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반격 (3)2021.06.27.
사실대로 말하자면……. 수화기 너머에서 김진숙 회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후회했다. 딱 이거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아마 여태껏 그녀와 나 사이에 간신히 맞춰지고 있던 균형이 한쪽으로 급격히 쏠릴 테지.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내 쪽이 아니라 김진숙 회장 쪽이 될 거다. 그 말은 곧, 위기를 넘기고 나면 내가 탈탈 털리게 될 거란 얘기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냐고. 강형식도 문제지만, 나 역시도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게 뻔한데. 그래서야 나레이션의 미션은커녕 내 인생조차 구제 못 하게 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질 공산이 크다. 뭐, 칼을 놓지 않은 한은 어딘가에서 요리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우선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될 거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믿어주는 사람은 없을 터. 때문에 방송에 나가지 못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다음은? 광고주인 KS 그룹에서 당장 계약서를 들이밀며 손해배상을 청구해오겠지. 그리고 강형식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장동일 상무는 저쪽과 협상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날 저택에서 내보내는 조건으로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 짓는 거로 쇼부를 칠 수도 있다는 거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헤나가 아직 어떠한 농간도 부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거고. 만일 뭔가를 했거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뭣 짓을 할 요량이면, 그조차도 통하지 않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명제준 세원시장의 부정이 드러나게 되면, 설사 그게 거짓이라도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어쩌면 폐지가 거론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찍어놓은 명제준 세원시장 편을 내보내지 못하는 이상, 대신 내보낼 촬영분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신현정 피디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 박수 칠 때 떠나는 모양새지만, 그때가 되면 폐지가 거론되는 방송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방송국을 나가게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엉망이 된다는 거다. 나 혼자 패가망신하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함께 동반자살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한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모든 걸 잃는 것보단 그편이 나으니까.
“조금……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많이 곤란해졌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숙일 땐 확실히 숙여라. 갑을관계가 확실할 때 어설픈 딜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저절로 몸에 익힌 처세다.
- 흠, 당황스럽네요. 서 셰프의 이런 모습…… 좀 낯서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럴까?
“……내일 아침자 신문에 제 이름이 오를 것 같습니다.”
- 하는 말로 봐선, 불미스러운 일이겠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사진도 게재되고요.”
잠시 말이 없던 김진숙 회장이 어딘지 모르게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어왔다. 아니, 확인하는 듯한 말투였다.
- 여자 문제?
“그건 아니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보일 겁니다.”
- 아무튼, 사람들은 지저분하게 보겠네. 하아, 그럼 안 되는데……. 값어치가 떨어지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게 난데. 어쩐다?
마치 제물을 앞에 두고 죽일까 살릴까를 고민하는 제사장 같은 태도였다. 변명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진다는 건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있다는 걸 고백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그냥 저쪽에 판단을 맡기는 게 낫다. 최소한의 정보만 주어도, 얼마든지 나머지 조각들을 맞춰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잠시 후에 다시 통화하죠.
끊긴 핸드폰을 들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젠장! 반격은 해본다만. 이게 과연 먹힐지 모르겠다. 이런 게 재벌의 힘인가? 강윤식. 정말 치졸하지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이런 자를…… 아니, 그만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이들을 상대로 싸워서 강형식을 회장 자리에 올리란 말인가? 나레이션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그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참 안 어울리는 때에 들려온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다고 내 마음까지 헤아려줄 나레이션은 아니다. - 서진영은 잘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가 해온 일 중에 가장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가 있는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헛웃음이 난다. 이걸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 이 마당에? 난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잘한 사람에겐 상을 주는 게 마땅하다. 그래서 주어지게 될 것이다. 부디 잘 사용하길 바란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이젠 황당하기까지 해서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미 BGM도 나레이션도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왔다. 확인해보니 김진숙 회장이다.
“서진영입니다.”
- 그래요. 서 셰프. 알아보니, 서 셰프 말처럼 난감한 상황이긴 하네.
“예. 죄송하게 됐습니다.”
- 죄송한 건 아나 보네?
“본의는 아니지만, 회장님께 피해가 가는 건 분명하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죄송합니다.”
- …….
수화기 너머에선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얕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김진숙 회장이 웃었다.
- 이제 알겠네.
“……?”
- 내가 왜 그렇게 서 셰프한테 목을 매나, 스스로도 참 이해가 안 갔거든. 근데 이제야 알겠어.
“그게 무슨…….”
- 혹시 기분 나쁘게 듣기는 마요. 칭찬이니까.
묘하게 운을 뗀 김진숙 회장은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 내가 키우는 개들은 너무 손을 많이 타서 사실 재미가 없거든. 그렇다고 마냥 예뻐해 주면 지가 사람인 줄 알고 이빨을 드러내니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나고. 근데, 서 셰프는 개가 아니란 거지. 일테면 늑대? 거 있잖아. 야생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때론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다가도, 먹잇감을 보면 죽어라 달려들어 어떻게든 배를 채우고 마는. 그렇다고 무조건 발톱부터 세우고 보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꼬리를 말 때는 확실히 마는 거야. 그게 누가 가르친다고 해서 될까? 본능이야, 본능. 그 본능이 자연스럽게 탑재된 사람이 서 셰프인 거지. 난 그 매력에 홀리는 거고. 호호호. 좋아. 한번 보자고. 이젠 나도 궁금해졌거든. 서 셰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대체 뭔 소린지 당최 모르겠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거슬릴 정도는 또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다. 기르는 개처럼 취급하진 않겠다는 것.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솔직히 말해서 김진숙 회장에게 전화를 했을 때, 사실 걱정하긴 했다. 혹여 이번 일로 목줄이라도 매이는 게 아닐까 해서.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던 걸까?
- 일단 궁금한 거부터 말해줄게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재벌들이 재벌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돈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알기 쉽게 말하자면, 대관업무. 즉 돈이란 무기를 가지고 관료체계를 흔들기 때문인 거지. 거기에 언론까지 더해지면 사회 전체를 흔드는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아, 예…….”
- 어려울 거 없어요. 잘 처리되었단 얘기니까. 아마 지금쯤 동선일보의 사주인 권 회장에게 전방위적으로 압박이 들어가고 있을 거예요. 아, 장동일 상무인가? 그 양반이 나선 모양인데, 그 정도론 이빨도 안 들어가지. 아마 사민당에서도 부담스러워할걸?
“그, 그렇습니까?”
- 왜? 내가 거짓말하는 거 같아? 그럼 한번 확인해보든가.
“아닙니다. 믿습니다.”
- 그래요. 앞으로 우리 서로 믿자고요. 그리고……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내게 전화해요. 서 셰프.
“예.”
- 세상에는 급이란 게 있어. 그건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회장이라고 다 같은 회장이 아니고, 상무가 움직일 수 있는 게 있고 회장이 움직일 수 있는 게 있다는 뜻이에요. 말했잖아? 재벌이 괜히 재벌이 아니라고. 알고는 있죠? 이번에 당신 나한테 빚 하나 진 거야.
“꼭 갚겠습니다.”
- 당연히 갚아야지. 그럼 갚을 능력이 될 때까진…….
“…….”
- 우린 동반자인 건가?
“……예. 회장님이 원하시는 게 그거라면요.”
- 오케이. 이걸로 협상 타결이네. 결과 따윈 궁금해하지 말고 푹 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잠이 안 오겠지? 그래요. 내일 아침에 결과 확인 후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전화해요. 안 그래도 의논할 일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 김진숙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한숨이 나온다. 내가 비참해서? 아니다. 그저 긴장이 풀려서다. 동시에 헷갈린다. 나 지금 목이 매인 건가? 아닌 건가? 말은 동반자라고 하지만, 일개 요리사가 거대 그룹 회장님하고 진짜로 동반자일 리는 없다. 내가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다. 아, 모르겠고. 일단 위기는 어찌어찌 넘긴 거 같다. 그것도 장동일 상무가 와봐야 알겠지만…….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고 돌아섰……. 아씨! 깜짝이야!
“뭐, 뭐야?”
바로 뒤에 녀석이 서 있었다. 한데, 눈초리가 이상하다. 뭔가 화가 잔뜩 난 듯 보인달까. 눈동자도 살짝 충혈된 거 같고.
“왜, 왜……. 거기 서 있어? 추운데, 안에 있지 않……. 큭!”
와락 하고 달려든 강형식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얀마! 쿨럭……이거, 이거……쿡! 놓고 좀 얘기해!”
제기랄! 눈이 돌아간 건지, 말귀가 통하질 않는다. 그렇게 내 멱살을 움켜잡고 있던 강형식이 이를 꽉 문 채 날 노려보다가 힘없이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근처 화단에 털썩 주저앉는다. 한참 콜록거리던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곤 괜찮다 싶어 녀석의 옆에 가서 섰다. 그리고 물었다.
“언제부터 들었냐?”
*** 누군가에겐 암담하기만 한 밤이었다면, 또 누군가에겐 폭풍 같은 밤이기도 했다. 적어도 동선일보의 부사장인 최형우에겐 그랬다. 처음 시작은 삼한 그룹의 대관업무를 전담하는 한 과장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당연히 무시했다. 과장 따위가 어딜. 우습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 일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강윤식이 삼한 그룹의 적장자임은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니 삼한 그룹에서 온 전화가 두려울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으로 걸려온 사민당 행정안전부 상임위원장의 전화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명제준 세원시장의 비리에 대해 캐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거로 통화를 끝냈다는 거였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회, 회장님!”
갑작스레 걸려온 사주의 전화. 화들짝 놀란 최형우가 자기 집이라는 것도 잊고서 벌떡 일어선 건 어찌 보면 조건반사와도 같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그는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너 이 새끼! 당장 뛰어와! 아니, 네 사촌 형이랑 같이 본사로 가있어!
“아, 알겠습니다!”
정말 부리나케 뛰어갔다. 수행비서를 부를 시간도 없어서 손수 운전대를 잡고 자신이 밟을 수 있는 한계까지 엑셀을 밟았더랬다. 그렇게 30분도 채 안 되어 본사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의 사촌 형이자, 현 동선일보 사장직을 맡고 있는 사촌 형이었다.
“최형우!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역정부터 내는 사촌 형에게, 아니 사장님께 그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답답한 놈! 네가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나 알고 있는 거냐?”
도무지 모를 일이다. 자신이 요 근래 한 일이라곤 명제준 세원시장을 조진 거밖에 없다. 아니, 아직 조졌다고 할 수도 없다. 내일 조간신문에 실릴 예정이었으니까.
‘설마?’
명제준 세원시장이 압력을? 아니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그의 힘이 미력하다. 그럼 누구? 사민당 대표? 잠시 의심해봤지만 그것도 아닌 듯하다. 그렇게까지 하기엔, 사민당이 명제준 세원시장을 구제해 얻는 이익이 너무 적다. 오히려 자칫하면 오물을 뒤집어쓸 가능성도 있었다.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글렀다 싶으면 단호히 끊어내는 게 정치의 세계인데, 하물며 지자체 단체장 정도야.
“혀, 형님……. 아니, 사장님. 진짜 모르겠습니다. 뭐가 어떻게…….”
“하아. 일단 들어가자.”
본사로 들어가자, 사주가 보인다. 언제 왔는지, 기자 한 명을 동원해 내일 아침자 신문을 확인하고 있던 권 회장이 두 사람을 보곤 인상을 구긴다. 그러더니 사진 한 장을 북 찢어 눈앞에서 날렸다. 그러곤 고함쳤다.
“당장 기사부터 내려!”
발밑에서 흩어진 사진. 아니 사진 조각들 사이로 두 명의 얼굴이 보였다. 한 명은 명제준 세원시장이었고, 또 한 명은……. 서진영이라고 했던가? 변변치 못한 놈이라고 무시하던 요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