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아버지의 이름으로. (3)2021.06.13.
워낙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이라서 다소 당황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행보이기도 했다. 세원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동안 은근히 바라던 바이기도 할 테고. 물론 진성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일 테지만, 그들에게도 명제준 세원시장의 결정은 마이너스라기보단 플러스라고 보는 게 좋을 터였다. 기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명제준 세원시장 마침내 결의> <무소속이었던 명제준 시장, 사민당의 품으로> <대선을 앞둔 야당의 세 불리기, 이제 시작인 것인가?> <세원은 이제 사민당의 표밭?> <불편한 대한당, 명제준 시장에게 항의> <결국 야당으로 기운 명제준 시장의 진의> <명제준 시장,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라고 발표.>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에 정국이 들썩인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단지 지자체 단체장이 소속을 정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야단법석을 떠는 이유는, 그만큼 명제준 시장이 가진 유명세 때문이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고 세원에서 출마하면 금배지를 다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어찌 되었든 그의 서포트를 받는 이상, 세원 지역은 이제 사실상 야당인 사민당의 앞마당이 된 거나 진배없었다. 안 그래도 대선을 앞두고 조마조마한 심정이던 여당으로선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 그러셨군요.”
오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나 또한 심란해졌다. 명석호였다.
- 예. 가끔 전화는 드리겠지만, 찾아뵙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밤새 많은 얘기를 했다며, 모두 내 덕분이라면서 전화를 해온 그는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군 입대. 따로 발표를 하거나 기사를 흘리진 않겠지만, 입대를 하게 될 거라는 얘기였다. 이미 면제를 받은 사람에게 그게 가능한가 생각해봤지만, 불가능할 거 같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이름을 들어도 뭔지 모를 난치병으로 면제를 받았다던 그였는데, 이제 와서 완치가 됐다고 하고 입대를 청하면 국방부에서 거절할 명분 따윈 없을 테니까. 물론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몰려들면 다소 시끄러워질 여지가 있었지만,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이상 문제가 될 거 같진 않았다. 더구나 명제준 시장이 막 사민당의 품으로 자리를 옮긴 마당이었기에 당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는 커버를 해줄 테고.
“힘든 결정이었겠습니다.”
- 아뇨. 당연히 그랬어야 합니다.
“흠……. 알겠습니다.”
솔직히 아직은 명석호와 얘기하는 게 불편하다.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왠지 간이 쪼그라든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난 배포는 타고 나지 못한 모양이다. 혹시라도 그럴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정치 따윈 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그와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잘됐네. 아버지와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를 했다고 하니. 겨우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명석호와 나눈 얘기들은 다른 이들에겐 절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신현정 피디는 말할 것도 없고, 강형식이나 이하연에게도. 까똑. 나참, 이 여자도 양반은 못되나 보다.
- 어제 촬영 잘 했어요?
- 난 오늘 중국가요.
- 내일 돌아올 예정.
- 주말엔 만날래요?
공항에서 날리는 걸까? 톡이 정신없이 날아들고 있다. 아니, 그렇게 바쁘다면서 뭘 자꾸 보려고 하는 건지. 내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 잘 다녀와요. 토요일 안 되면 일요일 날 봐도 괜찮으니까, 서두르지 말고요.
- 앙, 정말?
--- 예. 조심히 갔다 오세요.
안 그래도 큰 눈을 활처럼 휘며 귀엽게 웃고 있을 이하연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덕분에 명석호 때문에 살짝 다운되었던 기분이 나아졌다. 역시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사람으로 푸는 게 정답인 모양이다.
*** 이틀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명제준 시장은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아내. 현숙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는 평생을 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여자였다. 숟가락 젓가락 두 벌만 가지고, 지하 셋방에서 살림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한결같이 그의 곁을 지켜왔다. 그러는 동안 정말이지 좋은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더랬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아들 석호가 태어날 때였지만, 그 외에도 아내는 명제준 시장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활력소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던 그녀가 아들과 의절하다시피 한 그날로 밖으로 싸돌며 얼굴도 보지 않으려 했으니, 괴롭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다 지나간 일일 뿐이다.
“다녀오겠소.”
“밥은 거기서 드시는 거죠?”
“글쎄. 밥은 모르겠고, 술은 한잔 하겠지. 늦을지 모르니 먼저 자고. 아, 석호는 새벽부터 나갔다고?”
“입대하기 전에 신변정리라도 하려나 봐요.”
“기껏해야 2년인데, 뭘 또 그렇게까지.”
“젊은 애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죠.”
“하긴.”
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랬다면 평소 알고 지내던 병원장까지 구워삶아 가며 아들의 병역을 빼내지도 않았겠지. 부모 마음이 그럴진대, 본인이야 오죽할까. 그런데도 기어코 병역의 의무를 다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아들이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그럼 다녀오리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곤 집을 나선 명제준 시장은 그길로 차에 올라 직접 운전대를 잡고 양주 쪽으로 향했다. 한 시간 하고도 이십여 분 정도 차를 몰았을까. 차가 멈춘 것은 엘라드 컨츄리 클럽 안에 들어서서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차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그를 알아보곤 잽싸게 다가와 안내한다. 잠시 후, 복도 저편에서 세 명의 남자들이 웃음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다가오다가 그를 발견하곤 반색했다.
“어이구! 시장님, 안 그래도 오실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시나 싶어서 걱정하던 중입니다.”
SBC 최진철 국장의 너스레에 명제준 시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잡는 거라, 공이나 나갈지 모르겠군.”
“저희도 잘 못 칩니다. 그냥 재미 삼아 치자는 거지, 목숨 걸고 칠 거 아니지 않습니까? 아차, 김호준 사장은 처음이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호준입니다.”
“동선일보 최형우입니다.”
“반갑소.”
“평소 시장님을 흠모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갑시다.”
그렇게 네 사람은 필드로 나아갔다. 그런 그들을 캐디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 보통 홀당 전후로 해서 15분씩 예약이 잡혀 있기 마련이지만, 세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었다. 눈치로 봐선 HJ 엔테터인먼트 사장인 김호준이 신경을 써 조치해둔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홀을 돌 수 있었다.
“나이스 샷!”
간만에 아이언으로 공을 날리고 나서 캐디에게 골프채를 넘겨준 뒤 명제준 시장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세 사람 최진철 국장과 김호준 사장 그리고 동선일보의 부사장 최형우가 뒤따른다. 그중에 김호준 사장에게 명제준 시장이 물었다.
“몇 달 전엔가? 세원시에 소문이 돌았더랬는데, 혹시 들어본 적 있소?”
“아, 그거 말씀이군요.”
아는 게 있다는 말로만 들리진 않았다. 당연한 얘기다. 오늘 모임 자체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호준 사장은 딱 건방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웃으면서 편하게 얘기했다. 물론 말하는 사람이 편하다고 해서 듣는 사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헛소문만은 아닙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삼한 그룹이 내년 즈음해서 제법 덩어리가 큰 사업을 하나 구성 중인데, 그 일환으로 기획된 게 바로 대단위 촬영 단지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게 된 게 저희 HJ랄까요. 뭐, 구체적인 얘기까진 할 수 없습니다만, 이정도면 만족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촬영 단지의 건설예정부지 중 한 곳이 세원이다? 그런 얘기요?”
“그런 셈이죠.”
“하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겸사겸사죠.”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더 몰아붙이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짓일 터. 명제준 시장이 이쯤에서 일단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그래도 얼굴까지 뵈었는데, 작은 선물 하나쯤 드리자면…….”
김호준 사장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명제준 시장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운 채 얘기했다.
“삼한 그룹에 강윤식 실장이라고 계시는데, 혹시 아십니까?”
“음, 강구철 사장 아들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분이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얘긴…….”
“예.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오늘 자리도 그분께서 은근슬쩍 언질을 주셔서 마련한 자리지요.”
대충 감이 온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돌려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왕이면 세원에 부지를 마련하고 싶다는. 동시에 입법적인 문제나 자금 지원적인 부분에서 편의를 요구하는 일종의 로비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내 돌아가면 상세히 알아보고 연락드리지.”
“그러시지요. 아, 홀도 다 끝나가는데, 식사는 어쩌시겠습니까? 괜찮으시면 사우나 한판 때리고 술이나 한잔, 어떠십니까?”
“그렇게 합시다. 밥이야 아무 때나 먹어도 그만이고, 간만에 반가운 사람들 만났는데 술이 빠질 수야 없지.”
“하하하. 역시 시장님이십니다.”
그때까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듣고만 있던 최진철 국장이 끼어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한층 달구었다.
“기대가 됩니다. 시장님과의 술자리라니!”
옆에선 최형우 부사장이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 주말의 강남역 부근은 그 악명만큼이나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디서 무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굴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을. 며칠 만에 본 이하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늘씬한 몸매 하며 새하얀 얼굴에 크고 빛나는 눈 때문인지 지나치는 남자들이 눈을 떼지 못한다. 이것 참. 사람이란 동물이 얼마나 간사한 건지. 다른 놈들이 힐끔거리는 게 싫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뭔지.
“왜 그래요? 아까부터 자꾸 둘러보고.”
“아, 아뇨. 간만에 하연 씨랑 같이 이러고 있어서 그런가 좀 어색하기도 하고, 또…….”
“힛. 좋다는 얘기죠?”
“그……렇죠.”
대답하기 무섭게 덥석 내 팔짱을 끼는 이하연. 그녀를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슬슬 저녁때인데 뭐라도 좀 먹어야겠죠?”
“음…….”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토닥거리며 메뉴를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째 앙증맞다. 특히나 저 도톰한 입술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아, 미쳤네.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람. 그때였다.
“김치찌개?”
“그거로 괜찮아요?”
“맛있잖아요. 이왕이면 돼지고기 들어간 거로.”
“옷에 막 튈 텐데요.”
“에이, 앞치마 하면 되죠.”
수더분하게 얘기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웃고 말았다.
“하연 씨는 진짜 이상한 거 같습니다.”
“예? 제가 왜요?”
“재벌 3세 같지가 않다고나 할까. 입맛도 그렇고 어째 서민보다 더 서민다운 느낌이에요.”
“앙? 그게 그렇게 이상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요.”
“나도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입을 가리고 웃더니,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은 저도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게 다 할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겠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자수성가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밥상에 올리는 찬도 절대 다섯 가지를 넘지 못하게 하시고, 술도 소주만 드시거든요. 그러다 보니 집안 어른들이며 애들까지 죄다 먹고 입는 데에 큰돈 쓰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고나 할까. 사촌 동생 중에 몇 명은 아직 철이 없어 그런가 가끔 쓸데없는 짓 하다가 할아버지한테 불려가 혼쭐이 나기도 하지만요.”
처음이었다. 그녀의 집안 얘기를 듣는 것은.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아, 돈 때문이 아니다. 그저 가족이 많다는 게 좋아 보일 뿐이었다. 물론 짐작하곤 있다. 저렇게 평범해 보이는 가족들이지만, 그 안에선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지 쯤은. 굳이 멀리 볼 것도 없이 강형식만 봐도 충분할 테니. 그건 그렇고. 강윤식이 조용히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하다. 그때 내게 반쯤은 협박조로 몰아붙이던 걸 생각하면, 지금쯤이면 뭔 짓을 해도 했어야 하는데. 오늘 집에 돌아가면 강형식을 만나봐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아놔. 다른 때라면 괜찮은데, 지금은 좀 그렇지 않나? 뭐든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냐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이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왜 그래요? 혹시 어디가 안 좋아요?”
“예? 아 그게……. 조금 머리가 아파서. 괜찮습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명제준 세원시장은 지금 덫에 걸려들었다. SBC 최진철 국장과 HJ 엔터테인먼트 김호준 사장이 파놓은 덫에.
“……!”
당황스럽네. 그래서 어쩌라고? 무슨 덫에 어떻게 걸려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나더러 명제준 세원시장까지 서포트 하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무리 명석호와의 관계도 있고, 명제준 세원시장이 훗날 강형식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잖아.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다. -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강윤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