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줄서기? (1)2021.06.30.
최형우로서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가 비록 펜대 한번 쥐어본 적 없는, 무늬만 언론인인 신문사 부사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의 위상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한마디로 기초단체장인 세원시장쯤은 손짓 한 번으로 날아가 버릴 정도로 별거 아닌 이였다. 굳이 말하자면, 국회의원과 지자체 단체장은 같은 선출직이라고 해도 그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때에 따라선 국회의원조차 한 수 아래로 보는 게 거대 언론사의 기자들인데, 부사장인 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재벌 같은 경우야 광고주니까 서로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지만, 표심에 목을 걸어야 하는 경우엔 말 그대로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왜? 최형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권 회장이 인상을 확 구기며 버럭 소리쳤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
“예? 아, 예……. 송구스럽습니다.”
“흥!”
코웃음을 친 권 회장이 동선일보의 사장, 즉 최형우의 사촌 형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해봐.”
다짜고짜 말하라고 한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지만 국내 1, 2위를 다투는 신문사의 사장은 과연 달랐다. 그새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한 건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밝으면 곧바로 회장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었지만, 회장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만 봐도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제야 노기를 가라앉힌 권 회장이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며 최형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우야. 네 눈엔 우습더냐, 재벌이? 그래. 세상이 좀 바뀌긴 했지.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둬라. 예전에 대통령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 이제 대한민국의 권력은 경제로 넘어갔다고.”
“…….”
최형우 역시 들어본 바 있는 얘기였다. 그 또한 머리라는 게 달려 있었기에 이쯤 되니 사태가 대충이나마 파악되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권 회장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작년까지 증발해버린 나랏빚이 얼마인지는 아나? 700조야, 700조! 그 돈들이 다 어디로 갔을 거 같나? 그 돈의 백만분의 일만 풀어도 내일 넌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거다. 아니, 새해를 감옥에서 맞을 수도 있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예.”
“쯧, 낄 데 못 낄 데 가리지도 못하고……. 한심한 놈.”
“……책임지고 사태를 돌려놓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서진영이라고 하던가? 그 친구 마음부터 풀어줘야 할 거다. 요즘 부쩍 그 친구 이름이 들리더군. 김 회장님이 감싸고 돌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난번 전경련 땐 진 회장님이랑 강 회장님도 그 친구 이름을 언급하더군.”
절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최형우가 허리가 꺾일 듯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권 회장이 다시 한차례 혀를 차곤 그곳을 떠났다. 다행스러운 일은, 언제 사라졌는지 아까 권 회장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던 기자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전이란 것이다. 안 그랬으면, 정말이지 부사장 체면을 제대로 구기고 말았을 터였다.
“후우.”
사촌 형인 사장과 둘이만 남게 되자, 최형우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 곱지만은 않았다.
“우리 잘 좀 하자, 응?”
그렇게 폭풍 같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장동일 상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방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젠장. 강형식과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녀석이 저러는 건 처음 본다. 아주 죽상이다. 나라를 잃어도 저 정도까진 아닐 것 같다. 살짝 숙인 고개. 그 아래로 보일 듯 말 듯한 얼굴은 참담함이란 단어가 뭔지 보여주고 있달까. 그렇다고 날 원망하는 것 같진 않고, 오히려 녀석의 성격을 고려하면 자신을 탓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자기 때문에 내가 김진숙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한테 미안한 감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거기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상황에서 내가 강형식을 달래는 건 무리다. 솔직히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야 원래부터 밑바닥 인생이나 다름없었고, 그에 반해 녀석은 사실상 이 사회의 최상층에 군림하는 일가의 일원이다. 당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에게 얼마나 너그러워질 수 있느냐와도 직결된다. 물론 나라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굽힐 땐 굽힌다. 사실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일만 아니라면 언제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게 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언제부터 자존심 운운했다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소박하게 비칠, 작은 식당 하나 내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그 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하지만 그게 강형식을 만나고, 또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만큼 꿈이 커져 버린 것뿐. 예전의 내 꿈이 동네 먹자골목의 코딱지만 한 식당의 주인이었다면, 지금은 번화가의 번듯한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 겸 오너 정도랄까. 그러기 위해선 필요한 게 참 많다는 걸 요즘 들어 느끼던 중이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아는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굽힌 것뿐이다. 아니,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것뿐이었다. 하지만 강형식의 입장에선, 사실상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자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쯤 자기만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란 자책감에 녀석의 뇌가 절여져 있지 않을까 싶다. 하아, 진짜 미친다. 꼭 녀석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강형식은 온전히 자기 탓으로만 여기고 있으니……. 그런데도 자칫 말을 꺼냈다간 진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폭발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서 그저 지켜만 보는 중이다. 그러자니, 속은 썩다 못 해서 문드러질 판이고.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난 말 없이 녀석의 앞에 술잔을 놓았다. 돌돌돌돌돌.
양주병에서 흘러내린 갈색 액체가 잔을 채우면서 알싸한 주향이 코끝에 맴돈다. 내 잔에도 술을 채우곤 녀석의 눈앞에서 쳐들었다. 그러자, 강형식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날 바라본다. 잠시 그렇게 날 보던 그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챙! 맑은소리가 울리고, 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탁. 녀석이 내려놓은 잔이 대리석 테이블을 때렸다. 한데, 강형식은 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런 채로 힘을 주자, 팔뚝에 핏줄이 일어난다.
“내가 밉지 않냐?”
나직한 음성에는 힘이라곤 없다. 난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어넘기곤 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받아.”
“말해봐.”
“아, 뭐를?”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
이젠 고개를 바짝 쳐들고 날 보고 있는 강형식의 눈동자에 핏줄이 보인다. 그런 그와 시선을 교환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다. 솔직히 난 모르겠다. 넌 어쩐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세상은 말이야. 자기 능력보다 어디에 줄을 서는가가 더 중요하더라.”
“…….”
“물론 꼭 줄을 서야 하는 건 아니지. 뭐, 소신껏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갈 수도 있겠지. 근데, 대부분은 그게 안 되더라. 선택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더란 거야.”
“……그게 지금이라는 거냐?”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아무튼, 가만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내가 말을 마치자, 강형식은 급하게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그러곤 벌컥벌컥 들이켠다. 말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의 기세가 워낙 험해서. 대신 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식아.”
때마침 빈 술잔을 내려놓던 그가 날 또렷한 눈동자로 바라본다. 저 새끼, 저거 술 잘 못 마시는데……. 저러다가 또 훅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고 걱정하면서 계속해서 얘기했다.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래. 줄서기도 일종의 생존 방법이야. 그걸 알아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얘기를 하고 싶다. 음,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수직적인 관계에서도 기브 앤 테이크는 있거든. 그리고 그 관계라는 것도 늘 같은 위치만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혹은 어느 한쪽이 성장함에 따라서 입장이 뒤집히는 일도 다반사잖아? 물론 김진숙 회장이 내게 허리를 숙이는 일 따위가 벌어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또 모르지. 나만이 줄 수 있는 뭔가 있을지. 그럼 적어도 거지처럼 구걸 따윈 하지 않아도 되겠지.”
얘기하다 보니 말이 제법 길어졌다만, 그렇다고 억지로 지어내거나 변명한 건 아니다. 되도록 침착하게 내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했을 뿐.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빛이 때때로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뭔가 생각이 바뀐 것도 같긴 한데……. 그때였다. 강형식이 비어있던 내 술잔에 양주병을 들이붓는다. 너무 많이 마시면 곤란한데. 혹시라도 맨정신으로 뭔가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에잇, 이젠 나도 모르겠다. 장동일 상무도 발 벗고 뛰어다니는 중이고, 김진숙 회장도 다 잘 거니 안심하고 자라고 했잖아?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녀석이 따라준 술을 들이켰다. 녀석도 술을 입안에 쏟아부었고. 그러곤 거의 동시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우린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길 얼마간, 강형식이 말했다. 어느새 녀석의 음성에 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아니, 내가 약속할게.”
“……”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어찌나 단호한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을 때였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틈 사이로 장동일 상무가 들어서고 있었다. *** 이 밤, 멍해져 있는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다.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나참. 지금 뭐하자는 건지.”
한숨을 내쉬고 만 박주철 의원은 고소를 머금고선 주방 쪽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곤 병째로 물을 들이켜고 나니 잠이 좀 깨는 거 같다.
‘그러니까, 뭐야?’
장동일 상무라고 했던가. 강 회장 일가의 직계도 아니고, 딱히 스폰을 받는 관계가 아니라서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것도 기분 나빴고.
“어디다 대고 하라 마라야?”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는 박주철 의원의 입가엔 비웃음이 가득하다. 갑자기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이 상대방 입에서 명제준 시장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일은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한 건지. 물론 모른 척 잡아뗐다. 아직은 티를 내선 안 되는 일이기에. 사실 이번 일은 감히 뒤통수를 거하게 치고 야당에 빌붙은 명제준에 대해 보복 차원에서 행한 조치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를 품어 안은 사민당 흠집 내기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연히 혼자서 내린 결정도 아니었으며, 비공식적이긴 해도 당 대표의 지시에 따라 처리한 일이었다. 우연찮게 SBC 방송국 측에서 흘러들어온 정보가 사실이란 걸 확인하곤 옳다구나 하고 신문 쪽에 밀어넣은 게 다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물론 그 이면에는 SBC 최진철 국장과 동선일보 최형우 부사장이 술자리에서 은근슬쩍 넣어준 돈 봉투가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명분과 이익이 합치되는 몇 안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내일 아침이면 아마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터였다. 당연하다. 섹스스캔들이니까. 그렇기에 처음 통화를 시작할 땐 은근 쫄리긴 했다. 혹여라도 강 회장이 직접 관여한 건가 해서. 그렇다면 또 얘기가 다르니까. 곧 선거철이 돌아오고 있는데, 재계 1위라는 삼한 그룹을 등한시할 순 없으니 말이다. 한데, 들어보니 별거 아니었다. 강 회장은커녕 삼한 그룹하고도 상관없는 일인 듯 느껴졌다. 아니, 누군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에선 말을 아끼는 느낌이랄까. 혹, 승계 다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건가? 하고 의심을 해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는 게 나을 터. 아니, 아예 모르는 척하는 게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나중에 강 회장이 죽기라도 하면, 그땐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겠지만. 아무튼, 장동일 상무가 지금이라도 보자고 하는 걸 간신히 거절한 터다. 그러곤 내일 출근하는 대로 알아보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는데……. 물잔을 싱크대 안에 내려놓은 뒤, 다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울렸다.
“이 양반이 진짜!”
장동일 상무가 또다시 전화를 걸어온 건가 해서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하던 박주철 의원, 그의 눈빛이 의아해하게 바뀌었다.
“예, 대표님.”
당 대표인 최수길 의원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