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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활로 (1) (120/204)

#120. 활로 (1)2021.07.07.

바둑에선 이런 말이 있다. 행마가 좋으면 활로가 풍부하고, 활로가 좁은 돌은 움직임이 어렵게 되며, 활로가 막힌 돌은 생명이 끝나는 거라고. 한마디로 반상 위에서 활로란 곧 생명줄이다. 당연하겠지만, 죽으면 사석이 되어 들어내진다. 그럼 활로란 뭔가? 돌이 뻗어 나갈 수 있는 바둑판 위의 교차점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뻗어 나갈 가능성이다. 몇 수도 보지 못하고 막히고 만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활로가 아닌 셈이다. 후우, 지금 내가 왜 활로의 의미 따윌 생각하고 있냐면…….

“아씨, 이게 말이 되냐고!”

나레이션이 끝났지만,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뭘 어쩌라고? 아니, 그전에 이게 왜 활로가 되는 건데? 의미는 알고서 그런 말을 쓴 건가? 나레이션의 의도가 살짝 의심스러워져서 눈살을 찌푸려본다. 하지만, 역시나 나레이션이 내게 손해될 일을 권하진 않았을 거다. 어찌 되었든 강형식에게 도움이 되려면, 내가 내 몫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야 할 테니. 그렇다곤 해도 역시 의심스럽다. 어떻게 생각하든 나레이션이 권한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흠, 그러고 보니……. 처음인 거 같은데? 나레이션이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시한 것은. 혹시 이게 지난번에 얘기한 그건가? 보상 어쩌고저쩌고했던…….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엄청 고민스럽다는 점. 나레이션의 얘기대로만 된다면 확실히 활로가 될 터다. 안 그래도 강윤식이 자꾸만 날 걸고넘어지려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입지를 키워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러지 않는다면, 막말로 강윤식이 마음먹고 덤벼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금의 나로서는. 물론 강형식도 있고, 김진숙 회장도 도와줄지 모르지만……. 언제까지 남들에게 기대기만 해선 맨날 제자리걸음일 테지. 그러다가 한 번만 제대로 걸려도 훅 가는 거고. 어쩐다. 난 고민하다가 결국 한 번만 더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아아,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뭔가를 바라며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건 아니었다. 지금의 내겐 물질적인 도움보단 제대로 내 얘기를 들어주고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었으니까. ***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난 뒤부터 난 김진호 셰프한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주방을 나서는 순간, 따라붙기 위해서였다.

“야, 어제 네 형수한테 말했더니 좋아하더라.”

“예.”

“그 있잖냐. 저번에 말한 아가씨.”

“예.”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예.”

대답과 동시에 딱밤이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나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내지르며 준석이 형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형이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요?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너 지금 내 말 듣고는 있었냐?”

“그야……. 당연히 듣고 있었죠.”

빤히 날 쳐다보던 준석이 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온다.

“그럼 말해봐. 내가 방금 뭐라고 했…….”

기억 안 난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 듣지도 못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난 형하고 한가로이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왜냐면, 김진호 셰프가 막 주방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 미안한데요.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요!”

형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얼른 앞치마를 벗고 주방을 뛰쳐나갔다. ***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다시 와본 김진호 셰프의 방은 사뭇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어째 살림살이가 늘어난 거 같은데?

“앉지 왜 그러고 섰나?”

“예? 아, 예…….”

“방이 좀 지저분하지?”

“아뇨. 깨끗한데요.”

“아직 정리가 안 돼서 그래.”

“아, 근데 여기선 잠시만 사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저번에 그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김진호 셰프는 커피 두 잔을 내려 가져오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럴 생각이었지. 한데 생각해보니 굳이 여길 나갈 이유가 없더군. 어차피 혼자 살 텐데, 여기나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어서.”

사모님이랑 애가 외국에 있다고 했지, 아마. 어디라고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머릿속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뜨겁지 않아서 바로 마셔도 될 거다.”

“아, 감사합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신 커피를 들어 입가로 가져갈 때, 김진호 셰프가 물어오셨다.

“그래서? 묻고 싶다는 게 뭐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얘기했다.

“실은 제가 이번에 방송에서 하차하게 될 거 같습니다.”

뜻밖이었는지, 김진호 셰프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날 바라보셨다.

“무슨 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안 좋은 모양이군.”

“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서요.”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강형식과 관련된 부분만 빼고 다 말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에 게스트로 명제준 세원시장이 출연했거든요.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윗선에서 압박이 있었는지 담당 피디님이 프로그램을 떠나시게 됐어요.”

김진호 셰프는 말없이 날 바라보고만 계셨다. 계속하란 뜻이겠지.

“그분에겐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자식 같은 거거든요.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서 전부 신현정 피디님의 손을 안 거친 게 없을 정도니까요. 아, 그렇다고 해서 그저 정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뭐랄까, 그분이 없는 방송은 상상이 안 간달까요. 예.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마 피디님이 빠지고 나면 방송이 제대로 굴러갈 거란 생각이 전혀 안 듭니다. 게다가…….”

“…….”

“피디님이 그만두시게 된 게 사실 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당연히 나올 만한 얘기였다. 한차례 입술을 잘근 씹고는 대답했다.

“누구라도 말씀드리긴 어려운데, 절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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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뒤 다 자른 얘기였지만, 김진호 셰프는 사정이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듯하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작게 고개를 내젓고 계셨다. 그러더니 날 보며 말씀하셨다.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예.”

“아무튼, 그거라면 떠날 이유가 되겠지.”

그렇게 얘기하신 김진호 셰프는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셨다. 천천히, 마치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서 시간을 벌려고 하시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물으셨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건 이후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을 때, 김진호 셰프가 잔을 내려놓으셨다. 그러곤 가만히 날 보고 계셨다

“현정 피디님이 JTL로 가실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이제껏 생각해둔…… 정확히는 나레이션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주고, 거기에 내가 살짝 살만 덧붙인 계획을 말씀드렸다. 한참을 듣고 계시던 김진호 셰프께선 다소 심각한 표정을 해 보이셨다.

“음……. 기획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문제는 해낼 수 있느냐인가? 고민하는 바가 뭔지는 대충 알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해낼 자신은…….”

“그럴 거면 애당초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지.”

“죄송합니다.”

“아니. 탓하자는 게 아니라, 말을 내뱉었으면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설사 들은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도 말이지.”

“……그런가요?”

“글쎄. 내가 보기엔…… 나한테서 ‘넌 잘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거 같다만. 아닌가?”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다. 아무래도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있었던 듯싶다. 요 며칠 하도 일이 많았던지라, 약해져 있었던 건가? 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되물었다. 아니 부탁드렸다.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당장 내치지 않으시는 것만 해도 어딘가. 사실, 화를 내시고 쫓아내도 할 말이 없는데 말이다. 뜬금없이 찾아와선 우는 소리로 내 개인적인 사정만 늘어놓곤 결국엔 도와달라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꼴이니까.

“쉽지 않을 거다.”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하고 하는 얘기다.”

그만큼 어렵다는 말을 에둘러 하시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나레이션을 들었을 때는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그 후로 찬찬히 생각해보니,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란 느낌이었으니까. 현재 날 중심으로, 아니 강형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볼 때, 이대로 방송계에서 밀려나게 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될 터다. 다른 건 둘째치고,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할 테고 강윤식이 조금만 독하게 나온다면 소문은 금방 추문으로 변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당장 광고부터 타격을 받는다. 그에 따른 손해배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곧 런칭하게 될 브랜드가 초장부터 암초에 부딪히는 꼴이다. 한마디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엉망이 되는 셈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상승세에 있던 회사의 주식이 하루아침에 급락. 파산에 이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몰락하는 건 나 하나로 끝나지도 않겠지. 어차피 한 배에 타고 있는 셈이니, 침몰한다면 같이 타고 있던 이들은 전부 물고기 밥이 되거나 설혹 어찌어찌 살아난다 해도 형편없는 꼴이 되고 말 거다. 어쩌면 강형식이 강윤식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할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젠장.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접싯물에 코를 박고 만다.

“죽을힘을 다해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쳐들고 외치듯 말했을 때, 김진호 셰프가 크지 않은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리셨다. 그 바람에 마저 말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야 했다.

“죽진 않을 거다.”

“아, 예…….”

“죽고 싶다는 마음은 들겠지만.”

흡! 정신이 번쩍 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진호 셰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그렇다. 순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가? 하고 살짝 후회가 들 정도다. 여기로 오기 전까진, 나름 고심 끝에 굳게 마음을 먹은 거라고 여겼었는데…….

“그,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그제야 김진호 셰프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더니 덧붙이셨다.

“도와는 주마. 단.”

“……?”

“내가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다.”

“아,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예?”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김진호 셰프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셨다.

“난 그저 입으로만 몇 마디 할 뿐이지만, 넌 온 힘을 다해 움직여야 할 거다.”

차분하게, 그러나 무겁게 들려오는 음성에 순간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다음 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만난 그녀가 날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신현정 피디의 안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워낙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니까. 어떻게 보면 그녀답다고나 할까.

“그래도 오랫동안 못 본 거 같네요. 그동안 일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신현정 피디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럴 테지. 나한테 일어난 일도. 그리고 어쩌면 그녀가 쫓겨나게 된 것도 나나 혹은 강형식 탓일 공산이 큰데. 뭐, 그 점에 대해선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하니까 함부로 떠들어댈 만한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안함이 쉬이 가시진 않았지만.

“식사는 하셨어요?”

내가 묻자, 신현정 피디가 그저 옅게 미소만 짓는다. 안 먹었단 얘기군. 이럴 땐 뭘 사 먹어야 하나.

“주방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기운을 북돋는 음식을 해줄 수도 있을 텐데. 아쉽네요.”

“…….”

“삼계탕 어때요?”

“……삼계탕이요?”

“왜요, 싫으세요?”

“그게 아니라…… 한겨울에 삼계탕을 먹는다고 하니까.”

확실히 계절적으론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긴 하다. 하지만 단백질 섭취에 있어서 닭고기만큼 빠르게 흡수되는 것도 드물다. 거기에 약재까지 넣어서 양기를 보충해주기도 하고. 오히려 한겨울의 여자 몸엔 이게 좋을 수 있을 터다.

“가죠. 일단 먹고 얘기하죠.”

그렇게 말하곤 걸음을 옮기는데, 신현정 피디가 픽하고 웃더니 따라나선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연이한테는 얘기했어요? 저 만난다고?”

“뭐하러요? 일 때문에 만나는 건데.”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

“……그래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근데, 하려는 얘기가 뭐예요?”

“이따 얘기하자니까, 성격 참 급하시네요.”

“궁금하잖아요.”

“흠, 것도 그러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곤 되물었다.

“피디님, 저랑 같이 방송 하나 안 할래요?”

흠칫 놀라는 그녀였다. 당연한 반응. 제안을 해도 피디인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 쪽에서 그걸 하고 있으니. 혹시 이거 역제안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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