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 (3)2021.07.18.
차를 몰고 오이도로 향하는 길. 여전히 멍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출발하기 전에 김진숙 회장과 직접 통화도 했다. 물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뭐, 처음엔 너무 비싼 거라 받을 수 없다고 한발 뒤로 빼보긴 했지만. 먹혀들 리가 없었다.
“선물이라는 얘기는 들었을 거고. 괜히 돌려보낸다 만다 해서 사람 부끄럽게 만들진 않겠죠? 원래는 서 셰프 나이를 생각해서 스포츠카를 뽑을까 생각했어요. 서 셰프가 그렇게 운전을 잘한다면서?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건 오히려 서 셰프에게 안 어울린다 싶더라고. 아직 젊지만, 서 셰프한테서는 뭔가 진중하면서도 묵직한 멋이 느껴지니까. 아참, KS에서 차를 준다는 걸 내 선에서 거절했으니, 혹시라도 나중에 듣고 놀라거나 하진 말고. 아무튼, 잘 타고 다녀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받을 수밖에. 이미 광고 계약을 비롯해 갖가지 일로 얽히고설킨 관계인데 이제 와서 빼본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출발하기 전 슬쩍 핸드폰으로 알아보니, 찻값만 무려 2억이 넘는다. 거기에 풀옵션이라고 했으니 실상은 3억짜리 차였다. 나참, 외삼촌 식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비싼 차라니. 그걸 타고 오이도로 가고 있는 난, 그럼 금의환향인 건가? 곧 있으면 방송도 하차할 예정인데? 하긴. 설사 앞으로 다시는 방송을 못 하게 된다고 한들, 성공한 건 성공한 거지. 솔직히 몇 달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천지개벽이나 다름없다. 그때, 노량진의 지하 셋방에서 퀴퀴한 곰팡내를 맡으면서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냐고.
“다들 놀라겠네.”
트렁크엔 선물이 한 보따리고, 그걸 싣고 가는 차는 무려 4억짜리 차. 그것도 외제차 중에서도 벤챠스의 윗급이라 할 수 있는 모델, 벤탈리스타였다. 승차감은 진짜 장난 아니네. 방지턱을 넘는데도 차의 흔들림이 미세하게 느껴질 정도. 이정도면 뒷좌석에서라면 거의 못 느낄 게 분명하다. 까놓고 얘기해서 내 나이에 탈 만한 차는 아니다. 돈이 한두 푼이라야 말이지. 누가 보면 운전사인 줄 알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 10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한밤의 도로는 조금도 막히지 않았다. 덕분에 강남이라곤 해도 서울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한 시간. 지하철을 탔으면 배는 더 걸릴 텐데. 차가 있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편하긴 하네.”
워낙 노후된 아파트인지라, 지하주차장이 없는 관계로 하는 수없이 지상에 차를 파킹했다. 그러곤 잠시 고민했다.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올라가지? 트렁크를 열어본 나는 흠칫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물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쇼핑백만 대체 몇 개야? 손이 한 세 개쯤 되면 가져갈 수 있을까? 이하연이 함께 왔다면 가뿐할……. 아니지, 그녀가 가져올 선물들도 만만한 양이 아니던데……. 아무튼, 그녀는 내일 오전에 오기로 하고 혼자 오는 참이었다. 오늘 따라나서겠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뺀 걸 생각하면 진짜…….
“생각이 없는 거 같지는 않은데, 가끔 충동적일 때가 있단 말이야.”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다만, 이하연이 마냥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만큼 나랑 같이 내려와서 자신이 내 공식 ‘여친’인 걸 밝히고 싶은 거겠지. 하여간 집착 집착하더니……. 귀엽다는 생각에 피식 웃고는 쇼핑백들을 꺼냈다. 좀 힘들긴 하겠지만, 이리저리 들고 쌓으면 어찌어찌 들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끙. 더럽게 많네.”
무겁진 않은데 쇼핑백 때문인지 부피가 커서 영 거시기하다. 그렇게 한창 선물 보따리와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응? 진영이 아니니?”
“어? 누나?”
선물들을 한 아름 든 채 고개만 간신히 돌려보곤 반갑게 외쳤다.
“너 거기서 뭐……. 헐. 그게 다 뭐야?”
“아, 몰라 몰라. 일단 좀 들어봐.”
“그, 그래.”
어딜 다녀오는지는 몰라도 수연이 누나가 얼른 다가와 내게서 짐을 나눠 들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엄살은.”
맞다. 엄살. 누나 앞이라 그런지 저절로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히죽 웃어 보이자, 수연이 누나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트렁크를 닫는 나를 보며 고개를 모로 꺾고 있다.
“이거 뭐니?”
“뭐가?”
“이 차 말이야.”
“뭐긴 차잖아.”
“참나. 이게 요즘 나 없다고 빠져가지고. 누나가 물으면 제대로 응? 성심성의껏 대답할 것이지. 누가 그렇게 느끼하게 웃으면서 대충 말하라고 했어!”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이 차 뭔데? 이거 되게 비싼 차 아냐? 설마 너 이거…….”
날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누나가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훔친 건 아니지?”
“헐. 장난해? 당연히 내 차지. 보여줘? 자동차 등록증에 내 이름이 떡하니…….”
말해 달래서 말해주는데, 이미 누나는 듣고 있질 않았다. 살짝 멍해진 눈빛으로 차를 보고 있을 뿐이다.
“……나 이 차 알아.”
“그래?”
“벤탈리스타. 되게 비싼 차잖아. 우리 학원에 다니는 선생님 한 분이 차 얘기만 나왔다 하면 자기 로망이 이거 모는 거라고 노래를 부르거든. 얼마라더라…….”
급기야 돈 얘기가 나올 판이라 난 얼른 누나를 끌어당겼다. 삑! 잽싸게 리모컨으로 차 문을 잠그곤 돌아서, 누나를 밀다시피 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왜 밀고 그래?”
“춥단 말이야.”
“그랬어? 그럼, 말을 하지? 그러게 넌 잠바도 안 입고, 웬 정장이니? 오늘처럼 추운 날엔 그저 두껍고 따스한 게 최고…….”
하, 진짜 말 많네. 모르긴 몰라도 우리 누나…….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잔소리 대마왕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외숙모 기다리시겠다. 얼른 올라가자.”
“……그래, 알았어. 버튼 눌러야 하니까, 그만 좀 밀어.”
그제야 누나의 등에서 손을 떼자, 누나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말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 현관문을 열자마자 수아가 쪼르르 달려와 내게 안겼다. 못 본 새 많이 컸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진짜 이맘때의 애들은 쑥쑥 자라는구나.
“오빠앙,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오빠 기다리느라 아직 초도 못 켰잖앙!”
“초?”
물으면서 바라보니, 거실 한가운데 케이크 상자가 놓여있다. 난 웃으면서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 빨리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좀 늦었네.”
아닌 게 아니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올 것을. 그동안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니, 크리스마스이브나 설날 같은 건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더랬다. 그러다 보니 케이크 같은 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다.
“오빠, 힘든데 그렇게 매달리면 어떡해?”
음식을 하던 중이셨는지, 외숙모께서 주방에서 나오며 수아를 혼내길래 거들었다.
“그러지 마세요. 제 잘못인데요, 뭐. 미안해. 수아야. 대신 오빠가 짜잔! 우리 수아 선물 사 왔지.”
“와앙! 오빠 최고!”
뭔지도 모르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수아와 그런 수아를 번쩍 안아 들곤 빙빙 돌고 있는 나를, 외숙모께서 웃으면서 보고 계셨다.
“뭔데 그렇게 많이 가져왔니?”
“크리스마스잖아요.”
“아직 이브지.”
씻고 나온 수연이 누나가 초를 팍팍 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촛불 켜요, 촛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직 크리스마스에 대한 로망이 있는 수아가 연신 촛불이란 말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외삼촌이 나오셨다. 응? 방금 누나가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았던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누나가 슬그머니 말해준다.
“요즘 변기가 자꾸 말썽이라서. 아빠가 고칠 수 있다곤 하는데…….”
믿음이 안 간다는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외삼촌은 날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왔어?”
“지금 막 도착했어요.”
“그럼 씻지 않……. 아, 케이크.”
급 시무룩해지는 수아를 본 건지, 외삼촌이 얼른 말을 바꾸셨다.
“근데 원래 이런 건 크리스마스 당일에 하는 거 아닌……. 윽.”
옆에서 외숙모가 살짝 꼬집었는지, 말끝을 흐리기도 하셨고.
“자, 그럼 누가 촛불 불래?”
“나! 나! 나!”
수아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깡충깡충 뛰는 게 귀여워서 다들 웃고 말았다. *** 수아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촛불도 켜고, 케이크를 잘라 각자 접시에 덜어 먹을 때였다.
“여태 일했으면 배고플 텐데 밥 먹지 않고. 금방 차려준다니까 그러네.”
외숙모도 참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조금 있으면 12시가 될 판이다. 그런데 무슨 밥. 이 늦은 시간에 들이닥쳐서 밥까지 차려달라고 할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다.
“저녁 먹고 왔다니까 그러네요.”
그렇게 말하는데, 옆에서 수연이 누나가 눈총을 준다.
‘왜?’
눈으로 묻자, 누나가 슬그머니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음, 대충 알 만하다. 내가 온다니까 또 음식을 잔뜩 하신 모양이다. 그걸 또 따뜻할 때 먹이고 싶으신 거겠지. 난 가슴이 잔잔하게 떨려 와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까지 하시는데, 염치 운운하다니. 이래서야 내 쪽에서 내외하는 거나 다름없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외숙모를 바라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자꾸 밥밥하니까,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도 같네요. 아니면 냄새 때문에 그런가?”
코를 킁킁대며 물었다.
“이거 잡채 냄새 아니에요?”
“아우, 말도 마라. 엄마가 너 잡채 귀신이라고 얼마나 많이 했는지……. 한 솥 가득이다. 거기다가 갈비찜은 또 어찌나 많이 한 건지. 그 많은 양을 씻어서 핏물을 빼고, 삶으면서 기름을 걷어내고……. 일 다녀와서부터 여태 부엌에 있었다니까.”
마치 일러바치듯 말하는 누나를 보며 웃다가 갑자기 울컥해졌다. 잡채와 갈비찜. 어머니 생전에 특별한 날만 되면 해주시던 음식이라 그런지,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잡채는 누나 말대로 귀신이라는 말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먹는 편이었다. 사발로 가득 먹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거기에 밥까지 한 고봉 가득 먹고 나면 배가 금세 남산만 해지곤 했다.
“꿀꺽. 잡채요? 안 되겠다. 수아 때문에 선물 보따리부터 풀려고 했는데, 일단 밥부터 먹어야…….”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잘 시간이 지나서 졸린대도 불구하고 선물상자들이 담긴 쇼핑백들을 보고 있던 수아가 일순 망연한 눈빛이 되는가 싶더니 수연이 누나를 째려본다. 크큭. 난 웃으면서 말했다. 일테면 중재안이었다.
“아니다. 밥 먹으면서 풀어보면 되지 뭐. 외숙모, 저 잡채 조금만 먹어도 될까요? 밤늦게 먹으면 살찔 거 같아서 안 먹으려고 했는데, 냄새 때문에 도저히 못 참겠네.”
“잠시만 기다리렴. 얼른 내올 테니.”
외숙모가 화색을 하곤 주방으로 간 사이,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쇼핑백을 들고 왔다.
“어디 보자, 이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그걸 들고 이리저리 흔들자 그에 따라 수아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게 여간 웃긴 게 아니다.
“아, 외삼촌 거였지.”
보란 듯이 외삼촌한테 드리자, 수아의 얼굴이 실망한 게 확연하다.
“이번엔…… 누나 거네.”
넓고 기다란 형태로 포장된 걸 건네자, 누나가 히죽 웃으며 받아든다. 이번 것은 크기도 제법 커서 수아가 한껏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자기 게 아니라고 하니 풀죽은 눈빛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외숙모!”
다음으로 외숙모에게 가서 선물상자를 안겨드렸다. 이제 수아는 울기 직전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남은 선물상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다 미안할 정도로 실망한 기색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납작한 형태에 겨우 손바닥보다 큰 정도. 굳이 비유하자면, 편지 봉투보다 조금 더 두껍다는 느낌? 그걸 흔들다가 말없이 수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녀석이 방긋 웃으며 선물을 받는다. 그러고는 얼른 풀어보는 수아. 데구르르르……. 툭. 상자를 열자마자 떨어진 것은 디즈니의 유명 캐릭터인 미키마우스였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수아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눈물을 글썽거린다. 실망했나 보다. 아무리 녀석이 좋아하는 캐릭터라곤 하지만, 기대에 한참 못 미친 모양인데……. 하긴, 어느새 다들 선물상자를 풀어보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좋아 보였을 테니까. 숙모님께 드린 건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였고, 외삼촌한테는 지갑을 선물해 드렸다. 그리고 누나한테는 외출용 원피스였고. 거기에 비해서 수아가 받은 건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피규어 하나뿐. 시무룩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녀석하곤. 좀 제대로 살펴볼 것이지. 난 속으로 웃으면서 수아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어? 이게 뭘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고개를 쳐드는 수아가 보란 듯이 봉투를 개봉하려는데…….
“내, 내 거야!”
확 달려들어 내 손에서 봉투를 뺏어가고 있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크큭. 웃으면서 다음으로 수아가 보일 모습을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인다. 그러다가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묻는다.
“언니, 언니. 이거 뭐야?”
“이거……. 어머! 티켓이네!”
“티켓? 그게 뭔데?”
수연이 누나가 날 보며 힐난하는 눈초리를 해 보였다.
“많이 비쌀 텐데…….”
“뭘, 나도 이젠 그 정도는 벌어.”
괜히 허세 한번 떨어주고 있을 때, 수아가 조르듯 묻고 있었다.
“무슨 티켓인데? 응? 뭐야, 뭐야.”
동생이 귀여웠던 걸까. 누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디즈니랜드 티켓.”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수아. 녀석이 갑자기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와아! 디즈니랜드! 디즈니 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