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 줄서기? (2) (118/204)

#118. 줄서기? (2)2021.07.02.

전화를 받으며 그는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는 시간. 혹시 술이나 한잔하자고 전화를 한 건가? 자의는 아니었지만, 깨길 잘했군. ……하며 미소를 머금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최수길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어째 예상했던 톤이 아니다. 살짝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아니라 다를까. 내용이 심상치 않다. 박 의원, 내일 나가기로 한 거 말이오.

“예? 내일이라고 하시면…….”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머릿속에 장동일 상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작자가 진짜!’

인상을 잔뜩 구기며 그가 물었다.

“명제준이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알고 있구만. 혹시 자네에게도 전화가 갔었나?

“예……. 그렇긴 합니다만. 저, 대표님. 그 문제라면 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 아닙니까? 솔직히 소스도 그렇고, 정황 자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 굳이 이렇게…….”

한창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최수길 의원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눈치가 빠른 박주철 의원은 얼른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최수길 의원이 말했다. 다소 단호하게.

- 그 일……. 이쯤에서 접기로 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뭐긴 뭔가? 아무 일 없었던 거란 얘기지.

조금 전부터 조짐이 이상하더니만, 막상 들으니 기운에 쭉 빠진다. 동시에 최진철 국장과 최형수 부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젠장! 어쩐다?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상황이 거지같아진 거만은 확실했다. 자신이 돈까지 먹은 건 당 대표조차 모르는 일인데.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표정을 고치며 다시 말했다.

“대표님. 이미 신문사는 물론이고 인터넷 언론까지 싹 다 뿌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면, 자칫 역공이라도 당하…….”

- 청와대 지시네.

숨이 턱 막혔다. 더 무슨 말을 할까. 그는 한차례 마른 침을 삼키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었다. 그러길 한참.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예, 예. 그럼, 내일 당사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박주철 의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미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니 갑자기 청와대에서 왜? VIP랑 명제준 간에 거래라도 있었던 거야? 아니,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명문가 출신에 자기 자신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양반이 겨우 명제준 따위와 거래를 한다? 명제준 시장이 노동 운동가 출신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어떻게 생각해도 두 사람 간의 차이가 명확하다. 출신도, 성향도. 어떤 접점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리 없다. 이미 결정은 났고, 내일 신문…… 아니 어디에서도 스캔들은커녕 명제준 이름 석 자도 찾아볼 수 없을 테니까. 모든 걸 내려놓고,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안방 문이 열리며 마누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다가 옆이 허전해서 깬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방금 내지른 고함에 깬 건지도 모르고. 하긴, 깊이 잠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냐. 일은 무슨……. 목이 좀 말라서 나왔어.”

별일 아니라는 듯, 옅게 미소지으며 마누라를 이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그였다.

  *** 룸 안에는 둘뿐이었고, 아가씨들도 없었기에 불편한 건 없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부른다고 올 최수길 의원도 아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 하나에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니 꽁지에 불이 붙은 멧돼지처럼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됐나?”

최수길 의원의 물음에 박 실장은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대리석 테이블 위에 USB 하나를 올려두었다.

“설마 또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양아치 짓은 하지 않습니다.”

“……믿지.”

최수길 의원은 금방이라도 한숨을 내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박 실장은 안쓰러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건 그냥 거래일 뿐이다. 저쪽에서 정보로 장난을 친다면, 이쪽에서도 역시 정보로 받아치는 수밖엔 없는 거다. 섹스스캔들? 그건 같은 거로밖에는 못 막는다. 아니면 더 큰 거든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정보야 쌔고 쌨으니까. 국정원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룹의 정보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파고드는 분야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로써 확실하게 정리는 됐다. 하지만 이걸로 끝내서야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박 실장은 일어나기 전, 어디론가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차가운 인상을 지닌 사내가 흐트러짐이라곤 하나 보이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춥습니다.”

“…….”

“시동 좀 걸어놓겠습니다.”

박 실장의 얘기에 최수길 의원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제껏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은 의심이 짙어져 있다. 그걸 느꼈던 걸까? 박 실장이 양념을 살짝 쳤다.

“곧 선거철입니다. 약소하나마 거마비 정도는 될 겁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최수길 의원이 다시금 눈을 빛냈다. 원래는 비서관을 대동하고 왔어야 했지만, 워낙 급해서 혼자 운전해 달려온 길이었다. 때문에 오늘 일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할 터다. 그리고 C 마트 측에서 건네는 돈이라면…… 특히 오늘처럼 꽤 큰일을 무마하기 위해 건네는 돈이라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5천 이상. 어쩌면 억대로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면 박 실장의 말마따나 향후 행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다. 예전처럼 정치자금을 쉽게 조성할 수 없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계산을 마친 최수길 의원이 박 실장에게 키를 내밀었다. 그걸 받자마자, 사내에게 넘긴 뒤 박 실장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을 나가고 난 뒤였다.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회장님, 오늘 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여자들.

“처음 뵙습니다!”

일제히 외치는 그녀들을 보다 최수길 의원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봐라?”

그러더니 히죽 웃으며 내뱉었다.

“김 회장 밑에 똘똘한 놈이 하나 있다고 하더니만…….”

고개를 내저으며 손짓했다.

“거기 너. 너로 하자.”

“예! 회장님!”

쪼르르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여자를 보면서 최수길 의원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룸 안으로 들어온 장동일 상무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었기에 우린, 강형식과 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길 얼마간. 장동일 상무는 인상을 굳힌 채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는 말을 고르는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돌돌돌돌. 그는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다시 한잔 마시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조심스럽게 운을 뗀 장동일 상무의 얘기는 꽤 길게 이어졌다. 천천히, 그러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는 듯 얘기하는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밖에. 10분 정도 이어진 얘기는……. 요점만 추려보자면, 결국 신문에 보도되는 건 막지 못했다는 거였다. 내일 아침 신문에 명제준 시장의 스캔들이 대서특필될 거라고. 다만, 나에 대한 건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 거란 얘기였다. 어떻게든 정보의 출처를 캐내어 대한당 박주철 국회의원한테까지 전화를 건 것까진 좋았는데, 그쪽에서 완강히 부정해서 더 이상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 시간이 늦어서 직접 찾아가지 못한 게 패착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얘기하기도 했지만……. 글쎄다. 강윤식이 작심하고 함정을 판 거 같은데, 과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날 빼냈다는 얘기도 믿기 힘들다. 기자들 몇 명의 입만 막아서 될 일이 아니지 싶었던 것이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슬쩍 보니 강형식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술 탓만은 아닌 듯하다. 지금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인다. 씁쓸해져서 술잔을 막 들어 올렸을 때였다. 내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 보니,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내 머릿속에선 김진숙 회장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 서진영 셰프님.

누군지는 몰라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어디에서였더라……. 기억해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얘기했다.

- 며칠 전에 찾아뵌 적 있습니다만.

아! 기억났다. 지난번에 외삼촌 댁 앞에서 봤던……. 김진숙 회장의 비서.

“박 실장님?”

반갑다. 기대감이 들어서. 그리고 그런 내 기대감을 박 실장은 배반하지 않았다.

- 지금쯤 기다리고 계실 거 같아서 밤늦은 시간임에도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괜스레 말을 늘이고 싶지 않으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려하시던 일은 전부 해결되었으니, 모쪼록 편히 주무시면 될 겁니다.

“그, 그렇습니까?”

- 믿으셔도 됩니다. 그룹 차원에서 나선 일이니.

“……그룹 차원이요?”

- 예. 일이 간단치가 않아서 말입니다.

한숨이 나온다. 기쁘긴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나섰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감도 오질 않아서.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괜히 들었다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듯해서. 결국, 난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 뭘요. 맘고생은 서 셰프님께서 하셨죠. 아무튼, 모두 해결되었으니 편히 쉬십시오. 그럼 끊겠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끊는 박 실장. 그러면서도 말투는 무겁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다. 어떤 성격인지 대강 감이 온다.

“후우!”

전화를 끊고 나서 난 한숨부터 쉬었다. 뭔가 맥이 탁 풀린다. 말은 안 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지라.

“……김 회장 쪽이냐?”

물어온 것은 강형식이었다. 여전히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흐리지 않다.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는 거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해결됐대.”

“……다행이네.”

녀석이 등을 소파에 기대며 숨을 크게 들이 내쉬고 있었다. 나 역시 힘없이 뒤로 넘어가며 축 늘어져 버렸고. 그런 우리를 보던 장동일 상무가 눈빛으로 물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난 쓰게 웃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방금 한 통화 내용까지. 모든 얘기를 다 들은 장동일 상무는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그대로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때, 장동일 상무가 다시 들어왔다. 그러곤 선 채로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

확인한 모양이다. 그는 날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묻지 않으마.”

“…….”

“너도 곤란할 테니.”

“……예, 감사합니다.”

“이번엔 내가 신세 졌다.”

“아닙니다. 원인을 따지자면…….”

장동일 상무가 손을 쳐드는 바람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얘기했다.

“아니, 이런 일들은 원래 원인을 따지기 이전에 결과가 중요한 법이지. 아마 막지 못했다면, 너 하나만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거다.”

명제준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강형식도 무사하진 못했을 거란 얘기. 거의 틀림없을 터다. 강윤식이 겨우 나 하나 잡자고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됐다. 둘 다 가봐라. 난 한잔하고 가야겠다.”

축객령이었다. 난 강형식을 이끌고 방을 빠져나갔다. *** 서진영과 강형식이 방을 나가고 난 뒤, 장동일 상무는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묘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회장님을 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게 다 무색하구만.”

빈 잔에 술을 채우며 그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안심하긴 이르지만…… 제대로 된 조력자를 구한 셈인가?’

부모를 잃고 난 후 겉돌며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나 싶었는데……. 그는 얼음조각 하나 없는 술잔을 빙빙 돌리다가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누구 하나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투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이젠 나도 더는 미룰 순 없겠군.”

술을 단숨에 들이켜곤, 마저 말했다.

“윤식이가 선을 그은 이상, 나 역시 움직일 수밖에.”

뭐라 뭐라 해도 두 사람, 강윤식과 강형식은 강 회장의 핏줄. 그렇기에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간접적으로만 강형식을 도왔다. 그나마도 강형식의 아버지와 친분이 없었다면 그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거취를 확실히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른바 줄서기.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강윤식은 어떨지 몰라도, 그 녀석의 아버지인 강구철 사장이 강형식을 돕고 있는 자신을 곱게 보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 데다가 이번 일까지.

‘녀석도 이번 일로 결심이 선 거 같고…….’

무슨 일이든 득과 실이 있는 법. 명제준 시장 건은 어떻게 막았다손 쳐도, 강형식이 마음에 입었을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깨달았을 것이다. 녀석이 아무리 밖으로 나돈다 하더라도, 설사 삼한 그룹이라는 커다란 산에 주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결국 하나뿐임을. 하나의 산에 호랑이 둘이 있을 수 없듯, 결국 죽느냐 사느냐인 것이다.

16561225754367.jpg

  오늘처럼 무력하게 밀려나고 나면, 평생을 패배감과 함께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테니.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그러기 전에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지. 제대로 붙게 된다면 강형식 혼자서는 역부족일 테니까. 그러곤 승부를 보게 되겠지. 피를 부르는…… 승부를.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다시금 술을 들이켜던 장동일 상무의 눈동자에 더없이 차가운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