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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 (4) (126/204)

#126.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 (4)2021.07.21.

정말 어찌나 좋아하는지, 보는 내가 다 흐뭇할 지경이다. 저렇게나 좋을까. 수아는 티켓을 무슨 보물이라도 되듯 껴안고, 한 손에는 아까 그렇게 홀대했던 미키마우스를 꼭 쥔 채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난 외숙모가 내온 잡채를 거의 흡입하듯 먹으며 나머지 선물 보따리도 풀었다. 이참에 평소 꼭 있었으면 했던 것들까지 사 오느라 그렇게 무거웠던 거다. 공기 청정기라든가 가습기 같은 것들을 꺼내놓았고, 두 분 외삼촌 내외가 먹을 영양제와 수연이 누나와 외숙모가 쓸 팩 같은 걸 주욱 늘어놓았더랬다. 그리고 수아에겐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겨줬다. 다름 아닌 패드였다. 그동안 살림살이가 충분하지 않아서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물건이었다. 그깟 태블릿 얼마나 한다고……. 아까 어쩌나 보려고 놀리는 바람에 눈물을 매달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라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한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오빠가 돼서……. 난 말 없이 젓가락을 꽉 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인 채 잡채를 마시듯 빨아들였을 뿐이다. 그때였다. 외숙모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부끄럽다는 듯 포장된 상자를 내민다.

“……!”

조금 놀라서 쳐다보자, 옅게 미소짓는 외숙모. 난 혹여 무안해하실까 봐 살짝 오버하며 선물을 풀었다.

“와아! 제 것도 있어요?”

풀어보곤 몸이 굳고 말았다.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계. 국내 브랜드는 아니고, X 쇼크라는 회사에서 만든 거였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가지고 싶었던 거였다. 근데, 그 얘길 내가 가족들 앞에서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고…….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시계만 바라보고 있을 때, 누나가 다가와 또 하나의 상자를 건넨다.

“뭐야? 다, 다들 왜…… 이러는 건데?”

난 말문이 콱 막혀서 말을 더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칫해서 눈물이라도 보였다간 이 좋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테니까.

“별거 아냐. 지난번에 보니까, 넥타이가 너무 구식이더라.”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누나가 내 손에서 다시금 상자를 뺏어가더니 거침없이 풀어헤쳤다. 말한 대로 안에는 넥타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넥타이핀이랑 커프스까지 있었고.

“……내가 이런 거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억지로 쥐어짜듯 말했지만, 이미 눈가가 시큰해져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 방송국도 가고, 미팅도 자주 할 텐데. 그때 하면 되지.”

“잘…… 쓸게.”

“우리 동생, 진짜 성공했네.”

“…….”

“요즘 누나가 너 때문에 어깨에 힘주고 다니잖니.”

그렇게 말하곤 누나가 갑자기 팔을 벌렸다. 그러곤 천천히, 그러나 포근하게 날 안은 누나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순간 모든 게 정지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고. 동시에 눈앞이 뿌예지려 한다.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랬다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응. 으응……. 응.”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진영인 잘 해낼 거야.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더라도 지지 말고. 네 옆엔 언제나 가족이 있으니까. 알았지?”

고개를 더욱 숙여야 했다. 그런 채로 누나 품에 안겨서 어깨를 들썩거리고 말았다. 더는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가족들 간에 선물을 주고받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느라 잠자리에 들 생각을 하지 않았더랬다. 심지어 수아까지도 억지로 졸음을 참으며 버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나마도 녀석 때문에 아까 운 게 덜 민망하게 됐달까.

“항공권이랑 호텔 숙박권은 이 정도면 될 거에요.”

오만 권짜리 지폐들이 담긴 봉투를 내밀자, 외삼촌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하지만, 거절하진 않으신다. 그럴 수밖에. 수아가 저렇게 기대에 찬 눈으로 보고 있는데.

“얼마 안 넣었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요즘 저 많이 벌어요. 광고 찍었단 말씀드렸던가요?”

“어! 진짜?”

수연이 누나가 놀랍다는 듯 되묻자, 난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진짜 연기 잘하네. 이미 알고 있는데도 오늘 처음 듣는 척하는 거 봐. 그래도 이번만은 진짜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진짜지 그럼. 새해가 되면 바로 내보낸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또 뭐?”

둘러보니 가족들은 기대에 찬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계약한 건 아닌데, 광고 한 편 더 찍기로 했어. 원래는 찍을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회장님이 찍자고 하셔서.”

가족들 앞이라서 그런 걸까? 괜스레 허세를 부리게 된다. 그래, 뭐.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까짓 이 정도쯤은 해도 되겠지.

“싫다는 데도 차까지 주면서 광고 찍자고 하시잖아.”

“아! 그럼 그 차가?”

“차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외삼촌이 궁금한 듯 끼어드셨다.

“벤탈……벤탈…….”

“벤탈리스타 SL63.”

내가 추임새 넣듯 말해주자, 수연이 누나가 신나서 떠들어댄다.

“그래 그 벤탈리스타.”

“허!”

외삼촌도 남자라서 그런지, 벤탈리스타가 어떤 차인지는 아는 듯하다. 그에 비해 외숙모는 차에 대해선 전혀 모르셨기에 의아한 듯 물어오셨다.

“그 차가 뭔데, 그러니?”

“엄마. 그냥 차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벤탈리스타라고요, 벤탈리스타. 그 차 한 대 값이면 우리 집 한 채 정도는 가뿐하게 살걸?”

확 와닿는 비유였나 보다. 외숙모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눈을 해 보이셨다. 그러더니 날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이신다.

“……장하네, 우리 진영이.”

외숙모의 그 말 한마디에 난 괜히 우쭐해지고 말았다. *** 사람이란 게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게 백날 인정받아봐야 좋은 건 그때뿐이다. 반면 가족들이 알아주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가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법이지. 지금의 내가 그랬다. 방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쉴 새 없이 생각들이 떠올라서. 그중에는 잊고 지내던 기억들도 있었고, 또 얼마 전까지 비루하기 짝이 없던 시절에 겪은 경험들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상념들이 무수히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평소와 달리 조금 일찍 깬 6시. 네 시간밖에 안 잤지만, 워낙 습관이 들어서 그런가 졸리거나 하진 않는다. 슬슬 씻고 동네라도 한 바퀴 달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우라지에 다녀온 뒤부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더 자지 않고?”

“아녜요. 원래 이것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걸요.”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 준비 중이신 외숙모를 보며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그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내게 아침을 먹여서 보내려던 외숙모셨더랬다. 더구나 그때가 막 임신을 하셨던 때인지라 몸도 편치 않으셨을 텐데.

“외숙모.”

“응?”

“저…… 앞으로 더 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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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느닷없는 얘기였을까.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볼 뿐, 국자를 든 채로 굳어서 아무런 말도 못 하시는 외숙모를 뒤로하고 얼른 집을 빠져나왔다. 젠장. 되게 쑥스럽네. 하필 그때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말았지만…….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다시는 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 예전엔 진짜 궁핍했다. 가족들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잘 곳이 없어서 한데서 잔 적도 많았다. 이를테면 함바집 같은 곳에서. 그땐 그랬다. 조금이라도 덜 쓰고, 악착같이 모아야만 근근이 버텨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돈이라는 놈은 통장을 스쳐 지나갈 뿐, 좀처럼 쌓이질 않더라. 때문에 겨우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던 때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는 냉혹했다. 겨우 고교 졸업장 하나 달랑 따고 겁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나에게는. 더구나 돈을 버는 것보다 요리를 배워야 한다는 목적이 더 컸던 나로서는 정말이지 쉽지 않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에 비해 지금은……. 풍족하다? 아니 겨우 그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까. 당연하지만, 그게 온전히 내 실력 덕분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나레이션까지 있으니, 예전 같으면 죽을 똥을 싸도 안 되던 일이 너무나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역시 빚이겠지.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아버지께 배운 건 다름이 아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는 법이란 것. 그게 언제일는지 모른다며 차일피일 미뤄서도 안 된다. 가능한 한 빨리 갚아야 한다. 그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날인데도 불구하고 걸려온 전화를 웃으며 받은 것도.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하는 신현정 피디의 제안에 흔쾌히 수락한 것도.

- 괜찮겠어요? 지난번에 말했던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금 놀라긴 했는데,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 그래도…… 차라리 지금 하고 있는 방송, 계속하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뇨.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피디님이나 계시면 모를까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절 좀 끌어주세요. 그저 피디님만 믿을 뿐입니다.”

- 후우, 저야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죠.

방에서 전화를 받고 나서, 막 거실로 나오려던 참이었다. 이하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 도착했어요?”

- 지금 막 차 댔어요. 올라가면 돼요?

“주차하기 전에 전화 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려갔을 텐데.”

- 통화 중이던데요?

“아, 그건…… 신현정 피디랑 전화하고 있었어요.”

- 현정 언니요?

“예. 새로 시작할 프로그램 얘기. 아무튼 그 얘긴 나중에 하고, 바로 내려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하연이 그러겠다고 하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뒤,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디 가?”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던 수연이 누나가 물어온다. 뿐만 아니라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수아까지 다들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쳐나가는 폼이 수상쩍었던 모양이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얘기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보다는 미리 말해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손님이 와서.”

“손님?”

“응.”

수연이 누나가 눈을 가늘게 해 보이더니 불쑥 물어왔다.

“여자?”

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거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미, 미쳤나 봐!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청소기 어디다 뒀더라? 여보! 거기 걸레 좀 빨아와요.”

“엄마, 난 뭐해?”

“수아는 옷부터 갈아입어. 얼른!”

야단법석이다. 뭘 저렇게 하는 거람. 난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그런 내 귀에 수연이 누나가 빽! 하고 소리를 내지른다.

“야 이 미련한 놈아! 눈치가 없으면 상식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아, 뭘! 내가 어쨌다고 저러는 건지. 머리를 긁적이며 집을 나왔다. 그때, 누나의 고함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시, 십분! 아니 아니 십오 분만 있다가 들어와! 꼭이다, 꼭!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예, 예.”

현관문을 닫는데도 안에서 누나가 소리소리 지르는 게 들려왔다. ***

“안 들어가요?”

이하연의 물음에 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럴 땐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기보단 사실대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십오 분만 있다가 들어오라더라고요.”

“흠, 그래요?”

“이해가 안 가네요. 사람 한 명 온 거뿐인데,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는지.”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이하연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어온다.

“혹시요. 저 온다는 얘기, 안 하신 거예요?”

“했죠.”

한 템포 늦게 덧붙였다.

“방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하연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내 팔짱을 낀다. 응? 은근슬쩍 스킨십을.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있음에도 몸이 닿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래서 시선을 딴 곳으로 던지고 있는데…….

“진영 씨. 생각해보니까, 어젠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요.”

“예?”

“집집마다 사정이란 게 있고, 또 가풍이란 게 있는데. 갑자기 찾아간다고 한 거…… 확실히 제 실수예요. 진영 씨랑 정식으로 사귀게 돼서 들떠 있었던 거 같아요. 그치만 이젠 그러면 안 되겠죠. 저, 앞으로 잘할게요. 그러니까 진영 씨도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

“뭐를요?”

그녀가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웃어 보였다.

“내 남자의 가족들한테만은 잘 보이고 싶은데, 그거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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