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달려라 갓솁! (3)2021.05.23.
어? 지금 나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어안이 벙벙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땅! 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멍해진 얼굴로 그녀…… 김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쓰게 웃었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이렇게 대놓고 여자가 나한테 대시하는 건. 아마 초딩 때 애들끼리 너 나 좋아해? 나도 너 좋아하는데! 식의 유치한 고백 이후로 처음인 거 같다. 그건 그렇고. 거참. 저렇게 태연한 태도로, 그것도 당당하게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재주다. 하아, 이하연도 그렇고……. 요새 들어 왜 이러지? 혹시 나한테 막 여자들 끌어들이는 페로몬 같은 게 흘러나오고 그러는 건가?
“……나 그렇게 매력적인 놈이 아닌데?”
하도 황당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지껄였는데, 말해놓고 흠칫했다. 미쳤구나, 서진영!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서연과 눈이 마주쳐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였다.
“그렇게 생각해요?”
음……. 저렇게 물어보니까 뭔가 나한테 있는 것도 같고.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설사 매력적으로, 혹은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레이션 덕택인 거니까.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놓고 말했다.
“나보다 돈도 많고 잘생기고…… 또, 능력 좋은 남자 많잖아요?”
그런데 왜? 라는 질문이 생략돼 있었지만, 그녀는 알아들은 눈치다. 다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날 더욱더 당황케 만든다.
“잘생긴 건 모르겠고, 그 정도 능력이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 돈이야 내가 많으니까 상관없고. 날 설레게 만들었다면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아무튼, 진영 씨는 매력적인 남자예요.”
와! 듣는 내가 다 창피할 지경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내 얼굴은 벌게져 있을 듯. 주위 온도보다 삼사 도는 높게 달아오른 체온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또다시 훅 치고 들어온다.
“나 비싼 여자인데? 이렇게 길거리에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가요, 술 마시러.”
잘하면 내 팔이라도 끌고 갈 기세에 기겁해서 말했다.
“아, 아뇨. 제가 오늘은 좀…….”
“뭐? 바쁘다고?”
“그, 그렇…….”
“이 시간에?”
손목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는 그녀. 긴 생머리가 흘러내리자, 한 손으로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는 김서연을 보고 있자니 절로 침이 넘어간다. 아씨, 저거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나도 내 손목에 차고 있는 낡은 시계를 확인한다. 저녁 8시를 지나 어느새 15분. 그새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쩔쩔매고 있다는 증거겠지. 시간상으로 보자면 일은커녕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술을 마셨어도 1차를 끝내고 2차를 뛸 시간이니 약속 운운하기도 뭐하다. 흠, 바쁘다는 핑계는 좀 그랬나?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술 한잔하는 게 뭐 대수라고. 그냥 촬영 끝나고 그 기념으로 한잔한다고 생각하면 될……. 까똑! 톡이 날아든다. 그것도 연속으로. 까똑! 까똑! 숨 한 번 내쉴 시간에 연거푸 울리고 있는 소리를 들으며 흠칫했다. 이렇게 톡을 보내는 사람은 내 주위에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몰래 고구마 훔쳐먹다가 걸린 사람 같은 얼굴이 되어 톡을 확인했다. 역시나 이하연이다.
- 촬영 끝났어요?
- 하앙! 시간 맞춰서 가려고 했는데.
- 중국 현지에서 문제가 생겼네요.
- 어쩌죠?
- 지금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와서 연락하는 중.
- 가봐야 할 거 같아요.
- 이따 전홯ᅟᅡᆯㄱㅔ요.
나중엔 오타 범벅에 띄어쓰기도 엉망이다. 얼마 급히 자판을 두드렸는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하연의 모습이 그려져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진짜 바쁜가 보네요?”
당연히 바쁜진 않다. 오히려 바쁜 건 내가 아니라 이하연이겠지. 난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좀 부담스럽다고나 할까요. 일로 만나서 사적으로 자리를 갖는다는 게. 관심…… 고맙습니다만,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아까와 달리 마음이 가라앉고, 머릿속도 여유롭다. 그래서일 테다. 김서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오갈 데 없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날 그녀가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였다. 쿨한데? 아쉬운 건 아니지만, 조금 놀랍다. 이하연과는 정반대의 타입인가? 뭐, 아무렴 어떤가. 난 김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 권태홍 감독은 작업실에 도착해 오늘 찍은 것들을 한차례 살펴본 후,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접니다.”
- 안 그래도 궁금해서 전화해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어떻게? 잘 나왔어요?
분명 대일 기획은 C 마트 계열사임에도, 그룹의 총수인 김진숙 회장은 그를 편하게 대하질 않고 있었다. 가끔 말을 놓기도 하지만, 백 마디 중 한두 마디일 뿐이다. 하지만 권태홍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김진숙 회장의 이런 태도는 자신을 예우해서가 아니란 것을. 일종의 선 긋기다. 일을 맡기곤 있지만, 아직까진 자기 사람이 아니란 걸 명백히 보여주는 셈이다. 그걸 알기에 권태홍 감독은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상관을 모셨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쾌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음,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실까? 우리 권 감독님께서?
“흐흐흐. 이번 광고 대박일 거 같습니다.”
- 그래요? 그거 좋은 소식이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권태홍 감독은 씨익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편집해봐야 하겠지만, 장면들이 하나같이 잘빠져서 버릴 게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카레이싱 장면은…….”
잠시 그의 설명이랄까, 감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통화 상대인 김진숙 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관심 있게 듣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해서, 권태홍 감독은 갈수록 신이 나서 떠들었다.
“확실합니다! 이번 광고, 꽤 이슈가 될 겁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호쾌한 웃음소리만큼이나 유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 우리 회장님, 기뻐하시겠네. 수고했어요.
광고가 잘 뽑혔다고 해서 꼭 물건이 잘 팔린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경우엔 다르리라. 권태홍 감독은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전부 서 셰프 덕이죠. 그 친구 오늘 제대로 달렸거든요.”
그래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말투였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권태홍 감독이 또다시 수다가 늘어졌다. 촬영장…… 특히 인제의 서킷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늘어놓았다. 누가 감독 아닐까 봐, 어찌나 상세하고 현실감 있게 얘기하는지 꼭 옆에서 보는 듯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알까? 이미 김진숙 회장은 오늘 하루 서진영이 광고 촬영을 하면서 보여준 모든 걸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보고받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김진숙 회장은 권태홍 감독의 얘기에 때론 감탄하고 또 맞장구를 쳐주며 듣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말했다.
- 역시, 권 감독! 알죠? 내가 권 감독 믿는 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요. 잘해봐요. 아니, 이미 이번 작품 대박 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난 권 감독한테 상으로 뭘 줄까만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건가?
“아이고, 회장님도 참. 아직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아니죠. 나중에 광고 완성되면 그때…….”
- 지갑이 터질 정도로 확실히 챙겨주죠. 아, 그건 그렇고. 다음 작업 말인데……. C 마트 쪽 광고도 그 친구한테 맡겨볼까 하는데, 권 감독 생각은 어때?
김진숙 회장의 물음에 권태홍 감독은 잠시 말을 아끼며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회장님께서 서진영 그 친구한테 너무 큰 기대를 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그 친구…….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뭐랄까 타고 난 거 같다고나 할까. 별거 아닌 것도 그 친구가 하면 사람을 확 잡아끄는 매력……. 아, 이 경우엔 마력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네요. 오늘도 그렇잖습니까? 거기서 직접 운전대를 잡고 서킷을 달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헬멧도 쓰지 않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코너를 돌 때의 표정이란…….”
- 그거 나도 좀 볼 수 있을까?
“아이고.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귀여운 자식일수록 섣부르게 밖으로 내보낼 수야 있나요? 회장님께서도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은 좀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흐흐흐, 제가 확실히 찍어놨으니 나중에 보시면 정말……. 지켜보던 전 등에 소름이 다 돋더군요. 뭐, 아무튼 그렇다는 거고요. 그만큼 스타성이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본 거 같습니다.”
- 그 말은…… C 마트 광고 맡겨도 된다는 거죠?
“충분합니다.”
- 알겠어요. 오늘 얘기 즐거웠어요. 편집 끝나면 바로 연락주고요.
“걱정 마십시오. 완성되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권태홍 감독이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수밖에. 간만에 월척이었으니까. 원래는 이번 광고에서 카레이싱 장면은 거의 끝에만 살짝 집어넣을 예정이었다만. 상황이 바뀌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카레이서도 아닌 일반인이, 그것도 양복 차림에 헬멧도 쓰지 않고 시속 180킬로로 질주하는 장면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롱 테이크. 숏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한 번에 가는 거다. 다른 장면은 몰라도 서진영이 서킷을 달리는 장면만은. 누구도 편집의 힘이네 뭐네 하면서 깎아내릴 수 없는 그런 장면으로 만들어야 할 테다. 거기에 살짝 바뀐 연출로 편집만 제대로 한다면?
“어디 한번 해볼까?”
깍지를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켠 권태홍 감독은,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마법사라도 된 양 빠르고 간결하게 손을 움직이며 능숙하게 기계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핸드폰이 몸살을 앓듯 떨어댄다. 아씨, 누구야? 마음 같아선 받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숙소로 올라가 잠들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아, 씻긴 해야겠지. 잠깐 진짜로 받지 말아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다.
“예, FD님.”
- 서 셰프님! 조강훈입니다!
조강훈 FD였다.
- 혹시 주무시고 계셨나요?
“에이, 설마요. 이제 겨우 9시 조금 넘었는데요.”
- 다행이네요. 오늘 광고 찍으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힘드신데 전화 드린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지금 막 숙소에 도착했어요.”
- 아 그러셨군요.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촬영 스케줄이랑 대본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요는 촬영날짜. 대본이야 사실상 반쯤은 애드립이니까, 한번 읽어보면 될 테고. 그밖에 게스트의 인적사항이 적힌 시트만 확인하면 될 테다. 명제준 세원시장이 워낙 유명인사라 인터넷으로 서핑해도 대충 나오긴 할 테지만, 그래도 방송국에서 준비해준 게 확실할 테지. 숙소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쯤, 짧은 통화는 끝이 났다. 사실상 촬영날짜만 확인하면 되는 거니까. 다음 주 화요일이라……. 생각보다 늦네? 신현정 피디가 요번 주에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나 보지.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노리는 바가 있어서, 혹은 준비할 게 있어서 그렇게 되었든가.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알겠습니다.”
- 예. 그럼 쉬십시오. 촬영 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까보단 한결 또렷해진 의식으로 생각에 잠겼다. 명제준 세원시장이라……. 괜찮을까? 정치인이랑 엮여서 망테크 타는 경우가 꽤 많던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오! 오늘따라 많이도 들려오네. 벌써 세 번째. 최고 기록이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트리플이네. 픽하고 웃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그리고 더 이상 난 웃지 못했다. - 명제준 세원시장에겐 절연하다시피 한 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