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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덫 (2) (112/204)

#112. 덫 (2)2021.06.18.

그 시각, 압구정의 모 백화점. 강형식이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바쁜 걸음으로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지하 식품매장. 그곳에서 일주일 뒤에 있을 이벤트를 위해 마련한 공간을 한차례 바라보던 그는,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에도 만나본 적 있는 컨설팅 팀의 간부다. 삼한 그룹의 컨설팅 팀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로만 구성된 팀이었기에 그냥 믿고 맡겨도 될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직접 확인하고 모든 걸 일일이 챙기고 싶은 욕심에 직접 발로 뛰고 있는 터였다. 물론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어렵기만 한지, 시종일관 긴장된 태도로 자신을 대하고 있었지만.

“이쪽부터 동선을 잡는다는 말이군요.”

“예. 입구부터 컨슈머들을 유인하고, 그대로 임시매장을 한 바퀴 돌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통로를 구성했습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상품들에 눈길이 가도록 진열할 수 있게 할 생각이고요.”

얘기를 들으며, 현재는 의류 행사 매장으로 쓰이고 있는 곳을 바라보던 강형식이 다시 묻는다.

“정식 매장은 어떻게 되고 있죠?”

“아무래도 식자재 전문 매장인지라 위치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형마트의 경우에야 오히려 그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경향이 있지만, 아무래도 백화점은 식품 쪽은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편의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겠죠. 그래도 아시죠? 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수도권에서만 10개 이상의 백화점에 입점을 시켜야 한다는 거. 그래야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할 수 있고…….”

그의 얘기는 지겹도록 들어온 터였지만, 팀장으로선 잔뜩 긴장한 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한 손에 든 노트에 메모까지 해가면서. 만일에 하나지만, 혹여라도 이번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브랜드 런칭 자체가 실패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목도 제대로 붙어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대신 성공만 한다면, 이제껏 제대로 줄도 없이 바닥을 박박 기고 있던 그로서도 출세의 문이 열리는 셈이니 열과 성을 다해 이번 일에 임할 수밖에.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래요. 최 팀장님, 믿겠습니다. 우리 꼭 성공합시다.”

“예!”

“그럼 계속해서 수고해주세요. 전 이만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강형식이 돌아서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 장동일 상무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막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찰나였다. 퍽. 하필이면 그와 거의 동시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려던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한데, 문제는…….

“어, 어머! 이를 어째?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저녁 7시를 넘은 시간임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여자는 허둥지둥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이미 그녀가 들고 있던 컵은 뚜껑이 날아간 채 커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양복 상의도 짙게 물들어 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강형식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의를 벗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됐습니다. 그럴 수도 있…….”

그때,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안타깝다는 듯 얘기했다.

“아뇨. 제 실수인데, 어떻게 이대로 넘어가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에서 양복 상의를 가져가려는 여자.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 강형식이 조금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아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TV에 보던 얼굴이다.

‘헤나?’

대한민국 남자치고 걸그룹 스피너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헤나의 팬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한때는 인기 절정이었다. 지금에 와서 솔로 앨범을 내고, 노래와 연기를 병행하면서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미모와 매력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처럼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는 모습은 적어도 그가 보기엔 나쁘지 않게 비쳤다. 당연히 강형식도 호감이 느껴질 수밖에. 그렇다곤 해도 그걸 또 겉으로 내색할 순 없는 노릇. 그저 오다가다 연예인하고 마주쳤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까닭은 없다. 솔직히 그 역시도 한때는 연예인 지망생들이나 그에 버금가는 미모의 여자들과 어울려 놀던 시절도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진짜 괜찮습니다.”

“그래도 옷도 비싼 거 같은데…….”

입술을 잘근 씹으며 미간을 좁히는데, 그 모습조차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강형식은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저기…… 그럼 언제 밥이라도 한번 사시죠.”

“밥이요?”

“예. 바쁘신 거 아니까, 언제든 시간 나시면요.”

작업이라면 작업인데, 먹힐지 모를 일이다. 뭐, 안 먹혀도 그만이란 생각이었지만. 아닌 게 아니라 헤나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본 강형식이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방금 들은 건 못 들은 거로 하시죠.”

“예?”

“저는 진짜 괜찮으니까……. 그럼, 이만.”

그러곤 막 돌아서려는데…….

“저기요!”

등 뒤에서 헤나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

“원 참,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거라곤…….”

“그러게요. 어지간히 눈치가 빠른 늙은이네요.”

“글쎄. 눈치챈 거 같진 않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겠지.”

“하긴. 그러니까 그동안 무소속임에도 저 자리까지 올라간 거겠지요.”

최진철 국장과 김호준 사장, 최형우 부사장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명제준 시장을 태운 차가 빠져나간 정문 쪽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술이나 마저 하지.”

“그러죠.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우린 좀 더 즐기도록 하죠. 아차,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 계시겠습니까?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러지. 먼저 갈 테니까, 빨리 들어오라고.”

그렇게 김호준 사장이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향한 뒤, 나머지 두 사람도 다시금 술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어둠 속에서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색 없는 얼굴과 평범한 체구의 남자였다. 하지만, 만약 서진영이 보았다면 놀라고 말았을 터다. 저택에서 두 번이나 보았던 남자, 한 번은 강형식과 드라이브를 나가기 전 마주쳤고 그 후에 또 한 번 우연히 저택 안에서 산책하다가 만났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정문 쪽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 그의 어깨에는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가 매여져 있었다.

“예, 실장님. 찍었습니다. 영상을 확보하는 대로 빠져나가겠습니다. 예, 예.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전화를 끊은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섰다. 그러곤 건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전화를 통해 보고를 받고 난 후, 강윤식은 소리 없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쪽은 됐고, 그럼 나머지 한쪽은 어찌 되었을까나?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말해.”

- 미끼를 문 거 같습니다.

“확실해 물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 무, 물었습니다.

“흥.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찔러준 돈이 얼마인데.”

- ……저, 실장님.

“왜?”

-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일순 차가워진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김호준의 음성이 살짝 떨린다.

- 외람되지만, 아직 헤나…… 앞날이 창창한 앱니다.

“그런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 어차피 일이 벌어지면 강형식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도 없게 될 거다. 너도 그걸 아니까, 과감하게 행동하는 거 아냐? 후우, 자네가 그 애를 걱정하는 마음은 아는데, 그러니까 시키는 일만 잘해. 그럼 네 회사나 그 애한테 피해갈 일은 없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예! 그럼,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강윤식이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어디서 딴따라 따위가.”

사실 관심도 없다. 그런 연놈 인생이 어찌 되는가는. 그에게 있어서 그런 밑바닥 인생들은 그저 도구에 불과할 뿐. 중요한 건, 미끼를 문 강형식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느냐다. 과연 그가 생각한 것처럼 될까?

“그때 가보면 알겠지. 정 안 되면, 찌라시로 뿌려도 그만이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건 법도 주먹도 아니다. 풍문. 그중에서도 증거가 확실한. 그것도 여자와 얽힌 섹스스캔들만큼 강력한 건 없다. 상대가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이걸로 대충 밑그림은 그려졌고. 그럼 이제…….”

손에 쥔 것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향후 계획들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확인해보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두 장의 사진이 첨부된 채. 그 사진들을 확인한 강윤식. 그의 눈이 뱀처럼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세원에 있는 모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한눈에도 고아하게 생긴 중년 여자가 내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서진영이라고 합니다.”

“아, 예. TV에서 뵀어요. 근데, 이 사람…….”

“취하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댁으로 모셨습니다.”

“이이가 이렇게 취할 사람이 아닌데……. 아, 감사합니다. 이젠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몇 층으로 가면 됩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주실래요?”

명제준 시장의 덩치가 크기 때문에, 취해서 평소보다 묵직해진 남자를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집까지 옮기기엔 쉽지 않을 터다. 이왕지사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 정도 수고를 마다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는 명제준 시장을 부축해서 사모님을 따라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조금 걸으니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후우!”

집 안까지 들어가 침대에 명제준 시장을 눕힌 후,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사모님이 물이 담긴 컵을 건네준다. 그걸 숨도 안 쉬고 들이켠 후,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석호 조금 있으면 들어오는데, 보고 가시죠?”

명석호가 나에 관한 얘기를 한 거 같은데……. 솔직히 나로서는 그가 조금 부담스럽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둘째치고, 명제준 시장의 아들이라는 점이 하나의 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가 연락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아, 예……. 오늘 고맙습니다. 살펴 가세요.”

인사를 하곤 복도로 나왔다. 그러곤 엘리베이터가 서자마자 곧바로 몸을 싣고는 아래로 내려왔다. 그나저나 잘된 건지 모르겠다. 나레이션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 건물 안에 룸이 있었을 텐데, 과연 거기선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쯧, 나로선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연이긴 하겠지만, 때마침 명제준 시장이 밖으로 나온 것은.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되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고 말하기엔 어딘지 석연치 않은데…….

“모르겠다. 일단, 더 이상 나레이션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지.”

잘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일이 진행 중이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나로선 확인한 방도는 없으니까, 이쯤에서 돌아가야겠지.

“아, 하연 씨!”

뒤늦게 떠오른 그녀 생각에 톡을 날렸다.

--- 약 먹고 좀 쉬었더니 한결 낫네요.

--- 오늘 죄송했습니다. 간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폐를 끼쳐서.

- 앙, 무슨 소리예요.

- 자기가 아픈 게 더 큰 일이죠.

- 진짜 괜찮은 거죠?

- 힝, 아프지 마죠.

- 너무 무리하지도 말고요.

- 그러다 진짜 큰일 나겠어요.

--- 걱정 마세요. 저도 오늘 느낀 게 많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저도 세수만 좀 하고 얼른 자야겠어요.

- 예, 얼른 쉬어요.

- 낼 연락 주고요. 꼭이요, 꼭!

그녀가 보내온 톡을 읽으며 거리로 나갔다. 거짓말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기도 뭐한 얘기니까. 그렇더라도 그녀와 톡을 주고받다 보니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막 택시를 잡으려 할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들려오는 BGM이다. 뭐, 지금은 기다리고 있던 음악이긴 했지만.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레이션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 서진영은 멍청이다.

“……!”

멍해 있는데, 나레이션이 일침을 가했다. - 강윤식이 판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런 망할! 나도 모르게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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