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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얻는 게 있으면……. (1) (105/204)

#105. 얻는 게 있으면……. (1)2021.06.02.

출근과 동시에 시작한 현황 보고와 함께 결재를 거의 끝내가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핸드폰에 저장된 수백 개의 전화번호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강윤식은 기대하는 얼굴이 되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윤식입니다. 말씀하세요.”

- 아, 실장님.

최진철 국장의 음성은 살짝 들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감이 왔다. 강윤식의 입가에 미소 한줄기가 스쳐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였다.

- 얘기하신 대로 엘라드 컨츄리 클럽에 자리를 마련하고, 김호준 사장에게 말해서 애들 준비시키고…….

“이봐요, 최진철 국장. 제가 지금 회의를 들어가 봐야 해요. 될 수 있으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어떻게 됐나요?”

- 계획대로 됐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만나는 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확실합니까?”

- 예. 확실합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 걱정 마십시오. 안 오면 모를까, 오기만 하면 저희 생각대로 일이 진행될 겁니다. 명제준 그 사람, 보기보다 야망이 더 크거든요.

“수고하셨습니다.”

- 아닙니다. 이제 시작인데요.

“더 할 말 없으면, 바빠서 먼저 끊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강윤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고는 간략하게.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부리면 될 일이다. 따지고 보면 협잡이나 다름없는, 어떻게 생각해도 당당하기 힘든 일을 시키면서 말이 길어져 봐야 위엄만 상할 뿐. 자칫하면 틈을 줄 수 있다. 서로 간의 위치를 매 순간마다 확실히 알려주지 않으면 언제 물려고 들지 알 수 없는 일. 그런 황당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맺고 끊는 걸 확실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두려움이 유지되고,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며 자신이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곳에 그가 있다고 여기게 될 테니까. 강윤식은 간만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비서들 호출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사내 하나가 들어오자,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문을 잠갔다. 그제야 강윤식은 나직하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명제준, 최진철, 김호준 이 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시간대별로 알아내서 보고해.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 엘라드 컨츄리 클럽에서 세 사람이 만날 예정이니까 미리 세팅 좀 해놓고.”

“알겠습니다.”

“나가봐.”

남자가 나가고 난 뒤, 강윤식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날 조롱해? 버러지 같은 놈들. 숨도 못 쉬게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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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현정 피디와 전화를 끊고 나서도 30분 정도가 더 지난 후에야 택시는 노량진에 도착했다.

“수고하셨어요.”

만 원짜리 두 장을 주면서 덧붙였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누구처럼 팁다운 팁을 팍팍 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목적지를 바꿨네 마네 하는 불만은 더 이상 없을 터다.

“감사합니다.”

운전기사는 흡족한 얼굴로 웃어 보이곤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난 돌아섰다. 그러곤 나레이션이 네비게이션처럼 알려준 지리를 짚어가며 목적한 건물을 찾아 나섰다. 고시원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살았던 덕분에 헤매거나 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한양고시원. 한눈에도 허름해 보이는 낡디낡은 4층짜리 건물이 눈앞에 서 있다. 겉이 이러할진대 안이야 안 봐도 뻔하다. 백이면 백 판자로 가벽을 세운 2평 남짓한 쪽방들이 벌집처럼 층층이 박혀 있겠지. 절로 혀가 차진다. 명색이 세원시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작자가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할 테지. 고개를 내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이건 생각보다 더하네. 계단이며 난간이며 더러운 건 둘째치고 낡아도 너무 낡았다. 조금만 힘이 주면 부서져 버릴 듯 손을 짚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난간을 보면서 부지런히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올라 복도에 서니 다시 한숨이 나오려 한다. 이건 뭐……. 아주 오래전 지방에서 한창 노가다를 뛸 때 묵었던 여인숙이 생각날 판이다. 복도는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비켜서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전기세를 아끼려는지 불까지 꺼져 있어서 어둡고 습한 느낌이었다. 문짝은 또 어떤가.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은 발로 뻥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나가떨어지거나 구멍이 뚫려버릴 것만 같다. 아무튼, 여기란 말이지. 303. 난 칠이 다 벗겨진 숫자판을 바라보다가 노크했다. 혹시 안 열어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곧바로 반응이 왔다.

“누구세요?”

“아, 서진영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해서요.”

좀 더 그럴듯하게 말을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신뢰. 처음부터 거짓부렁으로 접근하면, 그 끝 또한 진실될 수 없기에.

“저 천주교예요.”

흐음, 종교단체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잠시면 됩니다. 방송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판자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손잡이 하나 돌리는 것뿐임에도 꽤 요란한 소리를 울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예상했던 것보다 깔끔한 입성이었다. 심지어 상의로 걸치고 있는 티쳐츠도 구겨진 데가 없다. 머리칼 역시 단정하게 빗어 내리고 있었고, 수염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어떻게 봐도 반듯한 인상이었다. 내가 노량진에서 살 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슬쩍 들여다본 방 안은 예상대로 비좁고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가재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눈앞의 청년이 지닌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방송이라고 하셨나요?”

“예. 뉴스 프로그램 같은 건 아니고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아,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아는구나. 이럼 얘기가 편하지.

“괜찮으시면 안에 들어가서……. 그러지 마시고, 나가서 얘기하시죠. 식사는 하셨나요?”

“…….”

누구나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터다. 돈이 없거나, 있어도 아침 식사를 걸러야 할 정도로 아껴야 한다는 거겠지.

“나가시죠.”

“……예.”

그를 데리고 나오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반듯하고 부드러운 청년이란 건 알겠는데, 그게 군말 없이 날 따라올 이유는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밝혀졌다.

“저기…….”

“……?”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 저…….”

“편하게 말씀하세요.”

“페이슬리 박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나요?”

이거구나. 오다가다 본 게 아니라, 제대로 본 거 같군. 그러니까, 날 신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출연한 방송을 신뢰한다는 것. 그게 그거 같지만, 전혀 다르다. 뭐, 어느 쪽이 되었든 나로서는 반길 일이다.

“예고편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만나긴 만나죠.”

눈을 반짝이는 명석호를 보며 속으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스물세 살이라고 했던가? 딱 그 나잇대의 청년이 가지고 있을 순수함이 느껴진다.

“그다음은 저로서도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의 얼굴에 스쳐 가는 실망감.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짐작하시겠지만, 그게 룰이거든요. 아시죠? 비밀엄수 조약.”

“아, 예…….”

“자, 아직 식전이라고 하셨으니, 어디 가서 따끈한 순댓국이라도 한 그릇 하시죠. 아, 혹시 안 드시는 건…….”

“아뇨.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가시죠. 이 부근에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노량진에 살았던 경험이 이렇게 도움을 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 방송을 미루고 온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명석호를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이 청년을 설득하지 않는 한 오늘의 방송은 하나 마나니까. 뭐, 시청자들이야 즐겁게 봐줄는지 몰라도 미션은 실패다. 어떻게 해서든 명석호를 방송국으로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문제는 그걸 어찌 이룰 것인가인데……. 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괜스레 미사여구나 늘어놓으면서 그를 현혹해 농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요. 어떻게, 드실 만하셨어요?”

“괜찮네요.”

“그럼 이제…… 밥도 먹었겠다, 커피 한 잔 어때요?”

“커피요?”

“요 앞에 보니까 커피숍 있던데, 그리로 가시죠.”

오면서 봐둔 카페였다. 길목 어귀에 있었는데,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은 곳이었다. 딸랑.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위쪽에 달아 매둔 황동종이 맑은소리를 울린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선 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소리를 들은 직원이 이쪽으로 시선들을 던지는 게 느껴진다. 카운터로 가며 물었다.

“뭐 드실래요?”

“전 아메리카노면 됩니다.”

“아이스?”

“예.”

주문 후 자리에 가서 앉아 있으니 잠시 뒤 진동벨이 울린다.

“아, 제가 가져올게요.”

내가 일어나려는데, 명석호가 먼저 일어나더니 말릴 틈도 없이 가서 쟁반째 커피를 들고 왔다. 그러곤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빨대를 통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켜는데……. 표정이 확 펴지며 입가에 미소가 걸치고 있다. 쯧, 그러니까 집은 왜 나와서……. 그 나이 먹도록 몰랐단 말인가? 집 나오면 고생이란 걸. 부모한테 개기더라도 집에서 개기면 될 일을, 왜 밖으로 기어 나와 고생을 자초하는 건지. 말투나 행동을 봐서 그리 모진 성격도 아닌 듯하구먼.

“궁금하시죠? 제가 찾아온 이유?”

그가 한 잔의 커피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물은 질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든다. 하긴, 뜬금없이 찾아왔으니 궁금하기도 할 테지. 대답은 없지만, 날 바라보는 그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라는 프로에 출연 중입니다.”

“예. 봤습니다.”

“다음 주에 페이슬리 박 편이 끝나고 나면, 다음 게스트로 예정된 사람이…….”

“…….”

“명제준 세원시장님이십니다.”

“……!”

명석호가 한없이 커진 눈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흔들리는 게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사실 저희도 많이 망설이긴 했습니다.”

화를 내거나 인상이라도 찌푸릴 만한데, 그저 말없이 내 얘기를 듣고 있는 명석호. 그의 성정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담담하다는 건 아니다. 이미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으니까.

“아시다시피 정치 인사를 방송프로에, 그것도 시사가 아닌 쇼 프로에 가까운 프로그램에 출연시킨다는 건 저희로서도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제 얘기 이해되십니까?”

“……예.”

굳이 그 까닭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미 정치인의 자식으로서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십 년도 넘는 세월을 보내온 사람이라 그런가, 정치인이 가지는 힘과 함께 그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나야 편하지. 슬슬 이쯤에서 결착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얘기는 말을 늘이면 늘일수록 상대방으로 하여금 딴생각만 하게 만들 뿐일 테니. 난 슬그머니 상체를 세워서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앞쪽으로 향하며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런 가운데,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러곤 명석호의 눈을 들여다보듯 쳐다본다. 그런 채로 천천히 말했다. 서두르지 않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아마…… 아니, 틀림없이 석호 씨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뒤늦게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에게 던졌다. 별거 아니란 듯이.

“저희 프로그램에 출연, 부탁드립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을 치뜨고 살짝 입까지 벌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애잔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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