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얻는 게 있으면……. (2)2021.06.04.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이 쉬울 리가 만무하다. 더욱이 피를 이은 아들과 그 피를 이어준 아버지 간에 연을 끊네 마네 하며 싸운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다. 하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었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젠장! 내가 해결사냐고.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겉으로는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중이다.
“혹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현재 명제준 시장님은 겉으로 보기엔 여야 양당에서 입당을 청하고 있는 만큼 양손에 떡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나레이션이 알려준 정보와 함께 그간 인터넷을 탈탈 털어서 머릿속에 쑤셔 넣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명제준 시장의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듯 말해주었다. 그게 도움이 된 걸까? 명석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충 감이 온다. 부자간에 싸움이 왜 벌어졌는지. 난 그를 가만히 보다가 불쑥 물었다.
“군대 안 다녀오셨죠? 아, 이 경우엔 면제라고 해야 하나요?”
움찔거리는 그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상황은 좀 다르긴 하지만, 저 역시 면제입니다.”
“아!”
“아뇨, 아뇨.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전 경우가 다릅니다. 두 분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니까요.”
“……죄, 죄송합니다.”
나참, 이게 왜 댁이 죄송할 일이냐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얘기가 좀 옆길로 샜는데……. 두 분이 왜 다투셨는지는 모릅니다.”
어? 하는 눈빛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겠지. 어떻게 알긴. 나레이션이 가르쳐주었지.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본들 믿지도 않을 테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보실 건 없고요. 오히려 전 부럽네요. 그래도 싸울 수라도 있으니.”
“예?”
“그렇잖아요? 어떻게 면제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다음이죠.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솔직히 창피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하고 입대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요, 이게 변명거리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욕한다면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분들이라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군대에 간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요는 그래요. 군대 문제는 현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느냐’인 거예요.”
한마디로 면제 받은 게 그렇게 창피하다면, 네 발로 군대에 가라는 말이다. 뭐 이렇게 말한들, 얼마나 통할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역시도 한때는 입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결국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런 류의 얘기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들었다면 정말이지 거품 물고 달려들 만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선택이지만, 누군가에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래도 이게 최선이다. 사람 팔자는 부모가 반이라고 했다.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현실을 외면할 생각 또한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게 될 테니. 내 얘기에 한참 동안이나 상념에 잠겨 있는 명석호를 보다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얘기했다.
“저라면요. 싸우러라도 집에서 얼굴 보고 하겠어요. 화나면 소리 지르고, 불만이 있으면 따지면 되죠. 어쩌면 부모님들이 그 모습에 실망하실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정도 어리광쯤이야 하고 받아주실 수도 있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그 자체가 이미 불효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집을 뛰쳐나오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저한테 부모님이 계신다면 전…… 분명 그렇게 할 겁니다.”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 명석호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런 채로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전…… 창피했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아닌 제가요. 남들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혜택을 누려왔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하기만 저 자신이 용서가 안 됐어요. 그러면서도 겁도 났어요. 누군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 어쩌지? 어느 날 갑자기 뉴스에 내 이름이 올라오면 어떻게 할까? 학교 친구들이 내가 얼마나 비겁한 놈인지 알면……. 예, 전…… 겁쟁이예요. 그래서…… 그래서…… 아빠가 미웠어요. 근데요, 이미 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아빠는 절 사랑한 죄밖에 없다는 걸요. 진짜 문제는 저한테 있다는 것도요.”
한껏 일그러진 그의 얼굴 위로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갑시다. 가서, 풀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끊긴 매듭은 이어본들 결국 끊기게 되어 있지만, 묶인 매듭은 풀면 그만이라고.”
“…….”
“혈육은요……. 부모님께선…… 우리가 늦었다고 후회할 때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을 앙다문 채 눈물범벅이 된 명석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예. 지금 출발합니다.
“조심해서 오세요.”
- 걱정 마세요. 아, 한데…… 시장님은?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그런 염려는 하지 말고요.”
전화를 끊고 나서 신현정 PD는 돌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일을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던 것이다. 이래서 욕심이 과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있나 보다. 방송이 나간 지 벌써 4회차. 겨우 한 달 만에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였을 거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확실하게 굳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예능 프로의 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SBC 간판 피디 노경환을 이겼다는 마음이 그녀를 한껏 고무시켰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정치인이라지만 그래도 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명제준 세원시장을 게스트로 섭외하면, 노경환 피디가 연출하고 있는 ‘혼저왕 먹읍서’를 확실히 따돌리고 금요일 황금시간대 예능 방송으로서 1위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정한 일이 이렇게까지 부담스럽게 다가올 줄이야. 조금 더 천천히 가더라도 안전하게 가야 했던 걸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일은 벌어졌고, 지금에 와서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무엇보다도 지금 저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명제준 시장더러 촬영이 취소되었으니 돌아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뿐만 아니라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서진영이 명제준 시장의 뒷조사까지 하고, 또 명석호라는 아들을 데려온다고 하는 마당에 무슨…….
“후우!”
숨을 크게 몰아쉰 후,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연락이 와서요.”
“괜찮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신현정 피디는 자신의 사무실을 안방처럼 차지하고 앉아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명제준 세원시장을 바라보았다.
육중하다곤 말하기 힘들어도 꽤나 거구의 몸집을 자랑하는 중년 남자의 얼굴엔 시종일관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며칠 전에 미리 언질해준 촬영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긴커녕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은, 그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장면이랄 수 있다.
“무료하시면 잠시 나갔다 오셔도 됩니다만.”
“아닙니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요즘은 한번 움직이는 것도 힘에 부쳐서요. 것보다, 서진영이라고 했던가? 그 요리사 말이오. 그래서 그 친구가 무슨 일이 있어서 늦는다 했지요?”
“오다가 사고가 난 모양이에요. 정확히 어떤 사고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두고 올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호오. TV로 볼 때도 느끼긴 했는데, 정말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가 보군.”
“예. 서 셰프가 좀 그런 편이죠.”
“요즘은 세상이 워낙 각박해서 그런지, 젊은이들 중에 그런 친구가 흔치는 않던데……. 내 젊을 때를 보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좀 쓰입니다. 대개 그런 친구들은 감당할 수 없는 벽을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법이거든. 적당히 비겁하고 또 적당히 두려워해야 견뎌낼 수 있는 게 세상살이라서…….”
자기 얘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오지랖인지는 몰라도 신현정 PD는 명제준 세원시장의 맞은편에 앉아 줄곧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말동무를 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조강훈 FD가 들어와 알려주고서야, 신현정 PD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촬영 준비가 됐다는군요.”
“어, 그래요? 갑시다, 그럼.”
명제준 세원시장이 자신의 수행비서를 앞세워 방을 나설 때, 신현정 PD는 눈짓으로 조강훈 FD에게 물었다.
‘서 셰프 상태는?’
‘괜찮은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출연진의 몸 상태였다. 다른 건 어떻게든 바꾸고 맞춰나갈 수 있지만, 서진영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촬영은 물 건너가고, 앞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도 적잖은 어려움이 있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이하연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서진영만 괜찮다면…….’
만사 오케이다. 더구나 그가 말한 대로만 된다면, 이번 편도 적잖은 파장을 불러올 거다. 그것도 그녀가 걱정하는 정치적 이슈가 아닌, 부자간의 화해라는 주제로. *** 똑똑. 노크 소리가 유난히 묵직하다. 겨우 문을 두들기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절제된 동작이란 얘기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낯익은 남자다. 아니, 너무 오랫동안 봐와서 그저 얼굴이 익숙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앉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장동일 상무. 그가 소파에 앉자, 강 회장은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그러곤 잠시 그를 바라본다. 작달막한 체구에 희끗희끗한 머리칼. 강단 있는 얼굴이지만 평소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자신을 감출 줄도 아는 이다.
“자네가 내 곁을 지킨 지 얼마나 됐지?”
“중동의 현장에서 회장님을 처음 뵀지요.”
“그랬지.”
강 회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놋숟가락 하나도 귀하던 시절. 쌀 한 줌이면 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걷던 그 시절에 그들은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구어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 경제 집단으로. 이를 사람들은 재벌이라 부른다. 그것이 비록 경외라는 단어보단 멸시라는 단어로 불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두 사람은 알고 있으니까.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피와 땀으로 만들어온 그 길을 누가 알까. 그 길 위에서 장동일은 늘 그의 옆에 있었다.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지?”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지. 고마운 일이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한테는.”
“전 아직 그렇게까진…….”
“자네도 처음 봤을 때보다는 늙었어.”
“예. 회장님께서 그렇다고 한다면야, 그런 거겠지요.”
강 회장이 슬며시 웃는다. 누군가 보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감히 삼한그룹의 총수 강 회장 앞에서 스스럼없이 농지거리를 하고, 이를 들은 당사자는 또 웃기까지 하는 진풍경. 하지만 이들에게선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중동의 사막에서 모래바람과 함께 식은 밥을 씹으며 혈투 아닌 혈투를 벌여온 그들에게는.
“다행이야. 녀석의 옆에 자네라도 있어서.”
“저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 친구가 열일하는 중이죠.”
“그 녀석? 아, 그 친구. 그래. 괜찮더군.”
“주방에서 칼이나 쓰기엔 아까운 친구죠. 웃긴 건 그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는 겁니다만.”
“그래 보이더군.”
“예. 주제를 몰라도 문제지만, 주제를 너무 잘 알아도 문제인 게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도 옆에 오래 두고 쓰기엔 전자가 낫겠지.”
“그래서 놔둡니다. 형식이도 이젠 곁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흠, 곁이라…….”
흔히들 측근이라고 일컫는 이들. 무슨 얘기든 할 수 있고, 어떤 모습도 보일 수 있는 최측근. 오른팔 왼팔 따위로 경박하게 말하곤 하지만, 실상은 막강한 실권을 가진 실무 책임자다. 문제는 그럴 만한 이가 손에 꼽는다는 점이었고.
“그만큼 녀석이 그 친구를 믿는다는 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