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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손맛 (1) (127/204)

#127. 손맛 (1)2021.07.23.

이하연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후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문이 열린다. 나참,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살짝 황당했지만, 문을 열리는 순간 왜 그런지 깨달았다.

“어서 와요.”

내 옆에 선 이하연을 보자마자 반갑게 얘기하고 계신 외숙모셨지만, 난 이미 알고 있다. 살짝 굳은 입매 하며, 희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보아 얼마나 긴장하고 계시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차분하신 모습을 보이시던 외숙모가 저 정도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초인종 소리를 듣고 인터폰을 켜고 말고 할 정신이나 있었겠냐고. 보고 있는 나까지 긴장되려 한다.

“우리 가족들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하연입니다.”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이하연을 가족들이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듯이 쳐다보고 있다. 뭐야, 그 눈빛들은? 설마 내가 여친 하나 사귀지 못할 정도로 모자란 놈인 줄 알았던 거야? 기가 막혀서 속으로 혀를 찰 때였다. 막 허리를 펴는 이하연의 손을 외숙모가 덥석 잡는다.

“우리 진영이 잘 부탁해요.”

느닷없는 행동에 이하연이 흠칫했다가, 이내 외숙모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곤 외려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보다 더 아끼는 사람인걸요.”

이하연의 대꾸에 외숙모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가족들도 감동한 표정들이다. 나참, 다들 뭐 하는 거람. 지금 헤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막 도착한 상황인데 집 안으로 들이지도 않고.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긴 했지만, 다 안다. 가족들의 마음이 어떤지. 저 모습이 그동안 내게 감춰왔던 본심이겠지.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속내를 내보이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동안, 저들은 저들대로 그런 나를 보며 내색하지 못한 채 안타까워했던 거겠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죠.”

“어머, 내 정신 좀. 미안해요. 우리 애가 여자친구라고 집에 데려온 게 처음이라서 그만.”

“괜찮아요.”

이하연의 입가에 스쳐 가는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자기가 처음이라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드나 보다. 하여간, 은근 욕심이 많다니까. 하긴 자기 입으로 집착의 여왕이라고 할 정도니 뭐. 그러고 보니 강형식이 그녀더러 레오파드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피식.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엉? 오빠, 왜 웃엉?”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바람에 뻘쭘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얼른 둘러댔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 모여있으니까,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싶어서.”

“아우, 저 조동아리. 하여간 말만 번지르르하고. 속지 마요, 하연 씨. 쟤 어릴 때부터 여자 후리는 거 하나는 타고난 애예요.”

“어머, 진짜요? 그렇게 안 보이던데…….”

“헤유. 벌써 넘어갔구나. 일루 와봐요. 내가 증거를 보여줄게요.”

뭐야? 왜 갑자기 폭로전으로 가는 건데?

“뭔 소리야? 나 모솔인 거 몰라서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누나를 막으려는 찰나였다. 이하연이 돌아본다. 웃는 얼굴로. 한데, 입술이 묘하게 비틀려 있다. 흠칫. 난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여기선 그냥 가만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란 생각이 들…….

“오빠, 근데 들고 있는 건 다 뭐야?”

“어? 이거?”

내가 들어 올린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있다.

“하연 씨가 가져온 선물.”

“어?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인 거양?”

“뭘 그런 걸 다 사 왔어요. 그냥 와도 맨발로 맞을 판인데.”

가족들이 한마디씩 하며 눈을 반짝인다. 아마도 이하연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 그러는 거겠지. 근데 알까 모르겠다. 세 개밖에 안 되는 쇼핑백은 어제 내가 들고 온 것과 비교해 단출할 정도였지만, 그 안에 든 것들의 가격은 내가 어제 사 들고 온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란 걸. 하지만 기특하게도 이하연은 그걸 조금도 티 내지 않는다.

“어머, 아니에요. 처음 오는 건데 어떻게 빈손으로 와요. 저도 오늘 오게 될 줄 몰라서 급히 준비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하는 말만 들어보면 꼭 집 앞 편의점에서 봉봉 한 박스 사 온 것 같은 말투다. 잠시 후, 거실 안은 가족들과 이하연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봐요, 여기 얘가 입학할 때부터 진영이 좋아하던 앤데 끝까지 친구로만 대했다니까요.”

“웅, 오빠……. 나쁜 남자였넹.”

“수아, 넌 저런 남자 만나면 안 돼. 아, 하연 씨.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줘요.”

“이것들 좀 먹어가며 봐요.”

“와앙! 사과당!”

“어머, 계곡인가 봐요?”

“호호호. 진영이 알몸 한번 보실래요?”

“어머!”

“이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방학 때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아유, 귀여워라.”

헐. 지금 상황, 뭐임? 네 명의 여자가 앨범을 펼쳐놓고, 한 손에는 사과를 하나씩 찍어 먹으며 오손도손 사진을 보는 모습이란……. 보기엔 좋다. 그 사진이 내 사진이라는 게 문제일 뿐. 난 이 집에서 날 빼고 유일한 남자인 외삼촌에게 도움의 손길을……. 하아! 이하연이 사 온 손목시계에 정신을 빼앗긴 외삼촌은 이미 글렀다. 그럼, 날 친자식보다 아껴주시는 외숙모께……. 후우, 사과 접시를 앞에 두고서 손 하나만 등 뒤로 슬쩍 뻗어 이하연이 선물한 핸드백을 살살 쓰다듬고 계시는 외숙모한테도 기대하긴 어렵겠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이하연에게 내 과거를 낱낱이 까발리고 있는 수연이 누나에게 뭔가를 기대하긴 어렵겠고.

“냐하하하하! 오빠, 고추! 쪼만해!”

헉, 수아 너마저.

“크크크큭.”

“움쿡.”

이하연이 그 특유의 웃음을 터졌다. 결국, 난 슬쩍 일어나 그녀의 코를 마시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탁.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 어떤 소리보다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서. 이러고 있으니, 요 며칠 가슴을 짓누르던 고민이 싹 가시며 무겁기만 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 저녁 식사는 꽤 즐거웠다. 식탁이 좁아서 거실에 펼친 상은 점차 늘어가는 음식들로 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칼질 잘하네요.”

“죄송해요. 집안일은 많이 안 해봐서…….”

“아녜요. 그 정도면 잘하는 거예요.”

“요즘 같은 세상에 여자가 살림만 해야 하나요?”

“그래도, 못하는 거랑 안 하는 건 다르잖아요.”

“이거 맛 좀 봐줄래요?”

“아! 맛있어요! 무슨 찌개예요?”

“우리 엄마표 고추장찌개가 맛있긴 하죠.”

“어머! 얘는. 손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

“아니에요. 진짜 맛있어요!”

주방 쪽에선 세 명의 여자들이 음식을 하며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있었고, 거실에선 외삼촌과 내가 살짝 긴장한 채 TV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는…….

“오빠, 나 어때?”

“예뻐.”

“아빠, 나 공주님 같아?”

“어허허. 우리 공주님이야, 뭘 입어도 예쁘지.”

“아앙, 그런 말 말구. 이 드레스 어떠냐고.”

이하연이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서 패션쇼를 하는 중이었다.

“식사들 하세요!”

외숙모가 찌개를 들고 오는 뒤로 이하연이 국그릇을 들고 따르고 있었고, 수연이 누나가 밥그릇들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외숙모가 급하게 하느라 차리는 게 없다고 한 말과는 달리 상 위의 풍경은 푸짐하기만 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와요.”

“예. 자주 올게요.”

“다음엔 우리 맛난 거 먹으러 가요.”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언니.”

“우웅.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또 올게. 아, 그럴 게 아니라 다음엔 언니랑 같이 놀이동산 갈까?”

“바쁜데, 뭘 그렇게까지 해요? 그리고 좀 있으면 쟤 디즈니 월드 가요.”

“어머, 진짜? 그럼, 그때 함께 가면 되겠다.”

“정말요?”

“그러엄. 자, 약속! 지장, 복사, 사인!”

“헤헤. 언니 너무 좋아요!”

돌아가며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난 후, 외숙모가 또 눈시울이 붉어져서 이하연의 손을 꼭 잡는다. 그런 채로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지만, 이미 눈빛으로 할 말을 다 하고 계셨다. 이하연 역시 마찬가지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더니……. 외숙모를 가볍게 안아주고 있었다. 음…….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이러면……. 진짜 놔주고 싶지 않아지는데……. 난 콧잔등을 긁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요.”

“서진영! 너 저번처럼 술 먹고 전화하면 죽는다!”

“오빠, 새해에도 올 거양?”

“글쎄. 그땐 좀 힘들 거 같은데. 대신 다음 날 올게.”

자꾸만 길어지는 인사 때문에 문 앞에서 해가 질 판이다.

“자고 갈 것이지.”

못내 아쉬운지, 외숙모께서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하시는 말씀을 듣곤 머뭇거리는데…….

“엄마도 참. 밤엔 두 사람이 같이 지내야지.”

“아 그런 건……. 죄송해요.”

“얼른 가. 차 막힌다.”

외삼촌이 벤탈리스타를 구경하고 있다가 말씀하신 후에야 가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차창 사이로 내가 손을 흔들곤 출발했다. 백미러로 보이는 가족들이 점점이 멀어져간다. 그런 가족들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다들 좋으신 분들인 거 같아요.”

“예.”

군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내 표정을 읽은 이하연의 얼굴에도 이미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에.

“아쉬워요?”

“왜 그렇게 물어요?”

날 가만히 보던 이하연이 눈을 반짝이며 얘기했다.

“그냥요. 진영 씨는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될 거 같아서요.”

어째, 물은 거랑 좀 엇나간 대답 같긴 한데.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근데, 내 차 타고 가도 돼요?”

그녀가 타고 온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놓고 온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죠. 시승식은 해야 하잖아요.”

“그거야 나중에라도…….”

“괜찮아요. 아침에 기사 아저씨 보내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돼요.”

아, 가끔 까먹는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게 누군지. 무려 대한민국 재벌가의 영예. 대현 그룹의 막내딸이라는 걸 말이다. 음, 부담되네. 괜히 차 얘기는 꺼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어제 줄 것을. 난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 떠올리며 살짝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 바로 저택으로 가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하연의 집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그 전에 잠시 들를 곳이 있었다.

“와! 여기 전망 진짜 좋네요!”

“괜찮아요?”

“예! 정말 예뻐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은 내가 보기에도 제법 운치가 있었다. 예전에 잠시 이 부근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아는 가게였다. 물론, 그땐 언감생심 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딱 봐도 비싸 보여서. 뭐, 지금도 그리 마음 편하게 올 만한 가격대의 음식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에는 이런 곳도 필요한 법이다. 그 때문에 며칠 전에 어렵게 예약을 해둔 상태였고.

“근데, 여기서 밥 먹을 건 아니죠? 저, 아직 배도 안 꺼졌는데…….”

“걱정 말아요. 와인 한 잔씩만 하고 갈 거니까.”

“앙? 와인이요?”

뭔가 기대가 되는 걸까? 이하연이 배시시 웃는다.

“예약하셨나요?”

“예. 서진영입니다.”

“아, 여기 있군요. 따라오시죠.”

직원을 따라가니, 창가 자리로 안내해준다. 얼마 후, 주문한 와인을 안주로 나온 치즈와 한 잔씩 마셨을 때 망설이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

뭐가? 하는 눈빛이었다.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얼굴에 나는 더욱더 미안해졌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아!”

뒤늦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그녀가 난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더 이상 뜸 들이다간 얼굴이 빨갛게 물들 거 같아서, 얼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놓았다. 그러곤 슬쩍 손으로 밀자, 이하연이 상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열어보더니 번쩍 고개를 쳐든다. 어떤 의미냐는 얼굴이었다. 머뭇거리다 손을 쳐들었다.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본 이하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커, 커플링……인데 좀 구식인……. 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그녀가 덤비듯 날 안고 있었다. 그 탓에 와인병이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아, 그 와중에도 반지는 무사한 거 같아서 다행이다만.

“사, 사람들이 봐요. 그러니까 이거 놓……!”

그녀가 끌어안는 바람에 꽉 졸린 목에서 흘러나오던 말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귓가로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 나만……하는지 알……흑……못 됐…… 진짜, 못됐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급히 달려온 직원에게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려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곤란한 표정을 해 보이는 직원과 달리,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은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게서 떨어진 이하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자, 환호성이 터졌다. 어딘가에선 박수 소리도 들려온다.

“진작 주려고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이하연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입이 귀까지 걸린 채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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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반지를 보는 그녀의 미소가 내 가슴에 와서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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