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 (2)2021.07.16.
“왜긴요. 그럼 빈손으로 가요?”
응? 가? 어딜? 눈을 감빡이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진동을 한다. 깜짝 놀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 하는데……. 젠장, 왼손으로 오른쪽 주머니를 뒤지려니 그게 맘처럼 잘 되질 않는다. 그런데도 이하연은 손을 놔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 장난치는 건 알겠는데……. 하아, 말을 말지. 매장 직원도 눈치를 채곤 시선을 돌린 채 웃고 있었다.
“참네. 누구야?”
살짝 민망해져서 괜스레 전화 건 사람을 탓하며 어렵사리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름을 확인하곤…….
“박 실장님?”
의아해져서 묻자, 박 실장이 웃으며 인사한다.
- 잘 지내셨죠?
나참. 며칠 전 통화한 건 기억에도 없는 건가? 그 난리를 쳤는데……. 아니면, 저쪽 입장에선 거론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문제였다 이건가? 조금 어이가 없어서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지내던 중이죠.”
- 아, 데이트라도 하시던 중인가 보네요.
“……그런 셈이죠.”
- 그럼 방해하지 않고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박 실장이 본론을 끄집어냈다. 한데, 그 본론이라는 게 황당하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 혹시 어디 계신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음, 왜 그러시죠?”
- 잠시 찾아뵙고 전달해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물건? 순간 떠올랐다. 얼마 전, 그러니까 명제준 시장 건으로 박 실장과 통화를 했을 때, 그가 선물 운운하던 게 기억난 것이다.
“그게 뭐죠?”
혹시나 싶어서 물었고,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별거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한 식구가 된 선물로 드리는 거라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식구라……. 그때 나눴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식구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마음만 받으면 안 될까요?”
- 예. 안 됩니다.
단칼에 자른다. 그래, 씨도 안 먹힐 줄 알았다.
“하아. 그래요. 그럼. 여기가 어디냐면…….”
내 얘기를 들은 박 실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 잘됐군요. 마침 그 근방인데. 곧 찾아뵙도록 하죠. 그래도 도로에 차가 워낙 많아서 30분은 걸릴 겁니다.
“그야 뭐……. 예. 알겠습니다.”
-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자, 이하연이 물어온다.
“누군데 그래요?”
여전히 손은 놓고 있지 않았다. 누가 보면 접착제라도 발라놓은지 알겠다.
“박 실장님이라고…… 김진숙 회장님 비서분 있어요.”
“어머. 박 실장님이라면. 그…… 스탠퍼드 대학 나오셨다는 그분 맞죠? 후발주자였던 C 마트가 업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데엔 그분 공이 크다고 들었어요. 근데, 지금 온대요? 왜요?”
“글쎄요. 선물을 보냈다고 하네요.”
“선물이요? 누가……. 아, 김진숙 회장님이요?”
눈을 반짝이는 이하연. 그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난 또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제길. 이래서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고,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라고 하는 건가. 뭐, 요즘 같은 세상엔 그런 남자조차 걷어내 버리고 여자가 직접 지배하는 경우도 허다하긴 하다만.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내게 선물을 보내주네 마네 하는 김진숙 회장만 하더라도 여자 몸으로 일가를 이룬 그룹 총수지 않은가.
“언제 온대요?”
“30분쯤 걸릴 거라고 하네요.”
“앙. 너무 촉박한데……. 하는 수 없죠. 여기선 이쯤 해두고. 잠시만요.”
그녀는 직원에게 자기가 고른 핸드백을 포장해달라고 하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다른 손으론 지갑을 꺼내는데……. 덕분에 내 손은 자유로워질 수 있어 한시름 놨다고나 할까. 대신 직원이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새카만 색의 카드 한 장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금박으로 된 H란 글자가 선명하다. 대체 저 카드가 뭐길래 저러나 싶지만, 당장에 직원의 표정이며 태도가 달라지는 걸 보니 대단한 건가 보다.
“삼, 삼천이백만 원입니다. 결제는 어떻게 할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이하연은 통화를 하는 와중에 그렇게 말하곤 계속해서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예, 예. 맞아요. 여성복이랑 남성복. 그리고 서른 정도 되는 여성. 초등학교…… 몇 학년이라고 했죠?”
“내년에 2학년 올라가요.”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통화한다.
“일학년이요.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난 뒤, 이하연은 매장 직원에게 미소와 함께 얘기했다.
“이따가 직원이 올 거예요.”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난 당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직원은 잘도 알아듣는다. 게다가 그동안 저쪽에 서서 우릴 본체만체하던 여자…… 매니저라고 뒤늦게 인사하고 있는 여자는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람? 뿐만 아니라 매장을 나올 때도 매니저 이하 직원들까지 떼거리로 몰려와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보였다. 난 의아해져서 이하연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들 저래요?”
그녀가 별거 아니란 듯 대답해준다.
“그야…….”
“…….”
“이 백화점이 우리 고모 거거든요.”
아! 그러니까……. 로열패밀리, 뭐 그런 건가? 쯧,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대현 백화점이었으니까. 납득했다는 표정을 해 보이며 걸음을 내딛는데, 어째 이하연의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그녀의 시선에 한곳에 머문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손. 내 손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집착은 여전하네. 돌아서 걸어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제야 이하연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놀랍기도 했고. 누군들 안 그럴까.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서민들로선 꿈에서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백화점의 최상층. 그중 한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마감재로 꾸며진 벽과 바닥 그리고 그에 걸맞은 가구들로 꾸며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서 우린 소파 자리로 안내된 후, 직원들이 내온 차와 간식을 먹으며 쇼핑을 했다. 이미 이하연의 취향을 잘들 알고 있는지, 아니면 전화로 설명한 걸 바탕으로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것들로만 가져온 건지는 몰라도, 직원들이 돌아가며 상품들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VIP들은 이렇게 쇼핑하는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얼마나 많이 남으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번에도 역시 돈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기우였을 뿐이다. 가져온 것들 중 일부는 비싼 것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내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조금 더 비쌌을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최종 결제한 금액은 이백만 원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아, 물론 내가 쓴 돈만 그렇다는 거였고. 이하연이 쓴 것까지 합치면…….
“이상하게 생각진 말아요. 저도 맨날 이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처음 인사 가는 건데, 아무거나 사가지고 가고 싶진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그 인사라는 건 누가 정한 거냐고. 더구나 그 아무거나 라는 건 기준이 대체 뭐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이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토해내진 못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나하는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라도 그녀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하지 싶다. 내가 그녀를 감당할 만큼 많이 벌든가. 그것도 아니면, 반대로 그녀가 내가 감당할 정도의 소비만 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수밖에. 어느 쪽이든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인데……. 뭐 어쩌겠냐고. 이게 현실인 것을. 그래도 받아들여야겠지. 속으로 한숨짓고 있을 때였다. 또각 또각 또각. 어디선가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한 뼘은 족히 될 만한 힐을 신은 중년 여자가 걸어왔다. 그녀를 본 이하연이 해사해진 얼굴로 외쳤다. 반가움이 그득한 음성이었다.
“고모!”
“넌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니? 내가 너, 유학 다녀오면 나한테 오라고 했어, 안 했어?”
“그러면, 여기서 일하라고 할 거잖아?”
“그게 뭐 어때서?”
“…….”
“얘! 나도 너 안 잡아! 그냥 경험 삼아 일해보란 거지, 누가 너더러 여기 눌러앉으랬니? 하여간 오빠는 애한테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길래……. 어머? 이분은……. 누구?”
“내 남친.”
“하? 나, 남친?”
두 사람이 일제히 날 바라보고 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영이라고 합니다.”
“음, 그래요. 하연이 고모예요. 저도 만나서 반갑……. 가만, 어디서 많이 본 듯……. 어머! 서 셰프? 아, 실물이 훨씬 낫네. 아차, 이런 실례를. 죄송해요. 제가 요즘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아무튼, 정말 반가워요.”
“……예.”
어째 이하연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혈육이라 그런지 얼굴도 닮았고 특히 분위기가 비슷하다. 게다가 말투도 그렇고. 저기서 중년 특유의 뻔뻔함과 능청맞음만 빼면 딱 이하연의 말투가 될 거 같달까.
“우리 자주 봐요.”
핸드백에서 꺼낸 명함을 건네길래 엉겁결에 받았다. H 백화점 대표이사 이주영. 아, 이분이 아까 이하연이 언급했던 고모, 그러니까 백화점 대표구나. 이미 들었던 말이 있어서 그런가, 충격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다만……. 유쾌한 건지, 활달한 건지. 좀 정신이 없는데? 어지간히도 에너지가 넘치는 분같이 느껴졌다.
“쇼핑 중이셨어요? 말씀을 하시지. 그럼 제가 다 알아서 준비해 뒀을 건데.”
“아뇨. 저도 갑자기 오게 된 거라서.”
“신경 쓰지 마. 이모. 내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네가 여기 오너니?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그리고 올 거면 연락이라도 주든가. 마침 이쪽 매장에 와있었길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또 몰래 다녀갈 생각 아니었니? 하여간, 넌 어째 갈수록 큰언니를 닮아가니? 소탈한 것도 좋지만, 가족들 간에 자꾸 그러면 나중엔 데면데면해지는 거야.”
나름 맺힌 게 많았는지 줄기차게 쏟아내는 이주영 대표와, 그에 맞서서 결코 물러나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이하연. 이들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린다. 다들 진동으로 해놨고, 따로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일제히 자신의 폰을 확인한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자기 것이 아니란 걸 알아채자, 곧바로 날 바라보았다. 그중 이하연이 아까 했던 통화를 기억해내고는 반짝이는 눈을 해 보였다.
“도착하셨어요?”
그녀의 짐작대로 박 실장이었다.
- 지금 지하주차장입니다.
“그래요? 그럼 1층으로 올라오시죠. 저도 내려가겠습니다.”
- 아뇨. 죄송한데, 서 셰프님께서 내려오셔야겠네요.
“예?”
- 드려야 할 게 좀 크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기서 받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묘한 어조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내려오라네요?”
“그럼, 얼른 가봐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하연도 이런 류의 이벤트는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요. 다음에 뵙죠.”
“고모, 그럼 가볼게. 아, 오늘 산 것들은 주차장에 있는 내 차로 가져달라고 전해줘.”
“이것이. 그게 헤어지면서 고모한테 할 소리니?”
“헤.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응?”
마지막으로 애교를 한번 부리니, 웃고 마는 이주영 대표였다. 그렇게 VIP실을 떠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해온다. 언제나처럼 정중한 박 실장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은 분인데, 늘 이런 식이니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몇 번 뵌 적 있지요? 김진숙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박준혁입니다.”
“이하연이에요.”
두 사람은 이미 구면인지라 딱히 소개라고 할 것도 없으련만, 그래도 정식으로 하는 통성명은 처음인지 서로 이름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박 실장이 주차장 한쪽으로 우릴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한곳에 이르러, 내게 뭔가를 건넸다. 작은 상자였는데 딱 손바닥 위에 올라오는 게 슬금슬금 불안해진다. 만나는 장소도 그렇고, 주는 물건도 그렇고. 이게 백화점 안으로 가지고 오지 못할 정도로 큰 건 아니잖아? 그럼 부속물이거나, 뭔가의 일부란 건데. 그 정도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나는 아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검은색 무광이 감도는 상자를 열었다. 역시나……. 안에는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다. 날개가 양쪽으로 뻗어있는 모양의 엠블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시동 한번 걸어보시죠.”
박 실장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거기엔 역시나 같은 엠블럼이 달려 있는 차가 한 대 서있다.
벤탈리스타였다. 한눈에도 중후한 느낌이 물씬한 대형세단.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쯤 타보길 꿈꾸는 그런 차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다소 당황스럽기만 하다. 저게 얼마짜린데……. 잘은 몰라도 몇억쯤 하는 거로 안다. 근데, 그걸 선물로 준다고?
“하아…….”
진짜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얼른 타봐요.”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마친 건지 이하연이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난 얼떨결에 리모컨을 눌렀다. 삐-익! 검은색 일색의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껌벅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