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숨은그림찾기 (3) (104/204)

#104. 숨은그림찾기 (3)2021.05.30.

“아!”

염려 가득한 그 음성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발설할 순 없다. 그게 룰이니까. 본방이 나가기 전까진 예고편에서 나온 장면 이상은 절대로 외부에 말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만일에 하나라도 본방 내용이 새어나가 SNS라도 탄다면, 끝까지 추적해서 말을 흘린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신현정 피디의 엄중한 경고가 있었던 것이다. 뭐, 그게 아니라도 그 정도로 무책임하지도 않았고, 원래도 그리 입이 가벼운 편은 아니었지만.

“죄, 죄송합니다.”

“……일해라.”

여전히 흐트러진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는 김진호 셰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명제준 세원시장은 평소와 달리 조금 일찍 시장실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모임이나 행사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퇴근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오늘 오후 방송 촬영이 있었던 것이다.

“가지.”

측근들을 앞세우고 시장실을 빠져나온 그가 정문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수행비서가 차 문을 열어준다. 명제준 세원시장이 차에 오르기 전 측근들이 따라붙으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뭐 큰일이라고. 번잡스러우니까, 한 명만 따라오면 돼.”

측근들은 소심한 공무원답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들이었지만, 명제준 시장은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이곳 세원시청에서만은 그의 말이 곧 법이기 때문에, 시의원들이 나서지 않는 한은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가 올라타자마자, 나직한 엔진음과 함께 차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린다고 했지?”

“한 시간 조금 더 걸립니다.”

“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그런가?”

“그나마 지금이라서 그 정도입니다.”

퇴근시간대는 두 배도 더 걸린다는 얘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이미 명제준 시장은 자는지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부르르르. 진동 소리가 들린다. 부르르르. 받지 않자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음. 명제준 시장이 천천히 눈을 뜨곤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계속해서 떨어대고 있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그가 화면에 떠오른 번호를 확인해본다. 모르는 번호는 아니다. 그렇다고 반갑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일 년에 두세 번이나 연락할까 말까 한 사람이었다. 물론 외면할 정도로 가벼운 인물도 아니었고. 그와 같은 정치인에게 언론인은 갑도 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SBC 국장은 그런 존재였다.

“오랜만이군요. 최 국장님.”

- 아, 시장님. 그동안 건강하셨죠?

여전히 느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최진철 국장의 얼굴이 연상되어 절로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그걸 확인할 방도가 없을 테니, 명제준 시장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마음껏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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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챙겨가면서 시정을 어떻게 하겠소. 그나마 제 몸처럼 챙겨주는 마누라가 있어서 버티는 거지.”

- 하하, 부럽네요. 저희 안사람은 호주에 가 있어서……. 아, 이런 말 하려니 갑자기 확 다운되네요.

“뭐, 좋지도 않은 얘기는 그쯤 해두고. 무슨 일입니까? 그간 연락도 없다가?”

- 여전하시네요. 하긴 대쪽같은 그 성품 어디 가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계속 농이나 지껄일 요량이면 그만 끊읍시다.”

- 아, 별건 아니고요. 괜찮으시면 주말에 필드 한번 나가시죠?

“골프?”

갑작스러운 제안에 명제준 시장은 미간을 구겼다. 별달리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황금 같은 주말에 만나 한가로이 공놀이나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눈을 가늘게 뜨고 최진철 국장의 속내를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저쪽에서 먼저 속을 드러낸다.

- 그간 너무 격조했다는 생각도 들고, 소개시켜드릴 분도 있거든요.

소개라……. 청탁인가? 의심부터 드는 명제준 시장. 그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

“글쎄요. 내가 아무나 만날 처지가 못 돼서.”

- 아무나라니요. 설마, 제가 시장님 곤란하게 하겠습니까? 실은 제 대학교 동기 중에 한 명이 이번에 동선일보사 부사장 자리에 올랐는데, 지난번 술자리에서 시장님을 안다고 했더니 한번 뵐 수 없겠냐고 하더라구요.

“음, 그 친구…… 그분이 나를 왜?”

- 이정일이라고, 동선일보 사주의 조카 되는 사람인데요. 정치적 성향이 보수 중에서도 진성이거든요. 한데, 요즘 정치인들 죄다 마음에 안 든다고……. 아시지 않습니까? 여당 쪽에서도 지난 대선 이후로 표가 갈리면서 계파까지 나뉜 거.

“그래서요?”

- 하하하. 뭐긴 뭐겠습니까? 시장님 팬이란 얘기죠.

솔직히 말해서 이게 뭔 개소린가 싶다. 국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거대 신문사 부사장이 팬? 개가 웃을 일이다. 아무리 요즘 인터넷 뉴스네 SNS네 해서 영향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어지간한 재벌이나 정치인보다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언론 아닌가. 그나마 재벌 쪽이야 광고주이기도 하니 그냥저냥 잘 지내는 편이지만, 정치인과는 상극이나 다름없는 게 그 언론이다. 딱 까놓고 말해서 신문사에 밉보였다간 골로 가는 게 정치인이란 얘기. 정치를 하는 입장에선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최선이었다. 반면 언론인들의 눈에는 정치인들이 뜯어먹기 좋은 존재, 즉 밥이었고. 한데 무슨.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 아, 김호준 사장 아시죠?

“HJ 엔터 말이오?”

- 예. 시장님 얘기를 하니까, 그 친구도 온다고 하더군요.

“흠, 그래요?”

김호준이 온다고 하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한 성장세를 이룬 연예기획사로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는 못 들어가도 한 손에는 들어가는, 제법 큰 회사 대표가 바로 김호준이었다. 정치인으로선 친해져서 나쁠 것 없는 그런 부류. 뭐, 그거야 그렇다 쳐도.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뭘까 고민하던 명제준 시장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작년부터 돌기 시작한 소문. 모 회사가 세원시에 영화 세트장을 만들고 싶어서 한다는 얘기였다. 그 회사가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문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라, 누가 들으면 시청 주도의 사업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사실 명제준 시장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시의회에서 끌어온 예산도 이 해가 가기 전에 써야 하는데, 이왕이면 자신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데 쓰인다면 그거야말로 윈윈인 셈이니까. 물론 돈이 한두 푼 들어가진 않겠지만, 그거야 정 안되면 지방채라도 발행하면 그만일 테니. 그보단 명분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명분은 어디서 제안하는가가 중요했다. 그래야 시민단체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얘기를 듣고 내색은 안 했어도 은근히 마음속으론 기대하고 있었지만……. 여태까지 아무런 입질이 없어서,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건가 하고 생각했더랬다. 한데,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 대충 알 것 같다.

‘이것 봐라?’

픽하고 웃고 말았다. 고민을 마친 명제준 시장이 승낙한 건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럽시다. 간만에 바람이나 좀 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예전이라면 주말에 나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겠지만, 어차피 그날도 와이프는 눈뜨자마자 나가서 밤이나 돼야 들어올 테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 아이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뵙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기분이 좋은지 한차례 웃은 최진철 국장은 약속 시각과 장소를 얘기하곤 전화를 끊었다.

“김호준이 움직인다?”

돌아가는 사정은 대략 짐작이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합이 이상하다. 김호준이 움직이는데, 어째서 동선일보가 끼어드는 거지? 골프장에 온다는 놈이 이정일이라고 했던가? 명제준 시장의 눈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핸드폰을 들어 시장실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날세. 아, 별건 아니고. 김호준이 알지? 그렇지. HJ 엔터. 그 친구에 대해서 좀 알아봐. 그리고 이번에 동선일보 부사장 자리 꿰찬 놈도 좀 알아보고.”

지시를 내리는 그의 표정에 어느새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 촬영도 벌써 세 번째인데, 이상하게 익숙해지질 않는다. 긴장이 되는 건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지는 건 그렇다 치고, 자꾸만 입안이 마른다.

“쯧, 그러니까 왜 정치인을 섭외해가지고.”

혀를 찰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선 종교랑 정치와 엮여서 좋은 꼴 보기 힘든 법인데. 진짜 입 조심해야지. 나레이션의 미션도 중요하지만, 방송에서 괜스레 정치색이라도 드러냈다가는 비단 나 하나만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을 테니까. 자칫하면 신현정 피디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당연하고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될 위험성도 있다. 그만큼 예민한 게 정치 문제였다.

“다들 애들도 아닌데, 이 정도는 알고들 있겠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다. 마음을 다잡으며 택시를 불렀다. 그러곤 택시가 오는 동안, 진짜 차라도 하나 사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어,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슬슬 들려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왜냐? 사실 그동안 나레이션의 미션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방치해둔 상태거든. - 명제준 세원시장은 요즘 일에만 매달리는 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집에 가봐야 가족도 없고 혼자서 맥주나 마시며 TV를 보다가 잠들기 일쑤기 때문이다. 헐. 황당하네. 우리 세원시장님께서 밤마다 고독을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씩 하시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와, 진짜. 이젠 별걸로 다 사람 압박하고 있네. 그러니까 뭐야? 명제준 시장이 외롭게 지내는 게 다 내 탓이다? 후우, 그래. 인정한다. 미션을 해결하긴커녕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못 잡았다. 하지만, 솔직히 누가 온들 그게 쉽겠냐고? 아버지랑 싸우고 집 나간 아들이 어디에 짱박혀 있는 줄 알고……. - 명석호는 지금 노량진 고시촌에 머물고 있다.

“……!”

멍해진다. AI냐? 무슨 맞춤형 서비스도 아니고. 무능력하니까, 도와주겠다? 하아……. 다 좋다. 근데, 좀 너무한 거 아냐? 알려주려면 일찍 좀 알려주든가. 오늘이 촬영일이라고요, 촬영일. 게다가 지금 난 방송국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부른 참이고. 그걸 빤히 알 텐데, 이제 와서 명제준 세원시장의 아드님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건 심한 거 아니냐고? 미치겠네.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어쩐다? - 명석호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한양고시원이다. 주소는……. 예, 예. 그렇게까지 상세히 알려주는데 가야지요. 갑니다, 가. 난 고개를 내젓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택시가 저택 앞으로 뽈뽈거리며 기어오는 게 보인다. 잠시 후,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오르며 말했다.

“노량진으로 가주세요.”

운전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그 눈빛이 ‘예?’하고 되묻는 듯하다. 앱을 이용해 택시를 부르며 적어넣은 목적지와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생각은 없을 테지.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 죄송합니다만, 거기로 좀 가주셨으면 합니다.”

“아, 예.”

다행히 아저씨는 금세 수긍하곤 차를 돌렸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면서 일단 급한 마음에 전화부터 걸었다. 신현정 피디에게로. 대충이나마 상황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씨! 뭐냐고, 이게.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왜 내가 남의 자식을 찾으려고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혀를 차고 있을 때, 통화가 연결됐다.

- 서 셰프님?

“아, 피디님. 저 서진영입니다.”

젠장.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말해버렸다.

“죄송하지만, 촬영 좀 늦출 수 있을까요?”

결국 다 말해야 할 거,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하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에. 잠시 말이 없던 신현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뇨. 전혀요.”

- 그럼……?

“후우……. 실은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나를 태운 택시는 명제준 세원시장의 아들, 명석호가 있다는 노량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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