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줄서기? (3)2021.07.04.
보고는 실시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퇴근하다 말고 도로 자리에 주저앉은 강윤식이었다.
“그래서? 막혔다는 얘깁니까?”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이는 다름 아닌 SBC 방송국 국장 최지철이었다.
- 예. 그렇게 됐습니다.
“헛참. 대체 그게 말이 됩니까? 서진영이 뭐라고 그걸 막아요?”
정말 어이가 없다. 명제준 시장 건을 C 마트 쪽에서 막았다? 근데 그게 알고 보니 서진영 때문인 거 같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확실합니까?”
- 그렇답니다. 김진숙 회장님이 서진영이랑 통화한 후에…….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방송국 국장쯤 되는 사람이 뜬소문만으로 추측해서 함부로 지껄일 리도 없고. 모르긴 몰라도 일이 틀어지고 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역추적하다가 C 마트까지 이르렀을 거다. 그러곤 비서실의 누군가를 용케 구워삶아서 전모를 파악한 듯하다.
- 어떡할까요? 대한당에 좀 더 푸시를 해볼까요? 아니면 SBC에서만이라도 단독으로 보도를 할 수 있게 조치할까요?
되지도 않는 소리를. 강윤식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국장님, 국장님 하니까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그래 봐야 월급쟁이 주제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이봐요. 최 국장님. 모르겠어요?”
- 예?
“이미 끝났어요.”
- ……그래도 들인 공이 있는데.
“답답한 소리 하시네. 김진숙 회장 성격 모릅니까? 오죽하면 재계에서 폭식 여우라고 하겠어요? 손을 안 댔다면 모를까, 이미 댔다면 끝난 겁니다. 이쪽에서 움직일 수 있는 패란 패는 다 박살 냈을 거란 얘깁니다. 알겠어요?”
- 아……!
“이 얘긴 됐고. 전 이제 모르는 일이니까, 최 국장 입조심하시고요. 아시겠죠?”
- 그, 그건…… 걱정 마십시오.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강윤식은 털썩하고 의자에 몸을 던지듯 묻었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그 새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뜬금포도 정도가 있는 거지. 그가 아는 한 서진영이 강형식을 만난 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다. 더욱이 그 전까진 김진숙 회장을 알지도 못했고. 하긴, 몇 달 안 되는 기간 동안 서진영이 걸어온 행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긴 하다. 고윤수, 그 늙은이는 말할 것도 없고 김진호 셰프의 총애까지 받는다 들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엔가부턴 TV에 출연하기 시작하고, 얼마 전엔 광고를 찍질 않나……. 강형식에게 레시피까지 주어 새로운 브랜드 런칭까지 하게 만든 게 그라고 했다. 원래부터 잘 알려진 유명인사였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여간 그 새끼가 문제라는 건 확실하네.”
서진영이 김진숙 회장이랑 물려있다면, 결국 그 끈은 강형식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 승계 싸움에 뛰어들 순 없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않는 거다. 처음부터 싸움 상대론 보지 않았던 놈이 꾸역꾸역 밀고 올라오는 꼬라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하니까.
‘확실히 밟아버리는 수밖에 없겠군.’
싹이 더 크기 전에. 그러려면 우선은…….
“서진영이부터 조져야 하는 건가?”
그게 안 되더라도 둘 사이를 갈라놓기라도 해야 할 터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강윤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새벽부터 일어나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길 세 시간. 아무것도 모르는 준석이 형이 멍해 있는 내게 자꾸만 눈짓으로 주의를 줬지만, 정말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얀마. 너 진짜 왜 그래?”
결국, 김진호 셰프의 눈을 피해 날 주방 밖으로 끌어낸 형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뭣 때문에 그러는데? 아까부터 넋을 잃고서……?”
“진짜예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게. 요즘 너 바쁘긴 했지. 그래도 인마. 몸은 챙겨 가면서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죄송해요.”
“에휴, 나도 모르겠다. 너 잘나가는 건 좋은데, 오늘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미안해지려고 한다. 괜히 잘하고 있는 애 데려와서는…….”
잘하긴 뭘……. 요리 좀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노량진 지하 셋방까지 밀려와서 거의 반백수처럼 지내던 차였는데. 그런 날 끌어내준 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를 입은 거지.
“무슨 말이에요. 형 아니었으면 저 지금쯤…….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땐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준석이 형의 연락을 받고, 이게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여기 들어왔던 거고.
“알면 좀 잘하든가.”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마! 그 말이 아니라……. 됐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아참, 너 사귀는 사람 없지?”
“예?”
“네 형수가 너 혼처 알아본다고 요즘…….”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미 늦었어요, 아저씨.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주 밤마다 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주는데……. 그동안 내가 너 바쁘다고 핑계 대긴 했는데, 엊그제 가져온 사진 보니까 괜찮더라.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나? 직업도 괜찮고, 얼굴도 예쁘다니까. 어때? 한번 만나볼래?”
후우, 안 그래도 심란한 상황에서 웬 선? 게다가 이하연이 알아봐라. 뭔 소리를 할지 안 봐도 훤하다.
“에이, 뭔 정색을 하고 그래? 실은 너도 좋으면서.”
앓느니 죽지. 속으로 혀를 차면서 겉으론 애써 웃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린다. 당연히 진동이다. 주방에서 벨 소리라도 들렸다간 경을 칠 테니.
“아, 형. 죄송해요. 전화 좀 받을게요.”
“오케이. 통화하고 들어와. 나 먼저 들어가 볼게.”
형이 주방으로 들어간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지간하면 안 받겠는데, 강형식의 전화였다.
“어, 그래.”
어젯밤 일이 있어서 그런지, 살짝 어색하다. 한데 강형식은 안 그런 모양이다. 아니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였다.
- 뭐야? 일하던 중 아니었어? 왜 이렇게 빨리 받아?
그럼 내 마음이야 편하지.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처럼 대꾸했다.
“뭐래. 잠깐 쉬러 나왔는데 네가 방해한 거 아냐?”
- 어, 그랬어? 그렇다면 미안…….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알아봤는데…….
“……?”
- 명제준 시장 건, 묻힌 거 같다.
“확실해?”
- 일단은.
“뭐야? 아직 안심하긴 이른 거 아냐?”
- 아니, 아니. 더 이상 그 일로 언론 쪽에서 파고들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고. 문제는…….
“문제는?”
- 강윤식 쪽에서 뭔가 또 다른 움직임을 보이려는 듯해서.
“또?”
젠장, 이러다가 노이로제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한숨을 푹 내쉬다가 얼른 도로 삼켰다. 하지만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 뭐야? 천하의 서진영이 왜 이래? 어젯밤 김진숙 회장에게 전화까지 하던 그 깡은 어디 간 거야?
진짜 뭐래니? 난 실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세히 좀 말해봐. 이번엔 뭔 흉계를 꾸미고 있대? 설마 강윤식이 널 찾아가기라도 한 거야?”
잠시 말이 없던 강형식이 픽하고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러더니 어이없는 말을 던진다.
- 나 말고 너.
“……누구?”
- 그러니까, 강윤식이 널 만날 생각인가 보더라.
“날? 왜?”
- 글쎄. 어젯밤 일로 뭔가 느낀 게 있나 보지. 아무튼 조심해라. 직원들 통해서 알아보니, 강윤식이 너에 대해서 뒷조사를 시작한 거 같아.
미친다, 진짜. 이젠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대체 내가 뭐라고, 그 자식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난 의아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쓴웃음만 짓고 있을 때였다.
- 걱정하지 마. 이제까지의 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하나만은…….
이 자식이 지금 뭔 소리를 하려고? 솔직히 어제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간신히 버텼구만. 상황이 그렇지만 않았어도 주먹부터 나갔을 거다.
“거기까지! 알았으니까, 더 말하지 마!”
- 흐흐흐.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능글맞게 웃고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물었다.
“괜찮은 거지?”
- 괜찮은 어쩔 건데?
“……그래, 다 털어버려라.”
- 그러려고. 대신…….
“…….”
- 다신 안 당해.
“그럼, 됐다.”
- 아, 가봐야겠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뚝 끊기는 전화. 자식, 쑥스러운가 보네 픽하고 웃으며 핸드폰에 떠오른 녀석의 이름 석 자를 응시했다. *** 다행히 명제준 시장 건은 박 실장이 장담했던 대로 마무리된 듯했다. 오후까지 기다려봤지만,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TV 뉴스로도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자문자답 끝에 고개를 끄덕인 뒤, 머리를 북북 긁었다.
“역시 해야겠지?”
끙끙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번을 터치한 끝에 연락처를 찾아낸 난,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다가 저편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린다. 김진숙 회장이었다.
- 어머, 설마 고맙다고 전화한 건 아니죠?
왜 아니겠습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건 인지상정. 뭐, 지금의 내 처지에 물질적인 보상 따윈 언감생심이지만, 전화 정도는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감사할 일이 있으면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 서 셰프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훌륭한 아버님이시네. 그래요. 감사라……. 근데, 그거 말만으로 끝내려는 거 아니겠죠?
이래서 내가 전화를 망설였던 거다. 어떻게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냐.
“후일 꼭 보답하겠습니다.”
- 호호호. 그것도 좋지. 그런데 말이에요.
“……?”
내가 좀 성격이 급한 편이거든.
“……그 말씀은?”
-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겁먹을 건 없고. 어떻게 생각해요? 이번에 우리 회사 광고 한 편 찍어야 하는데…….
젠장, 제대로 물렸군. 그러니까, 뭐야. 공짜로 광고를 찍어라? 쯧,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겠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하지요.”
- 음, 목소리가 왜 그럴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것처럼.
“오해십니다.”
담담한 척 말했더니, 김진숙 회장이 웃는다. 그러더니 툭툭 내뱉는다. 재밌다는 듯이.
- 걱정 말아요. 공짜로 일하라는 거 아니니까. 사실 더 주려고 했는데, 이번 일도 있고 하니 지난번하고 같은 조건으로 가고. 대신 선물 하나 해주는 거로 퉁치자고.
“선물이요?”
- 궁금하겠지만, 참아요. 선물이란 본시 모르고 받아야, 받을 때 기쁜 거 아니겠어요?
선물이라고 하는데, 어째 족쇄같이 느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공짜로 광고를 찍으란 것도 아니고,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선물까지 주겠다는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기대까진 하지 말고. 그래요.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그럼.
끊긴 핸드폰을 무겁게 들고 있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생사 다 그런 거지. 어젯밤 강형식에게 얘기했듯, 줄서기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게다가 꼭 한 사람에게만 줄을 서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강형식에게 줄을 선거나 다름없는 셈. 그렇게 따지면 난 문어발인가? 실소가 나온다. 그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요즘엔 아주 그냥 날마다 들려오는구나.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줄을 서려면 확실하게 서야 한다. 얼씨구? 이젠 카운슬링이라도 해주려는 건가? - 단순한 카운슬링 따위가 아니란 것을 서진영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요리 보조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로서는 꽤 큰 도움이 될 일이다. 흠, 그래. 좋다 이거야. 카운슬링이 아니라 치고. 내가 나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하자고. 그래서 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지? - 서진영은 지금 바로 신현정 피디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 적 없는데……. 아, 그러라는 얘긴가? - 그렇다. 그는 이제부터 신현정 피디를 만나서……. 이어지는 얘기를 듣다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게 지금 말이 돼? 날 더러 뭘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