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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얻는 게 있으면……. (3) (107/204)

#107. 얻는 게 있으면……. (3)2021.06.06.

“제가 보기엔 그래도 되는 이로 보였습니다.”

“그게, 그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인가?”

“저라면 그럴 거란 얘기였습니다.”

“말장난은……. 그 얘기나 이 얘기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그들 사이엔 차 한 잔 없었지만, 그게 불편할 사이는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으니까. 그만큼 한마디 한마디 주고받는 말에는 무게가 실려있다. 또한, 그 무게만큼이나 진한 정이 배 있었고.

“요즘 첫째가 열심이라지?”

강윤식 얘기임을 모를 장동일 상무가 아니다.

“제 애비는…….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자넨 그렇게 불러도 돼. 조카 아닌가.”

“예. 강 사장은 가만있는데, 그렇게까지 움직이는 걸 보면 꽤나 위기의식을 느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비위가 상한 거겠지. 얕잡아 보던 이들한테 연달아 쥐어터졌으니까.”

“어느 쪽이 되었든 섣부른 장난질은 분명하지요.”

“때론 그 별거 아닌 장난에 넝마가 되는 게 사람이기도 하네만.”

걱정이 어린 듯, 그러면서 누군가를 시험하는 듯한 눈빛을 발하는 강 회장을 장동일 상무는 가만히 바라만 본다. 그러다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를 보고 강 회장이 눈에 이채를 머금었을 때, 장동일 상무가 말했다.

“녀석을 모르시는군요.”

“내가 그 녀석을 모른다?”

“회장님 핏줄입니다. 형식이는.”

“핏줄……. 그렇지. 날 꼭 닮은 녀석이지. 제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복 받은 일이지요. 회장님께나, 회사로서나.”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리네만?”

“언제는 하셨습니까?”

“이 정도도 못 버텨내면 애당초 덤벼들 생각을 말아야지.”

“하긴, 야전도 아닌 막사인데 치고받아 봐야 죽기까진 하겠습니까?”

두 사람 다 당연하다는 얼굴이다. 그걸 보았다면 강윤식이나 강형식은 기겁을 했겠지만, 그들로서는 그게 일상이었다.

“그저 죽어나는 건 그 아래쪽인데, 안쓰럽게도 형식이 곁에는 그 아이가 유일해서요.”

“하면, 나서겠다는 건가?”

“그렇게까진 어렵겠지요. 아무리 룰이 없는 싸움이라지만, 애들 싸움에 어른이 나서는 건 좀…….”

“그럼 어쩌겠다는 건가?”

“그래도 주의 정도는 줄 필요가 있겠지요.”

“글쎄. 과연 들으려고나 할는지.”

“하면, 그때 매를 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장동일 상무의 아무렇지도 않은 한마디에 강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어 나온 그의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장동일 상무의 귀에는 그리 들렸다.

“자넨 나서지 말게.”

한마디로 둘이 치고받다가 한쪽이 죽을지언정 그냥 놔두란 얘기다. 그 얘긴 즉 적어도 한쪽엔, 아니 양쪽 다 피바람이 분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을 가늘게 뜬 장동일 상무가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자네 손에 피를 묻히는 걸 나더러 보란 말인가?”

“핏줄입니다.”

“내 곁은 자네네.”

장동일 상무는 강 회장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회장님 묘 옆에 자리를 파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적잖이 격동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 회장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니 어찌 안 그럴까. 이러니 회사에서 강 회장의 속뜻을 제대로 읽는 단 한 사람으로서 강형식의 옆에 서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쓸데없는 소리는.”

“그러게요. 어째 오늘은 자꾸 신소리가 나오네요.”

“언제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런가요? 전 금시초문입니다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게.”

“모릅니다. 그런 거.”

“됐네. 말씨름할 기운도 없으이. 객쩍은 소리는 그쯤 해두고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하세.”

“죄송합니다만,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단칼에 거절하는 장동일 상무를 강 회장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남들 눈 같은 거 신경도 안 쓰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장동일이다. 그런 장동일이 이젠 핏덩이 같은 아이, 강형식을 위해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잡음이 일어 그 아이에게 작은 피해라도 갈까 봐. 그 마음이 더없이 고마웠다. 강 회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다.

“하면, 술은 다음에 하지. 내가 사는 거로 하고.”

“그야 이를 말입니까?”

“나가보게.”

“나오지 마십시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차례 몸을 숙여 보이곤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동일 상무. 그가 사라진 방 안에서 강 회장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곤 묘한 눈빛이 되어 허공을 응시하다가 일순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인덕이라도 있어서.”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 언제나 그렇듯 촬영은 한진석의 유쾌한 멘트로 시작되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셨는지요. 저희는 오늘도 새로운 게스트분을 모시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 서 셰프님, 왜 웃으시죠?”

“아뇨, 아뇨.”

난 손을 내저으며 혼잣말처럼 흘렸다.

“그냥……. 듣다 보니, 무슨 전국노래자랑 같은 느낌이 나서.”

나처럼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청객들과 스태프들이 내는 웃음소리였다.

“아놔, 누군 몸 바쳐서 일하는데, 그러시깁니까?”

“죄송합니다. 한진석 씨 멘트가 너무……. 아닙니다.”

“너무 뭐요?”

“……구려서요.”

또다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들.

“헐!”

기가 찬다는 듯 탄식하며 날 노려보던 한진석이 순간 씨익 웃더니 표변한 태도로 다시금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요즘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춥습니다. 15년 만에 온 한파라고 하죠? 이제 곧 연말연시이니 당연한 거겠습니다만, 부디 감기 걸리지 말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까요. 이불 밖은 위험하다니까요.”

“이봐요, 서 셰프님! 우리 좀 격조 있게 갑시다, 격조 있게!”

“아니, 제가 뭐라고 했나요?”

날 힐난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한진석이 또다시 표정을 바꾸어 미소 띤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곤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멘트를 날렸다.

“오늘 모실 손님은 핫하다 못해서 손이 델 정도죠?”

“손이 왜 데죠? 만지지도 않는데?”

“자꾸 딴지 걸 겁니까? 그만큼 뜨겁다는 거 아닙니까?”

“흠, 그렇긴 하죠. 요즘에 대한민국에서 이분 모르면 정말 간첩 취급 받을 테니까요.”

“와, 간첩! 웬 쌍팔년도 멘트입니까?”

“글쎄요. 생각해보니까, 간첩도 이분은 알고 있을 거 같네요.”

“하긴, 그럴 만한 분이시긴 하죠. 모시겠습니다. 오늘의 게스트 분입니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스튜디오 한쪽에 처져 있던 커튼이 젖혀졌다. 물론 웅장하기 짝이 없는 BGM도 필수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낸 명제준 시장의 얼굴을 알아본 방청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갑습니다.”

명제준 시장이 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하자, 한진석이 굽실거린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알려주려는 듯 한껏 저자세를 취하며 손을 잡는다. 이어 난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명제준 시장이 스튜디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몸을 반쯤 걸치듯 앉자, 한진석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시장님, 시청자분들께 인사하시죠.”

“그럴까요?”

역시 정치인이다. 빼는 법이 없다. 하기야,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정치인들이니까.

“국민 여러분,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알아보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세원시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명제준이라고 합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또 모를까.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 치고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만, 그럼에도 명제준 시장은 내가 듣기에도 꽤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괜히 이런 자리에 나와서 시청자분들이 채널 돌리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핫.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재미진 분이신데요.”

“제가 좀 합니다만. 그것도 술이 몇 잔 들어가야……. 큼.”

“크크큭. 지금이라도 술 한잔 드릴까요?”

“아, 그래도 됩니까? 솔직히 지금 너무 긴장되고 속이 타서……. 근데, 그러면 음주 방송 되는 거 아닙니까?”

방청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진석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손뼉까지 치며 웃고 있다. 물론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나 역시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이것 참. 카메라를 의식하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지금 보이고 있는 명제준 시장의 모습은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깔끔한 인상과 함께 젠틀한 언행으로도 유명한 그였지만, 오늘은 아예 작정을 했는지 마치 옆집 아저씨같이 굴고 있다. 뭐랄까, 명절날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오가다 마주친 동네 아저씨가 친근하게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듯한 인상이랄까. 저게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전략이라면,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반대로 지금 모습이 원래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본모습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어느 쪽이 되었든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다. 적어도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다.

“아시겠지만, 이 방송이 반쯤은 먹방인 건 아시죠?”

“솔직히 모릅니다. 제가 이 시간에는 친구들이나 직원들하고 껍데기 집에서 소주를 까고…….”

급히 고개를 내젓는 한진석을 보곤 명제준 시장이 응?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아차 싶었는지 얼른 말을 바꾼다.

“큼, 소주 뚜, 뚜껑을 열고 있을 테니까요.”

“크크큭. 그러시군요. 소주 뚜껑을……. 풉!”

웃느라 정신없는 한진석을 대신에 내가 말을 받았다.

“좀 서운하긴 하네요. 그래도 요즘 핫한 방송인데요.”

“에이, 이 사람이. 뜨겁기는 삼겹살집 불판이 더 뜨겁지.”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아직 젊어서 그런가 잘 모르는구먼. 안 되겠군. 그러지 말고 촬영 끝나고 나서, 주방장님 저랑 같이 가십시다.”

“왜……?”

“왜긴? 낮술 한잔 거하게 하자는 거지요. 아, 여러분들도 함께 가시겠소? 내가 비싼 것은 못 사드려도 삼겹살까진…….”

“와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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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환호성을 내지르는 방청객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보다가 한진석이 묻는다.

“요즘 삼겹살값 엄청 올랐는데요? 오죽하면 금겹살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문제입니다, 문제. 민생이 안정되어야 국가도 안정되는 건데……. 이러다 나 같은 사람은 풀이나 뜯어 먹고 살아야 하지 싶소.”

“에이, 시장님은 그래도…….”

“그래도 뭐요? 나, 월급쟁이인 거 모르오? 그나마 지금이야 세원 시민들 덕분에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고 있습니다만, 까딱 잘못해서 잘리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백수나 다름없는 신세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그래도 그동안 해오신 게 있는데요.”

“뭐? 정치? 아까 내 팬이라고 하시더만…….”

“어, 저 그런 얘기한 적 없는데요.”

“큼, 그랬던가? 아무튼, 내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거 전 국민이 다 아는데. 한평생 시위 현장만 떠돌던 내가 그동안 무슨 재산을 쌓아놨겠소? 솔직한 얘기인데, 시장직에서 물러나면 치킨집 하나 차릴 돈도 없는 사람이 나란 말이오.”

“에휴. 말씀 듣고 보니, 저라도 좀 보태드리고 싶은 심정이네요.”

“말만이라도 고맙군요.”

“아, 그런데……. 아까 들어보니까, 평소에 직원들이랑 술자리를 많이 하시나 봐요? 설마 일은 안 하시고, 일주일 내내…….”

“그 정도는 아니고. 그게 내 꿈이긴 하지만.”

“크크큭.”

“가끔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한두 잔 하는 정도?”

“예, 예. 한두 잔이라고요. 믿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평소 술자리에선 뭘 드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했잖소? 껍데기나 삼겹살. 요즘 말로 최애요, 최애. 나만 그런가?”

누가 시킨 건지, 아니면 저절로 흥이 난 건지 모르겠지만, 방청객들이 일제히 외쳤다.

“아-뇨!”

누가 보면 방청석을 세원 시민들로만 채웠는지 알겠다.

“그럼, 점심때는 주로 뭘 드시는지?”

내가 묻자, 명제준 시장이 빙글빙글 웃는다.

“내가 예전에 공장 다닐 때 말이오, 점심시간이라는 게 딱히 없었다오. 정해진 시간이야 있었지만, 일이라는 게 그렇잖소? 대기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기름값이 얼마인데, 제시간에 밥 한 끼 먹자고 기계를 멈춰? 그땐 그런 시절이었소. 그러다 보니, 가리는 게 있겠소? 한참 굶었다가 때 지난 식사를 하는데, 뭔들 맛이 없겠냐고.”

허허거리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윗세대들이 어떤 시절을 보내고 여기까지 왔는지 느껴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방청객들을 비롯해 스튜디오 내부가 어느 순간부터 숙연해져 있었다. 난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카메라 밖으로 물러나 손짓을 해 보였다. 본격적인 요리에 앞서서, 신현정 피디에게 신호를 준 거였다. 그러면서 명제준 시장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시장님. 오늘 분명 이곳에서 얻어가시는 게 있을 겁니다. 다만……. 그만큼 잃는 것도 있으시겠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저보다 한참은 더 많이 사셨으니 알고 계실 테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저라면…… 아니, 시장님이 한 사람의 아버지시라면, 분명 잃는 것 따윈 아쉬워하지 않고 그 손을 잡으시리라 믿습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하는 혈육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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