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숨은그림찾기 (2)2021.05.28.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명제준은 그대로 멈춰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불 꺼진 실내는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적막함이 넘쳐서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이래서 집에 오기가 싫었다. 애꿎은 부하직원들을 붙잡고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신 까닭도 여기에 있었고. 그렇다고 밤새 술만 마시고 있을 수도 없으니, 결국 들어오긴 했지만……. 역시 예상대로다. 벌써 밤 10시인데 아내는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시청을 떠나는 순간 세원시장에서 한 명의 남자로 돌아온 명제준은, 집 안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이곳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도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들을 아낀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마음에는 더 이상 가장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후우!”
어쩌겠는가.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명제준은 한숨과 함께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에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밝혔다. 문명의 이기 덕분에 어둠은 물러갔지만, 적막함은 여전했다. 차게 식은 냉기도 그대로였고.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그러곤 떠올렸다. 1년 전, 아들이 울먹이며 집을 떠나기 전 소리치던 모습을.
“제가 존경하던 아버지는 이제 없는 건가요!”
그때만 생각하면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다. 아비 덕분에 그동안 누리고 산 것은 생각지도 않고,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은……. 아들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파 온다. 명제준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이후로 아내와도 몇 번이나 고성이 오갔더랬다. 그렇게 한번 균열이 벌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심각해져 갔고,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명제준은 조용히 일어나 옷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아내도 아주 갈라설 생각이 없을 테니 오늘 안에 들어오긴 하겠지만, 잠자리는 여기가 아닌 아들 방일 터. 함께 자지 않으니 그냥 자도 뭐라 할 사람도 없는 셈이다. 두통이 느껴지는 가운데서도 술기운 때문인지 잠이 쏟아졌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명제준은 신경 쓰지 않고 밀려드는 수마에 항복해 그대로 잠들었다. *** 시간 참 빠르게 지나간다. 수요일 광고 촬영 후, 목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는데 벌써 금요일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다들 약속이 있어서, 지난번처럼 함께 모여서 볼 수 없었다. 강형식은 신규브랜드 런칭이 코앞이라서 그런지 정신이 없는 듯 보였고, 이하연은 지난번에 중국에서 연 매장들이 돌아가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켜 아예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박유나는 야구 선수인 남편 김주형을 뒷바라지하랴 자신의 가게인 바까지 관리하랴 하나밖에 없는 몸이 부족한 지경이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할까.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형식이 형이 없으니까 좀 허전하긴 하네요.”
류승렬의 얘기에 그만 실소가 나왔다. 동갑인데도 아직까지 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은 나이를 확실히 밝히지 않은 내 탓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해줄까? 아서라. 하고많은 날 중에 오늘은 아니지. 밝히더라도 당사자가 있는 데서 해야 할 듯싶다.
“다들 바쁘니까.”
“뭐, 둘이 이러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이모! 여기 이슬이 한 병 더요.”
손을 번쩍 들고 아주머니를 부른다. 참고로 지금 우리는 방송 한 시간 전부터 저택 근처의 곱창집에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동네 먹자골목 뒷길에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허름한 외관에 비해 안은 꽤 쾌적했다. 음식 맛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TV가 작고 오래된 듯 보였는데, 보는 데는 지장 없으니까 뭐.
“근데, 형.”
“응?”
“형은 가게 안 차려요?”
“가게?”
소주잔을 꺾고는 내려놓으며 되묻자, 녀석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얘기한다.
“그렇잖아요. 형 정도 실력이면 독립하는 게 낫지 않나? 게다 형은 방송까지 출연하니까 얼굴 사진 하나 떡하니 걸면 문전성시를 이룰 텐데, 굳이 왜 월급 받고 일하고 있냐 이거죠.”
피식. 웃고 말았다. 얘가 진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앉았다. 자기 가게? 좋지. 좋은데, 처음 시작할 때만 좋지 잘못하면 말아먹기 십상이다. 그뿐인가? 개업빨로 처음에 매상이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 조금만 손님이 떨어져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소상공인들의 현주소다. 거기다가 돈이라도 빌렸어 봐라. 막말로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고, 밤에 편히 잠잘 생각 따윈 버려야 한다. 그걸 나더러 하라고?
“글쎄다.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은 좀 그렇네.”
“에이, 제가 보기엔 지금이 딱 적기구만. 형 원래 이렇게 소심했어요?”
와, 이 자식 보게. 푹푹 쑤시고 들어오네?
“적기는 개뿔. 술이나 따라.”
“왜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형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대충 목 좋은 곳에 한 오십 평짜리 음식점 하나 내면 박터지겠구만.”
술을 따르면서도 입을 쉬지 않는 류승렬을 보면서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녀석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아직은 아니다. 돈도 부족하고, 실력도 모자란다. 무엇보다도 주방을 떠날 마음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봉 재협상 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테다. 고윤수 주방장님은 말할 것도 없고, 김진호 셰프한테도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눈앞의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 주방을 박차고 나온다면, 아마 얼마 못 가서 난 후회할 테지. 뻔할 뻔 자다. 실력 없이 그저 작은 명성에 기대어 인생을 건 자들의 최후가 어떤지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이 봐왔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난 류승렬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얘기했다.
“핑계일지도 모르고, 요즘 애들 말로 꼰대 같다고 할지 모르겠다만. 한마디만 하마.”
“……?”
“솔직히 없을 땐 돈만 있으면 전부 이룰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막상 통장에 돈이 쌓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
“다들 그렇듯 나도 꿈은 있거든. 한데, 돈 좀 벌어보겠다고 꿈까지 갈아 넣는 게 맞는 건지 어느 날 의심이 되더라고.”
“아우, 뭔 소린지 모르겠네요.”
“별거 아냐.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열심히 하다 보면 돈도 절로 따라온다? 뭐 그런 얘기. 쿡. 말하다 보니 한마디가 넘었네.”
“크크큭.”
한참을 웃던 류승렬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형은 참 희한한 사람이에요.”
“내가? 어디가?”
“어떨 때 보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며 ‘와, 진짜 쩐다!’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때 보면 평범하다 못해 되게 소극적이라고 느껴지거든요. 근데, 이게 또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뭔데?”
“어울려요.”
“응?”
“그런 모습들……. 그러니까, 둘 다 어울린다고요.”
“그래서…… 칭찬인 거지?”
또다시 킥킥대는 류승렬. 녀석이 웃으며 말을 돌린다.
“어? 광고 끝났다! 이제 방송 시작하려나 봐요!”
그 말에 시선을 TV 쪽으로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 방송이 시작하며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4회차. 페이슬리 박의 두 번째 편이 시작되었다.
*** 예상은 하고 있었다. 페이슬리 박이 제면기를 보는 순간부터 보여준 모습은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방송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말 그대로 격렬했다. 방송국 사이트의 댓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보다가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 저도 오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 울컥했어요. - 후, 가슴이 아프더군요. - 난 보다가 더 이상 못 보겠어서 TV 껐는데, 정작 끄고 나니까 너무 궁금해서 1분도 안 되어 다시 켰음. - 그나저나 갓솁 뭐임? 페이슬리 박 반응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담? - 확실합니다. 갓솁은 족집게. - ㅋㅋㅋ 족집게. - 거의 예언가 수준 아님? - 노스트라다무스? - 쯧쯧. 과거 일을 맞추는 건데, 그건 아니지. - 그건 또 그러네. - 아무튼 대박. - 괜히 갓솁이 아니란 거죠. 할아버지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방송이 거의 끝날 즈음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스태프에게 말을 들을 한진석이 페이슬리 박에게 그 얘기를 전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진석이 ‘지금부터 페이슬리 박 양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을 만나러 가겠습니다!’란 멘트를 날린 후, 눈물과 함께 몸을 떨고 있던 페이슬리 박을 데리고 내가 스튜디오를 떠나는 거로 본방은 끝이 났으니까. - 헐. 할아버지 살아계셨다니! - 그럼 지금부터 부산 가는 건가요? - 그렇다고 봐야겠죠. - 와아! 점입가경이네요! - 후우, 또 눈물 흘리게 생겼네. - 그래도 조손이 만나는 모습……. 보고 싶네요. - 할아버진 지금 작은 아들네랑 살고 있는 건가? - 그야 모르죠.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네. 이제라도 만날 수 있으니까. - 나도 할머니 보고 싶다. 신현정 피디는 예고편을 지난주 때와 같이 기가 막히게 편집해놓았고, 반응은 더없이 뜨거웠다. 다급하게 미니버스에 몸을 싣는 페이슬리 박과 출연진들. 그리고 촬영진들까지 함께 태운 미니버스가 출발하고, 화려한 불빛으로 수놓아진 도심을 빠르게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그 후, 미친 듯이 내달리는 버스. 차 안에선 페이슬리 박이 눈물 때문에 퉁퉁 부은 눈으로 손톱을 잘근거리고. 초조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 마지막 장면. 페이슬리 박이 할아버지라는 말을 더듬더듬 내뱉으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이며 예고편이 끝난다. - 와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예고편……. 이거 보려고 본방 보는 거 같은 기분. 나뿐인 거임? - 질소 사면 과자 한 줌 주는 거랑 같은 거? - 다 그런 거 아닌가요? 피규어 모으려고 햄버거 세트 시키는 거잖아요? -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 아, 제발! 두 분 무탈하게 만나셨길. - 그래!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감정이 격해져서 우는 걸 거임. -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막장으로만 가지 말자, 응? 이거 쇼 프로잖아? - 아, 한 주를 또 어떻게 기다리냐? 난리도 아니다. 정말이지 핫해도 너무 핫하달까. 방송국 사이트만이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를 비롯해 SNS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말할 것도 없이 실검에 올랐고. 내 이름과 프로그램명. 그리고 페이슬리 박까지.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방송을 보는 내내 날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류승렬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약과겠지.
“와, 너 진짜……. 그냥 이참에 전직할 생각 없냐?”
준석이 형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것도 농담이라고 하기엔 꽤나 진지할 표정으로 말해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아, 진짜 형까지 왜 그래요. 그거 다 방송국에서 준 자료로…….”
“뻥 치시네. 얀마, 속일 걸 속여라. 5천만 국민이 다 안다. 너한테 신기 있다는 거.”
“……그냥 촬영 전에 조사 쪼금 했을 뿐이에요.”
“크크크.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내 손금은 언제 봐줄래?”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주방 문이 열리며 김진호 셰프가 들어온다. 화들짝 놀란 준석이 형과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만나냐?”
갑자기 김진호 셰프가 묻고 있다. 조금 놀라서 시선을 돌려보니, 여전히 차분하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모습으로 셰프께선 요리를 하고 계신다. 등을 돌린 채로.
“그게 무슨……?”
대답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준석이 형을 바라보니, 눈알을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나만 들은 건 아닌 듯한데…….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김진호 셰프의 목소리.
“페이슬리 박, 할아버지 건강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