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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덫 (1) (111/204)

#111. 덫 (1)2021.06.16.

언제나 그렇듯 나레이션은 기습적이다. 이래서야 어디 안심하고 사람이나 만날 수 있을까. 놀란 건 놀란 거고,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은 계속되고 있다. - 강윤식의 음모는 매우 치밀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터이다. 명제준 세원시장이 명석하긴 하지만, 그 혼자서만은 절대로 강윤식이 깔아놓은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여태껏 애써 만들어 놓은 연줄도 소용없게 된다. 강형식을 생각해서라도……. 예, 예. 그러지요. 강형식을 생각해서 움직여야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진영 씨, 진짜 괜찮아요? 어머, 이마에 식은땀 좀 봐.”

“왜 이러지? 몸이 좀……. 죄송한데, 오늘은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할 거 같은데요?”

“아잉. 그게 왜 진영 씨가 죄송할 일이에요. 얼른 가요.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아,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무슨 소리예요. 병원에 들렀다가…….”

“그냥 몸살인 거 같아요. 집에 약이 있으니까, 그거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병원으로 가요. 오늘도 문 연 데가 있을 거예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응급실로 가요!”

이하연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나레이션이 그쳤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은 뒤였다. 강윤식과 그 일당들이 꾸몄다는 음모의 전모도 대충 알아낸 상황이었다. 하아, 진짜 치졸한 놈이네. 이젠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주변부터 치고 들어오는구나. 어째 명제준 그 양반이랑 엮이는 순간부터 뭔가 찜찜하더니만.

“진짜 저 혼자 가도 됩니다.”

“그래도…….”

“이따가 연락 드릴게요.”

억지로 그녀를 떼어놓고 급히 택시에 올랐다. 그런 나를 이하연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녀에게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망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난 미안한 감정을 담아 그녀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택시 운전기사분께 부탁했다.

“양주로 가주세요.”

  *** 명제준 시장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최진철 국장이야 몇 번 본 사이라곤 해도 김호준 사장은 오늘 처음 본다. 더욱이 최형우 부사장의 경우엔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언론인은 언론인인지라 몸가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이에 알몸으로 사우나를 한다는 게 민망한 일이긴 했지만, 결코 그 때문에 난처하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사우나 뒤였다. 술 한잔 하자고 하더니만 그 장소가 룸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헛참.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골프장 지하에 이처럼 은밀한 공간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안쪽의 구조가 흡사 미로와 같아서 룸마다 독립적인 형태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애써 엿보려 굴지 않는 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을 듯 보였다. 상무라고 불리는 남자가 그들을 안내해 준 방에는 이미 테이블 위에 술이며 안주가 세팅되어 있었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들이 들어왔다. 한데, 강남의 흔한 룸살롱과는 달리 열댓 명씩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달랑 네 명. 남자들도 네 명이니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색을 밝혀선 아니다. 노동운동을 할 때부터 연애를 시작해 결혼한 뒤,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는 거로 유명한 명제준 시장이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애들입니다. 뭣들 하니? 진주야, 얼른 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가장 가운데 서 있던 아이가 명제준 시장의 옆에 앉는다. 그러면서 술잔부터 내민다. 엉겁결에 그걸 받으면서 명제준 시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HJ 소속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다른 여자들도 다른 남자들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건 명제준 시장의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저 남자들끼리 허름한 술집에 모여 앉아 곱창이나 구워 먹으며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게 속 편한 그였던 것이다.

‘뭐, 나만 정신 차리면 그만이겠지.’

어느 정도만 마시다가 일어날 심산이었다.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원래부터도 명제준 시장은 접대 문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이번에 아들과의 일을 겪으며 더욱더 가정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여길 벗어나갈까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 아까 하는 얘기나 좀 더 해봅시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급히 말을 꺼내는 그였다. 그래야 핑계를 대고라도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 우리 시장님 추진력이 장난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쁜 애들 앉혀놓고서, 술 한잔 안 따라주시다니.”

“아잉. 저도 술 한 잔 주세요.”

진주라고 했던가? 당연히 본명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호준 사장의 얘기가 이어진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간간이 드라마에도 얼굴 비치고 하면서 슬슬 뜨고 있는 앱니다. 귀엽게 좀 봐주세요.”

역시 예상대로다.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 이것 참.”

명제준 시장은 솔직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딸이 있었다면 딱 이만한 나이일 텐데, 그런 여자애를 옆에 앉혀놓고서 술시중을 들게 하자니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냥 술집에서 일하는 아이도 아니고, 연기자란다. 흔히들 말하는 B급 연예인쯤 되는 건가? 자청해서 나왔을 리는 만무하고, 예상대로 김호준 사장이 운영하는 HJ 엔터테인먼트 소속이겠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진주가 명제준 시장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은근 색기 어린 눈빛이 되어 점차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하다. 이미 최진철 국장과 김호준 사장 그리고 최형우 부사장은 자신들의 파트너를 안다시피 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갈수록 질퍽해져 가는 분위기에 명제준 시장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그냥 술잔만 바라보며 연거푸 술만 마실 뿐이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마시세요?”

“원래 내가 술을 좋아해서.”

“아잉. 저도 한잔 따라주세요.”

“그래요. 그럼.”

마지못해 진주의 술잔을 채워주면서 힐긋 바라보니,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아무리 많아도 스물셋은 넘지 않아 보였다. 다시 한번 혀를 차고 말았을 때, 진주가 바짝 붙어 앉더니 명제준 시장의 팔뚝을 꿰찼다.

“시장님이시죠?”

워낙 잘 알려진 터라, 숨기고 말고도 없다. 그렇다곤 해도 대부분 이런 곳에선 통상 회장님 혹은 사장님 정도로 명칭을 통일하기 마련인데, 이 아인 무슨 까닭인지 대놓고 자신을 아는 척하고 있었다. 결국, 명제준 시장은 허허거리며 고개를 내젓지 않을 수 없었다.

“저 TV에서 시장님 본 적 있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나으세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명제준 시장은 멈칫했다가 이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민망함이 가시는 건 아니다. 야릇한 기분에 자꾸만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어서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옆에 앉아 있던 진주라는 여자애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볼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명제준 시장이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머, 어디 가시게요? 아, 화장실?”

화장실은 룸 안에도 있었기에 다들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다들 제각기 딱 붙어 앉아서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제준 시장은 옅게 미소를 베어 물곤 진주에게 말해준다.

“급하게 마셨더니 그런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래도 되겠죠?”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따라가 드릴까요?”

“아니, 괜찮소. 금방 올 텐데 뭐. 그때까지 도망가지나 마쇼.”

진주가 보기에도 그리 많이 취한 것 같진 않다. 거의 양주를 반병이나 마셨음에도.

“호호호. 시장님도 참. 은근 재밌는 분이시네요.”

씩하고 웃어 보인 뒤, 룸을 빠져나온 명제준 시장의 얼굴이 백팔십도 바뀐 것도 그때였다. 마치 얼어붙듯이 차갑게 표정을 굳힌 그는, 아까 전과는 달리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나참, 그런 데 룸이 있을 거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할까. 기가 막히지만 나레이션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이렇게 급히 가고 있는 거지만. 덕분에 택시비로만 10만 원을 부른 상태였다. 그러고도 안 가려고 하는 걸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양주에 있는 엘라드 컨츄리 클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진짜 차라도 한 대 사든지 해야지.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젠 진짜 그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손님, 저기 비탈만 오르면 곧입니다. 어떡할까요? 기다릴까요? 아니면…….”

운전기사의 얘기에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그로서는 손님 하나 태우지 않고 산속이나 다름없는 여길 빠져나가는 것보단 날 기다렸다가 다시 태우고 가는 게 나을 터다. 반면 나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대로 보내면 어쩌면 난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찮으시면 기다려주시면 좋겠네요.”

“예. 그렇게 하죠. 한데…… 돈은?”

“올 때랑 같은 금액으로 하죠.”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합의를 본 후, 차가 엘라드 컨츄리 클럽에 들어서기 무섭게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런 뒤 돌아섰을 때,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한 명의 인영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에 어른거리는 인영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명제준 시장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풍채나 걸음걸이가 지난번에 보았던 거랑 흡사해서. 다만 술을 좀 마신 모양인지, 간간이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나마 술이 센 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많이 마신 건 아닌지 넘어지거나 하진 않는다. 그렇다곤 하지만, 이 시간에 무슨 술을 저렇게 마신 건지. 이제 겨우 오후 7시경. 겨울인지라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곤 해도 만취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다.

“시장님.”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명제준 시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그의 팔뚝 하나를 어깨에 걸치곤 부축하자, 명제준 시장이 그제야 날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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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자네는?”

“지난번에 뵈었었죠?”

“그렇군. 기억나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이런 데서 다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명제준 시장이 픽하고 웃는다.

“씨도 안 먹힐 얘기는. 다 아네.”

“……?”

“누가 보냈나? 석호? 아니면 장 과장이 부탁했나?”

장 과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렇다고 치죠. 한데, 차는……?”

“저기 있는데, 이래서야 운전대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건 걱정 마십시오. 운전은 제가 하면 되니까요.”

“그럼 좀 부탁 좀 하세.”

그렇게 명제준 시장이 말해준 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귓가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후우. 바람 좀 쐬면 정신이 깰까 싶었더니, 그놈의 술……. 독하기도 하지. 술 좀 깨면 대리라도 불러서 돌아갈까 했는데, 자칫했으면 그대로 주저앉아서 쓰러져버릴 뻔했군. 고맙네. 자네 덕분에 그런 추태는 면할 수 있었네.”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힘들어 보이시는데, 말씀 그만하시죠.”

“그래, 그래……. 부탁 좀 하네. 아, 그리고…… 여기 차 키.”

“차는 어느 쪽에 있습니까?”

내 질문에 아직까진 정신을 잃지 않고 잘 버티고 있던 명제준 시장이 손가락을 들어 주차장 한쪽을 가리킨다. 국산 중형세단이 보였다.

“세원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응응. 여기.”

명제준 시장은 이런 일들을 여러 번 겪어봤는지, 익숙하게 핸드폰을 내민다. 그러곤 짧게 얘기했다.

“1번. 마누라.”

그걸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명석한 사람이다. 지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타시죠.”

차에 이르러 뒷문을 열어주고, 명제준 시장을 태운 뒤였다. 그제야 날 기다리고 있던 택시 운전기사가 떠올라 얼른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먼저 좀 가주셔야겠네요.”

“어? 그건…….”

“여기…….”

난 운전기사의 손에 수표 한 장을 쥐여주며 그를 달랬다.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저 최대한 탈이 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좋아라 하는 택시 운전기사를 보내고 난 뒤, 난 재빨리 차로 돌아왔다. 그러곤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막 컨츄리 클럽에서 떠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남자들이 서둘러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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