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반격 (1)2021.06.23.
“뭐 하나 좀 물어볼게요.”
신현정 피디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본다. 낌새라도 챈 건가? 뭐, 그럼 또 어때서. 뭘 하든 내 마음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물었다.
“계약 사항이 어떻게 되죠?”
“그게 무슨…….”
“저 말입니다. 방송국하고 계약한 거 솔직히 제대로 기억이 안 나서요. 대충 편당 계약으로 했던 거 같은데.”
“그렇긴 하죠. 계약 당시엔 출연료가 너무 적게 책정돼서, 본부장님께 말씀드려 편당 계약으로 했죠. 나중에 출연료 올려드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이제 와 말씀드리는 거지만,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진영 씨한테 의존하는 바가 컸는데 겨우 그것밖에 못 드린다는 게 미안했거든요.”
“아, 그랬더군요. 그래도 그런 계약을 용케 허용했네요, 방송국에서.”
“그야, 방송국 입장에선 진영 씨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일 뿐이니까요.”
아하, 한마디로 써보고 안 되면 언제든 잘라내 버리겠다는 심보였다는 거군. 거참, 기분 더럽네. 그렇긴 해도, 지금으로선 잘됐다 싶었다.
“좋네요.”
“예?”
씨익 웃어 보였다.
“저도 이참에 그만두려고요.”
“……!”
입을 벌린 채 날 바라보는 신현정에게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
“피디님이 절 책임져 주셔야겠습니다.”
잔뜩 흔들리는 눈빛을 보면서, 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그리고 움쩍달싹하지도 않는 그녀. 그녀의 손을 잡아채든 거머쥐었다. 그러곤 정중히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거지 같은 것들!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내가 무슨 수수깡인 줄 아나? 애당초 계약 자체도 그렇다. 한마디로 단물만 쪽 빨아 먹고 버리겠다는 심보 아니냐고. 그러니, 신규 프로를 이만큼이나 끌어 올린 신현정 피디를 저리 내친 거겠지만. 그것도 예능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노경환 피디를 상대로 거의 압승을 거둔 피디를 말이다. 미친 거 아니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지. 아니다.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그러겠냐고. 신현정 피디가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로선 정말이지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그러니 그만두는 게 당연한 일.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방송이야 알바라고 할 수 있고, 본업은 누가 뭐래도 요리사니까. 뭐, 아직은 제대로 된 요리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이제 겨우 칼질이나 좀 하게 된 터에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난 그렇게 배웠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세상엔 중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으뜸은 사람이라고. 결국, 사람이 없으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 선택에 후회 따윈 없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다? 벙쪄하는 신현정 피디를 달래고 얼러서 보낸 뒤,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우선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과연 이번 일이 강윤식의 음모로 비롯된 일일까?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다. 나레이션이 확실하게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그만큼 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얘긴 곧, 내가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을 거란 얘기기도 하고. 다시 말해 신현정 피디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울 수 없었을 거란 얘기다. 하기야, 방송국 사주가 직접 나섰다는데 무슨 수로 막을 거냐고. 좋아.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어차피 일어난 일. 돌이킬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게 끝일까? 그럴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역시, 강형식하고 얘기해봐야겠지. 난 결심을 굳히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다. 어디냐?”
- 어디긴, 집으로 가는 길이지. 오늘 보자며?
“바쁜 일은 다 끝났고?”
- 그런 게 어딨어? 런칭 때까지 정신 하나도 없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보자고 하는 게 아니면, 오늘도 밤샐 예정이었다. 아, 어제도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여력이 안 되더라. 그건 미안하다.
“됐어. 지금이라도 보면 되지.”
아깐, 좀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니 어제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기에, 설사 녀석과 얘기를 나눴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괜스레 불안감만 증폭됐겠지. 그러고 보면 차라리 잘됐다 싶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법이지, 다 알거나 짐작할 수 있는 것에는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받아칠 건 받아치면 그뿐이니까. 그리고 내 생각으론, 틀림없이……. 다음 타겟은 명제준 시장일 게 뻔하다. 거기에 나나 강형식을 엮겠지. 그렇게 조금씩 옥죄어오다가 한꺼번에 쓸어버릴 생각이겠지. 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차 돌려라.”
- ……?
“아무래도 집은 불안해서 그래”
- 뭔 얘기를 하려고……. 알았다. 그럼 거기서 보자.
“오케이. 난 여기서 이십 분 정도면 갈 거 같으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 알았다.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달라고 하든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 오기나 해.”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택시를 잡아탔다. *** 바인지 룸살롱인지, 정체가 모호한 가게는 여전했다. 손님이 이렇게 없는데, 유지가 되는 게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보기엔 수익 따윈 전혀 고려치 않고 그저 강형식의 아지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오셨어요?”
매번 볼 때마다 단아하다는 느껴지는 여자가 날 맞이한다. 마담이라고 불러야 하나? 망설이다가 물었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키는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런가요?”
“식사 안 하셨으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이상하게 배는 고프지 않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언제나처럼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렸을 때, 문이 열리며 강형식이 들어왔다.
“늦었지?”
“차 많이 막히나 보네.”
“말도 마라. 오늘 유난히 추워서 그런가, 서울시민들이 죄다 차 끌고 나왔나 봐.”
“한잔 마시고, 몸 좀 녹여.”
“그거 좋지.”
내가 내민 잔을 받고 있는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후! 좀 살 것 같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날 겁주는 거야?”
급하기도 하지. 뭐,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난 그에게 차근차근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신음과 탄식을 반복하며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강형식은, 신현정 피디가 팽을 당했다는 부분에 이르러 폭발했다.
“뭐! 이런 씨……!”
“흥분하지 마.”
“지금 이게 흥분하지 않고…….”
“그거 아까 내가 다했어. 네 몫까지 죄다. 그러니까, 너라도 이성 챙겨. 적어도 한 놈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
“후우……!”
호흡을 고르는 녀석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 거 같냐?”
“뭐가? 강윤식이 배후라는 거?”
이젠 형으로 생각도 안 하는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그럴 거 같다. 막말로 칼만 안 들었지만, 언제든 목을 쳐낼 기세인데 형은 무슨.
“내 생각도 너랑 같아.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기 어려울 테니.”
“그럼, 명제준 시장도?”
“내가 아는 강윤식이라면, 이 정도에서 절대 안 멈춰.”
“그 얘긴?”
“나 아니면 너. 둘 중 하나를 낚는 데 쓰겠지. 그만한 미끼도 드무니까.”
“허! 살벌하네.”
강형식이라면 모를까. 나 하나 잡는데, 무려 세원시장을 미끼로 쓴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내가 미운 건가? 아니면 저쪽 입장에선 내가 그런 가치가 있는 거로 보였다는 건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다시금 들려오는 BGM. 난 막 날 향해 뭔가를 말하려는 강형식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녀석이 딱 입을 닫고 날 바라본다. 그런 그에게 눈짓으로 ‘잠깐만’이라고 말하곤, 생각하는 척하면서 나레이션을 들었다. - 시간은 두 사람의 편이 아니다. 내일 오전을 기해 동선일보에서 폭로성 기사가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멍해진다. 예상대로 다음 차례는 명제준 세원시장이었다. 한데, 문제는……. 저걸 어떻게 막아? 이미 자료도 다 넘어간 거 같고. 손쓸 방도가 없어 보였다. 미친다, 진짜. 그걸 찍었단 말이야? 이미 사라진 나레이션. 하지만, 머릿속에선 나레이션이 남겨놓은 말들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한밤의 밀회? 그 주인공은 명제준 세원시장과……. 나. 한마디로 요즘 핫한 두 사람이 만나서 새파랗게 어린 여자들을 옆에 끼고 흥청망청 술판을 벌였다는 기사다. 아니, 그렇게 보도될 예정이다. 내용도 기가 막히지만, 사진까지 첨부된다고 한다. 명제준 세원시장이 술이 떡이 돼서 여자랑 얼싸안고 있는 사진과 함께, 내가 세원시장을 껴안듯 부축하고 차 쪽으로 걸어가는 사진. 이거 나가면 빼박이다. 누가 봐도 내가 명제준 세원시장에게 접대한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겠지. 그 이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하아, 이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거기에 더해, 명석호 문제까지 터뜨릴 모양이다. 대충 타이틀은 이런 식이겠지. 아들의 병역 비리를 감추려는 명제준 세원시장. 명석호 입장에서 들었을 때는 이상하긴커녕 오히려 기특한 면도 없잖아 있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달리 보면 비리를 감추려는 시도로도 보일 수 있겠다. 그렇게 되면……. 진짜 볼 만하겠다. 한쪽에선 여자를 끼고 술판을 벌이고, 또 한쪽에선 아들의 병역 비리를 감추기 위해 다시금 아들에게 입대를 요구하는 비정한 아버지. 모르긴 몰라도 내일 기사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명제준 세원시장의 정치 인생은 그걸로 끝나게 될 거다. 제기? 어림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되는 게 바로 병역문제다. 그리고 도덕성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게 섹스스캔들이고. 그런데 명제준 세원시장은 둘 다 걸려 있다. 술 한잔 마시는 게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접대성이라는 게 문제다. 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함께 있었다? 그것도 알몸이나 다름없는 복장을 한 여자랑? 상황을 모르는 사람 눈엔 사진 속의 광경은 말 그대로 질펀하게 노는 거로만 비칠 테다. 변명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간혹 잘나가던 정치인이 취중에 여자 엉덩이를 쓰다듬었다가 곤욕을 치르거나, 더러는 당에서 쫓겨나는 일도 벌어지곤 하지 않던가.
“끙……!”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신음했다. 정말 내가 봐도 잘 짜인 각본이네. 기가 막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제대로 엮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현재 강형식이랑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나는 하루아침에 국민 개새끼가 돼서 나락으로 떨어질 테지. 그런 날 건져 올려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신현정 피디는 이미 끈 떨어진 지 오래고. 거기에 장래에 정치적으로 동반자, 그게 아니라도 작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명제준 세원시장은 감방에나 안 가면 다행이다. 막말로 그때 술 따라 주던 애가 성추행이나 성희롱으로 고소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그것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놈들…… 누구 누군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놈들이 합심해서 입을 처닫는다는 전제 하의 얘기지만, 백이면 백 그렇게 할 테지. 왜? 애당초 이런 판을 벌였을 땐,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일 테니. 와, 제갈공명 나셨네. 이거 제대로 걸려들었는데…….
“형식아.”
“……왜?”
“일이 좀 커진 거 같다.”
강형식이 날 멍하니 쳐다본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하지만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나야 나레이션이 해준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지만, 그걸 옮겨서 얘기한들 과연 녀석이 내 말을 믿을까? 설사 믿는다고 한들, 그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방도를 찾겠냔 말이다. 난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믿을 건 한 가지뿐이므로. 신뢰. 적어도 내가 그간 녀석에게 보여준 모습은, 이 정도 얘기는 믿어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도 지금은 이것저것 잴 때가 아니다. 그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그러므로 건다. 녀석이 날 믿는다는 데에. 그나마 다행인 건, 나레이션이 제법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점이었다.
“명제준 세원시장이 어제 술김에 얘기하더라고. 거기 함께 있었던 이들이 누구 누군지.”
“그게 누군데?”
“동선일보의 최형우 부사장. SBC 최진철 국장. 그리고 HJ 엔터테인먼트의 김호준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