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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덫 (3) (113/204)

#113. 덫 (3)2021.06.20.

국회 의사당이 보이는 건물의 6층. 여당인 대한당의 중앙당사에선, 두 명의 중년 남자들이 머리를 맞댄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허! 뒤통수도 어지간해야지! 이거야 원.”

“그러게요. 그렇게 안 봤는데, 명제준 이 사람 진짜 몹쓸 사람이네.”

대한당 당 대표인 최수길 의원과 3선 의원인 박주철이 이처럼 분노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입당제의를 했을 때,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하던 명제준 시장이 아니던가. 한데, 이렇게 기습적으로 기자회견을 열다니. 그것도 야당인 사민당에 입당? 어이가 없다.

“겨우 시장 나부랭이가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말은 맞는 말이다. 국회의원에 비하면 지자체 단체장의 위상은 낮을 수밖에 없다. 국회에선 300명의 의원들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입법발의가 가능한 헌법기관이 바로 국회의원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열 명의 국회의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어차피 국회의원치고 혼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런 만큼 한 명의 국회의원이 지니는 권한은 실로 막대하다. 오죽하면 몇 그램 되지도 않는 황금색 배지를 다는 순간, 120가지의 권한이 생긴다고 하겠는가. 그런 그들의 눈에 비친 명제준 시장은 어쩌다 운 좋게 선거에서 이긴 장돌뱅이에 불과했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명제준 시장의 인지도가 전국구라는 거였다. 솔직히 국회의원 중에서도 명제준 시장만큼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 막말로 명제준이 시장직을 내려놓고 세원 지역에서 총선에 나오기라도 하면 당선은 따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그를 영입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것인데…….

“괘씸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을.”

“하면 어쩐다?”

정치적인 보복이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다음 대선에서 세원은 이미 빼앗겼다고 봐야 옳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지닌 명제준 시장이 대놓고 밀어주기라도 하면, 원래부터 야당에 치우쳐 있는 세원 갑구는 그렇다 쳐도 세원 을구까지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지난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며 전형적인 여소야대의 정국이 되어버렸는데, 대선까지 그리된다면 정말 앞으로 운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표 하나가 아쉬운 판에 명제준 세원시장이 사고를 친 셈이다.

“뒤를 좀 캐보라고 할까요?”

“폭로전으로 가자?”

“가지지 못한다면 부수기라도 해야지 않겠습니까?”

“흠, 그럼 일단 가볍게 흠집 내기라도 해볼까?”

“어떻게요?”

“살짝 압박해보는 건 어때?”

“설마?”

“뭐, 안될 거 없잖아? 다행히 KBC 쪽은 원래부터 우리 입김이 강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죠. 잘 어르고 달래면 피디 하나쯤 날리는 거야 뭐…….”

“우선 그렇게라도 해서 압박 좀 가해보지.”

방송 쪽으론 그렇게 한다고 치고,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하겠습니까?”

“긴장은 좀 하겠지.”

“이럴 때 후속으로 때릴 만한 뭔가가 있으면 딱인데 말이죠.”

그때였다. 보좌관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대표님.”

최수길을 부르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심각한 얘기 중이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불쑥 들어와 보고를 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얘기일 거란 생각에서였다.

“뭔가?”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제보?”

“예. 명제준 시장에 대한 제보입니다.”

“허!”

가려운데 긁어주는 셈이다. 이렇게 딱딱 어귀가 들어맞는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곤 해도 확인해보지 않는 것도 미련한 짓일 터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만큼 명제준 시장에게 원한이 깊은 것일 수도 있으니.

“한번 보지.”

최수길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을 응시하던 두 사람, 최수길 대표와 박주철 의원의 눈이 거의 동시에 반짝였다. ***

“진짜 이러실 겁니까!”

국장실에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진정해.”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아니, 대관절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요!”

고민준 본부장이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는 김동하 국장이었다.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라면 저렇게 행동할 테니까.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마음 같지는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너나 나나 힘 있냐? 윗선에서 그러라고 하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냐고?”

“아, 그래도 너무 하잖아요? 이제 막 자리 잡았어요. 막말로 그렇게 만든 게 누굽니까? 현정이 아니냐고요! 그런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내친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누가 내친다는 거야? 더 좋은 자리로 가라는 거 아냐?”

“장난하세요? 더 좋은 자리가 뭔데요? 그런 게 있기는 합니까?”

“그야…….”

“진짜 너무 하네. 개를 삶아도 이렇게는 안 합니다. 이래서야 누군들 몸 바쳐 일하겠습니까? 하아, 미치겠네 진짜!”

이를 악물고 씩씩거리는 고민준 본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동하 국장이 가만히 그를 불렀다.

“야, 민준아.”

호칭, 직위 다 빼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제부턴 계급장 떼고 선후배로서 얘기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밖에서야 국장이네, 본부장이네 하면서 우리가 좀 먹어주지. 근데 너도 알잖냐? 사주 입장에선 그냥 우린 월급쟁이야, 월급쟁이. 아니, 솔직히 노예나 다름없지. 까라면 까야 하는 건 저 밑에 애들이랑 다를 바 없다는 거 모르는 거 아니잖아?”

“…….”

“현정이도 그래. 이번 일만 하고 말 거야? 마음에 안 든다고 불복하면 뭐가 달라져? 문서 한 장이면 인사이동 끝! 버틴다고 버틸 수 있겠냐고? 그렇게 해서 밉보이고 나면, 한직으로 밀려날 텐데. 걔처럼 능력 만땅인 애가 지방으로 가서 잘도 견디겠다?”

“아니, 그러니까 애당초 왜 이러는 건데요? 걔가 뭘 잘못한 게 있냐고요?”

“정말 몰라서 물어?”

“……설마?”

“그래 인마. 잘못 건드린 거야. 제길. 이 좆같은 나라가 그렇지. 화풀이라고 화풀이! 아 시발, 진짜 생각 같아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

“…….”

“그래도 어쩌겠냐?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난 딸린 식구만 셋이야, 셋. 나만 그러냐? 다른 애들은? 그냥 우리 다 같이 칼 물고 죽을까?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현정이가 그 자리 지킬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네가 말 좀 잘해봐. 이왕 물러날 거, 모양새라도 좋아야 훗날을 기약할 거 아니냐고? 아니, 아니. 내가 책임지고 다음 프로그램 확실히 밀어준다. 그럼 됐지?”

김동하 국장의 말에 고민준 본부장은 눈을 감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언론이라는 게 그렇다. 신문사고 방송국이고 간에, 사주로부터 내려온 지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괜히 족벌언론이라고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시벌!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한숨이 나온다. 젠장! 명제준 시장을 섭외했다고 할 때부터 어째 불안하더라니. 하여간 정치인이랑 엮여서 좋은 꼴 보는 예가 없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고민준 본부장은 눈을 떴다. 그러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나직하면서도 단호하게 얘기했다.

“신 피디한테는 내가 직접 말할 테니, 그전엔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마십쇼. 만일 그전에 헛짓거리하면 정말 나도 그땐 가만 안 있을 거요!”

“새끼가 말본새하고는. 마! 속상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걱정 말고 애나 잘 달래. 걔만큼 능력 있는 피디가 쌔고 쌘 줄 아냐? 나라고 보는 눈이 없어? 일단 스스로 물러나는 모양새 취하고, 잠시만 자중하다가 내년 개편 때 자리 하나 만들면 되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쉰 고민준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국장실을 빠져나갔다.

“에이! 씨펄!”

김동하 국장이 죄 없는 서류철을 집어 던지곤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날 때쯤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낯익은 번호에 익숙한 이름. 몇 번이고 통화하던 번호였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 불안감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 원래는 강형식과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하려던 참이었는데……. 하필이면 어젯밤 통화가 안 되는 바람에 오늘 저녁에 만나기도 약속한 터였다. 런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곤 해도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던 차였다. 그랬는데……. 젠장!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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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길 20여 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거의 신현정 피디 혼자서만 얘기했고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을 뿐이다. 정말이지 들으면 들으면 기가 막혔다. 그리고, 마지막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화? 난다. 그래서 뭘 어쩌겠는가? 내가 그녀가 아니었고, 설사 그녀라고 한들 무슨 방도가 있을까. 신현정 피디는 좋게좋게 말하곤 있었지만, 그 속뜻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내가 바보천치도 아니고. 결국, 쫓겨나는 거 아닌가? 비유가 이상할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배 아파서 난 아이를 뺏기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 심정이야 오죽할까.

“……괜찮으세요?”

니미럴. 겨우 위로라고 한다는 말이…….

“그래도 얘기하고 나니까 좀 낫네요.”

그렇게 말하는 신현정 피디의 표정은 담담하게 보인다. 하지만 눈빛은 죽어 있다. 그럴 테지. 갖은 생각이 다 들 테다. 배신감, 분노, 실망감, 자괴감, 후회……. 그런데 날 보는 눈빛엔 우습게도 미안함까지 깃들어 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피디님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솔직히 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네요. 병가? 하, 진짜 우습네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고 하지. 그게 말이 됩니까? 멀쩡한 사람한테 아프다는 핑계를 대라는 것도 우습고, 그동안 죽어라 만들어온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란 것도 이상하고. 원래 방송국이 그런 뎁니까?”

점점 목소리가 커져간다. 그런 나를 신현정 피디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전 진짜 괜찮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뭘 어쨌게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도 안 됩니까?”

발끈해서 한마디 했다가 이내 꼬리를 말았다.

“……죄송합니다. 열불이 나서. 그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글쎄요.”

“…….”

“이건…… 진영 씨한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잠시 말을 고르는지, 아니면 또다시 생각이 깊어지는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신현정 피디가 힘없이 웃었다.

“퇴사하려고요.”

“퇴사요?”

지금 있는 회사에 오만 정이 떨어졌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막상 그녀의 입에서 퇴사란 말이 나오자 내가 다 암담해진다.

“그다음엔 어쩌시려구요?”

“실은, 전부터 오라는 데가 있었어요.”

“……스카우트?”

“예. JTL에서 예능 하나 하자고 하더라고요.”

“아, JTL…….”

지상파는 아니다. 하지만 요즘 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방송국이었다. 적어도 케이블 TV 쪽에선 탑급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문제는 그 JTL의 주력이 뉴스와 드라마라는 데 있었다.

“괜찮을까요?”

“지금보단 낫겠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봐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메인 피디 자리를 넘겨주고, 한동안 자중하고 있으라는 회사의 권고. 대체 뭘 자중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스태프들의 집단적인 투서가 있었다나? 갑질? 진짜 웃음밖에 안 나온다. 방송국에 가서 길을 막고 물어봐라. 신현정 피디가 어디 그럴 사람인지. 사실일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모함일 게 뻔한 일이다. 나도 아는 걸 방송국 측에서 모를 리도 없고. 그런데도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 역시……. 보복이겠지. 정치적인. 그리고……. 그 이면엔 강윤식이라는 배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짐작에 불과하지만, 거의 맞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후우, 찜찜하더라니. 어젯밤 들었던 나레이션을 떠올리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신현정 피디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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