (2)2021.07.25.

원래는 한두 잔만 하려고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짓인지라 맨정신엔 버거울 거 같기도 했고, 반지를 주기 전에 분위기도 띄울 겸 간단히 와인을 딴 건데. 어쩌다 보니 한 병을 다 비우게 됐다. 황당한 건 그중 3분의 2를 그녀가 마셨다는 거다. 그래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니라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만 갈까요?”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자꾸 내 얼굴이랑 내 손, 자기 손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고 배시시 웃는다. 그러길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좋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내 입장에서야 이하연 같은 여자가 좋아해 준다고 하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예쁘지, 착하지, 똑똑하지. 배려심도 많지. 자기 말로는 집착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정도는 귀여운 애정표현에 불과하고. 집안이 조금, 아니 많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사귄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인연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막말로 나중엔 그녀가 싫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벌써부터 김칫국 마실 일도 없지. 그러니 구더기 무서워 장조차 담그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머저리지 싶었다. 그래서 나름 용기를 낸 건데……. 그녀는 왜 날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까?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능력이 많은가 하면 아직 제대로 된 요리사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방송 조금 탄 정도로 이하연이 그러는 것 같지도 않고. 음, 나레이션 말대로 그녀의 부친하고 닮아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처음 만난 날 봉변당할 뻔한 걸 구해줘서? 정말 그런 거라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그때 생각이 나서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어쩌죠? 아무래도 이대론 운전하기 곤란할 거 같은데.”

아무 말도 없는 그녀. 알아서 하라는 뜻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를 불러야겠네요.”

여전히 말이 없는 그녀를 데리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러면서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때였다. 꾹. 내 옷깃을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

돌아보니, 이하연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띵!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난 뒤, 내가 막 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읍!”

이하연이 안겨 왔다. 동시에 입술을 부딪쳐 왔고. 한데……. 뭐야? 왜 이렇게 세게? 게다가 처음인 건지 어쩐 건지 서툴기만 하다. 이건 뭐 거의 뽀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나도 능숙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충이나마 알고는 있는데……. 설마 이하연도 모쏠인 건 아니겠지? 아, 몰라 몰라.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난 그녀를 바짝 당겨 꽉 끌어안았다. 그러곤 본격적으로 키스를 하려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응? 아직 안 눌렀……. 아! 아래층에서 누군가 누른 모양이다. 황급히 그녀와 떨어졌다. 이하연 역시 내게서 벗어나긴 했지만, 영문을 모른 채 숨만 헐떡이고 있다. 그러다가 뒤늦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흠칫하더니 날 쳐다본다. 하지만 정작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꾹. 버튼을 누르는데……. 주차장이 있는 지하가 아니라 1층이다. 어? 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태, 택시 타고 갈게요.”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

“그……럴래요?”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도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다행이랄까. 중간에 멈추기라도 했으면, 다시 또 올라가야 했을 터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함께 탄 공간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띵. 다시 한번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가 멈춘 건 1층에 이르러서였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내렸다. 나 역시 이하연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고. 그렇게 우리 둘은 건물을 벗어나 도로변에 섰다. 택시를 잡는 건 내 몫이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앱으로 불렀을 텐데. 지금으로선 그냥 길가에서 직접 잡는 게 빠를 거란 판단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가 있어서 우리 앞에 와서 섰다. 뒷문을 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하연은 아무 말 없이 날 한번 보더니 천천히 택시에 올라탔다. 한데, 인사도 없이 그대로 떠나간다.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택시의 번호판을 외웠다. 그러곤 그녀에게 톡을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저만치서 택시가 멈춰선다.

“……?”

뭐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뜬 채 택시 쪽으로 뛰어갔다. 혹시 기사분이랑 다투기라도 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그 짧은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연히 초조해졌다. 그에 따라 달리는 속도는 높아져 갔고. 그렇게 차 앞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였다. 차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이하연이 날 째려보며 고함쳤다.

“앙! 왜 안 잡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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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늦어서야 잠이 들었는데도 새벽에 눈이 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겠지.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서 사위는 먹이라도 뿌려놓은 듯 어둡기만 하다. 그런데도 내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딸각.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스탠드를 켜자,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밝힌다. 그제야 이하연이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믿기지가 않는다. 이 여자가 내 여자라니. 그녀와 만나면서 어렴풋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하다. 연애라는 게 원래 이렇게 가슴이 벅찬 거였나? 흠, 그나저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하연이 화가 잔뜩 난…… 내가 보기엔 그저 투정으로 밖에는 안 보였지만, 아무튼 그 맹랑하면서도 귀여운 도발에 나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여자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배겨낼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옆에 이불을 덮고 있는 이하연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녀가 지금 알몸이란 걸 말해주려는 듯, 이불 위쪽으론 새하얀 나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위로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고, 내 쪽을 향한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감은 눈은 길게 뻗어 올라간 속눈썹이 도드라져 보이고, 그 아래로 귀여우면서도 오똑한 코가,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이 붉게 빛나고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상태로 이하연의 머리칼을 쓸어넘겼을 때였다.

“……우웅.”

그녀가 내 손길을 느꼈는지, 폭 안겨 온다. 따스하다. 몸으로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한두 시간 안에는 나가야겠지만, 이대로 조금만……. 그러다가 그 아늑함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눈을 번쩍 뜬 나는 깜짝 놀라 시간부터 확인했다.

“하!”

8시다. 젠장 늦어도 너무 늦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미쳤네. 다급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려는데……. 어? 팔 하나가 내 가슴 위에 올라와 있다. 눈부실 만큼 새하얀 피부. 가늘지만, 굴곡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누가 봐도 여자 팔이다. 누굴까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고, 곧이어 내가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랬지. 어쩔까?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어제는 피곤했던 걸까? 나나 그녀나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은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둘 다 8시면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 뭐, 나야 주방이 되겠지만, 그녀는 아마도 평소 이 시간쯤이면 회의를 주관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긴장이라곤 1도 없는 상태로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는 건……. 어제 그만큼 피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있는 게 편안하기 때문일까. 어찌 보면 쓸데없는, 그러나 내게는 꽤 중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깜짝이야!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녀도 눈을 뜨고 있다.

“……잘 잤어요?”

전화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물었다. 그녀는 반쯤 뜬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대답 대신 손을 뻗어온다. 스윽. 가볍게, 그러나 깨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게 내 볼을 만지는 그 손길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부르르르르. 그러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줄기차게 울리고 있었다.

“……안 받아요?”

“받아야죠.”

말만 그렇게 했지. 우린 둘 다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그녀와 난 거의 동시에 킥하고 웃고 말았다. 잠시 후, 핸드폰이 두 번째로 걸려왔을 때 상체만 일으켜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확인해보니 준석이 형이다. 하아, 한 소리 듣겠구나. ……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 야, 너 어디 아파? 혹시 막 열나고 그러는 거 아냐? 숙소냐? 내가 지금 갈까?

연이어 물어오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 가득이다. 이러면 정말 변명도 못 하는데. 미안해서.

“형. 죄송해요. 저 지금 밖이에요.”

잠시 침묵이 오가더니, 형이 띄엄띄엄 얘기한다.

- 어? 그, 그래? 집이야?

형도 내가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집이냐고 묻는 건 내가 아직도 오이도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건 아니고요. 그…… 어쩌죠? 지금 출발해도 9시나 돼야 들어갈 거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 하아, 뭘 어쩌겠냐? 맨날 그러는 놈도 아니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회장님댁 식구들이 대부분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인지 오늘 아침은 좀 널널한 편이다. 셰프껜 내가 잘 말씀 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 마라.

“고마워요.”

- 근데, 진영아.

“예?”

- ……여자랑 같이 있냐?

끙. 꼭 이런다. 준석이 형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 잘 나가다가도 막판에 꼭 한 번씩 초를 친달까. 가슴까지 치고 올라왔던 감동이 팍 식어버리는 느낌이다.

“뭐,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세요.”

- 아니, 그냥 난…….

“…….”

- 그 천사 같으신 분께 전해드려라.

“뭘요?”

- 고맙다고. 부족하고 모자란 놈을 만나줘서.

“아, 형!”

- 성질은……. 끊으마. 아, 그래도 너무 늦진 말고.

“……점심때까진 들어갈게요.”

- 오케이. 밤새 고생했다.

“아, 진짜! 형 왜 그래요? 나한테…….”

뚝 끊긴 전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실없이 웃고 말았다. 형은 형대로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일 테지.

“누군데 그래요?”

이하연이 상체를 일으킨 채 이불로 몸을 가리곤, 내 목에 팔을 감아 오며 묻고 있었다.

“준석이 형이라고, 친형 같은 형이에요. 저택에 들어간 것도 그 형 덕분이고요.”

“아, 그럼 형식이 오빠네 주방에 진영 씨 추천한 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내 쪽으로 바짝 붙어 앉는다.

“근데 뭐라고 그랬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혹시 늦었다고 혼났어요? 아니면, 내 얘기?”

끝에 가서 얼굴을 살짝 붉히는 그녀를 보자, 또다시 미소가 지어진다. 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움켜잡으며 속삭였다.

“고맙대요.”

“……예?”

“하연 씨가 나랑 만나줘서.”

날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가 그렇게나 귀여울 수가 없었다. *** 이왕 늦은 김에 밥을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더랬다.

“씻고 나가서 뭐 좀 먹을까요?”

“웅!”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나가기 싫어. 그냥 여기서 먹을래요.”

“그래요, 그럼.”

프런트로 연결되는 번호를 눌러 룸서비스로 간단한 모닝 메뉴를 시켰다. 잠시 후 이하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즈음 벨 소리가 울렸고, 문을 열어주니 호텔 직원이 카트를 밀고 들어온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을 때, 이하연이 직원에게 팁을 주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가식이라기보단 매너로 비치는 건, 아무래도 내 눈에 콩깍지가 쓰여서겠지. 그렇게 늦은 아침 식사까지 마친 후, 한참이나 뭉개다가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방을 빠져나왔다. 다행인 점은 어제 와인을 마셨던 주차장이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곤란한 점은……. 혹시라도 몰라서, 그러니까 문제가 생긴다면 분명 나보다는 그녀에게 피해가 갈 거란 생각에 따로따로 나가자고 얘기했지만, 이하연은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이지 당당하게 내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또 서슴없이 데스크로 가서 체크아웃까지 마쳤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주위를 둘러보거나 뭉그적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뭐라고 해야 할지. 이하연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연히 느껴진달까. 한편으로는 나 역시 그래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고. 그렇게 약간은 심란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왔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따라라라라, 라라…….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서진영은 각오하는 게 좋을 터다. 이하연이 일 때문에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어제처럼 말도 없이 외박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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