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달려라 갓솁! (2) (100/204)

#100. 달려라 갓솁! (2)2021.05.21.

회장실 안이 갑자기 웃음소리에 휩싸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진숙 회장. 그녀가 눈물까지 흘려가며 한참을 웃다가 서서히 그치며 물었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뭘 어쨌다고?”

박 실장은 태연하게 안경을 콧잔등에서 위로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직접 레이싱을 했다더군요.”

“서진영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김진숙 회장이 묻자, 박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덧붙였다.

“그것도 후반부 세 번의 레이스에선 가장 먼저 들어왔다고 합니다.”

“쿱!”

희한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린 김진숙 회장이 이내 입술을 말아 꾹 다물었다.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그런 채로 그녀가 물었다.

“혹시 영상 있어?”

“몇 번째 영상 말씀이십니까?”

저렇게 묻는다는 건, 현장에 파견해둔 이가 레이싱 전체를 찍어 보냈다는 얘기다. 잠시 고민하던 김진숙 회장이 말했다.

“마지막 건 촬영용이라고 했으니, 여섯 번째로 보지.”

그녀의 말에 박 실장이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틀었다. 그때부터 김진숙 회장의 표정이 변했다. 이제까지 웃음으로 일관했다면, 지금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영상이 멈추고 나자 그녀가 물었다.

“분명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예.”

톡톡톡톡. 습관처럼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김진숙 회장이 중얼거렸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긴데……. 멋지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던 그녀가 다시 한번 영상을 틀며 눈을 반짝였다.

  *** 진짜 별일이 다 있다. 손승태라는 사람이 내게 다가왔을 때만 해도 그저 인사 차원이겠거니 했는데. 영입제의였다. 다시 말해 나더러 자기 팀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거절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확실히 경험해 보니 카레이싱이 매력적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도광도 아니고 목숨 내놓고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덕분에 좋은 경험…… 아니 학습이었다. 이 정도면 이제 강형식의 반의 반 정도 실력은 갖춘 게 아닐까? 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사기네. 하기야 타이밍 적절하게, 그것도 실시간으로 누군가 확실하게 지시를 내려준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물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비록 어릴 때이긴 하지만 야구를 한 적이 있고, 그만큼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았기에 가능한 거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나레이션의 지도방식은 대단하다. 아마 카레이싱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나레이션의 힘을 빌린다면 엄청난 속도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나레이션을 단지 정보나 전해주는 거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로선 새로운 발견이랄까. 아무튼, 유익한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나 카레이싱 팀에 들어가는 건 무리지. 아무리 그쪽에서 날 전도유망한 예비 카레이서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렇고. 이제 강형식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익혀야 할 걸 습득한 건가. 이게 나중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운전에 서툴렀던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촬영 들어갑니다!”

스탭 중 한 명이 소리쳤고, 내가 타고 있는 NEW SJ7을 실은 촬영용 레커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 안에 앉아 백미러로 바라보니, 뒤쪽에 촬영용 차가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옆쪽에서도 지미집을 달고 있는 차가 나란히 달리는 중이었고. 그렇게 얼마나 도심을 달렸을까. 한 시간 남짓한 통제시간 동안 몇 번을 거듭해 같은 도로를 달리고 촬영하길 반복한 끝에 무사히 시내 주행 신의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몇 가지 장면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중의 하나가 바로 C 마트에서 장을 보는 장면. 반포에 있는 C 마트의 협조를 얻어 엑스트라까지 동원되었다. 그 장면을 찍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화촬영인가 싶어 다가왔다가 날 알아보았지만, 다행히 촬영을 방해하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촬영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야 했지만. 그조차도 그냥 즐기잔 생각을 하니, 나름 즐거웠다.

“슬슬 끝나가네요.”

마지막 장면까지 확인을 마친 권태홍 감독이 내게 다가오더니 친근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게요. 진짜 하루 만에 전부 찍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에이, 촬영 하루 이틀 하나요? 하하하! 저희 프롭니다, 프로.”

대꾸 없이 웃어 보였다. 그런 날 보며 권태홍 감독 역시 웃고 있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뒤, C 마트 근방에 있는 아파트에서 진행된 촬영. 여기선 직접 운전했다. 도로에서처럼 차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오가는 곳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큼 촬영은 순조로웠다.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내려가 부드럽게 운행해 천천히 주차를 하고선 차 문을 열고 나온다. 그러곤 트렁크에서 장본 식자재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꺼내 들곤 아파트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그걸 타고 올라가 현관 앞에 선후 초인종을 누른다.

- 자기?

여성의 목소리. 당연히 배우다. 물론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건 말건, 나야 역할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나야.”

으으으으. 대사라곤 이게 전부인데, 할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더랬다. 문이 열리고, 카메라는 환하게 웃으며 봉투를 들어 올리는 날 비춘다. 그런 후, 주방을 배경으로 음식을 만드는 한 남자의 미소. 그 행복한 저녁을 카메라가 담는다. 대체 이걸 어떤 식으로 편집할는지는 몰라도, 몇 번의 NG와 박수 속에서 촬영을 끝마쳤다. *** 이하연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쥐처럼 갉아먹는 건 아니고, 살짝살짝 이빨을 가는 수준. 그렇다곤 해도 전에 없던 일인 건 분명하다. 그만큼 불안정하단 건데, 원인은 명료하다.

“끄, 끝났을까?”

일부러 핸드폰을 책상 끝 쪽으로 밀어놓았음에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서진영에 대한 갈증은 그 정도로 심했다. 그건 흡사 흡연자들이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운 지 열 시간이 넘어갈 때 찾아오는 니코틴 부족 현상과 닮아 있었다. 혹은 게임 중독? 그밖에도 비슷한 증상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다른 그 무엇과 비교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그처럼 그리웠다. 예전에 들은 말 중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지금 그녀의 심정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진짜 얼굴을 대면하고 보고 있더라도 보고 싶을 정도인데, 지금처럼 떨어져 있으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손톱을 물어뜯을 정도로 그립다. 혹시 이거 병이 아닐까? 아니면 집착? 아니 아니, 집착이야 그러려나 하지만, 그가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핸드폰으로 눈길을 주는 이하연. 그녀는 결국 지고 말았다. 더 이상은 서류에 쓰인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니와, 지금쯤이면 촬영을 마쳤을 그 남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무려 16시간을 참았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상을 줘도 되잖아? 비록 보지는 못해도, 혹여 촬영에 방해라도 될까 싶어 꾹꾹 눌러 참은 자신이라면 적어도 목소리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성공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잽싸게 들어 올렸다. 그러곤 콧노래를 부르며 전원을 넣곤 또 한 번 치열이 드러날 정도로 웃었다.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놓은 서진영의 사진. 그 사진 속에서 그 남자가 근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웃음에 다시 한번 화답하듯 미소지으며 룰루랄라 즐겨찾기에 저장된 번호를 터치했다. 그러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하연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하필이면……. 그녀가 볼멘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부하직원이 들어선다. 윤 대리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해 당해연도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한 후 지난 5년간 승승장구해온 인재. 남자답다기보단 곱다는 말이 더 어울릴 외모. 부잣집 도련님 같은 얼굴만큼이나 센스도 좋았고 성실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인성도 좋은 편. 사내에서 여직원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하연의 눈에는 전혀 남자로 비치지 않는다. 그저 일하는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도 이쪽은 지시를 내리는 쪽이었고, 저쪽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쪽이었다. 당연히 연심이 생기질 않는다. 그런 점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한 남자가 자리를 잡은 후부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렸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이 자못 사무적일 수밖에. 더욱이 지금처럼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 침범받은 때엔 어조가 좋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죠?”

“상하이 쪽 매장에서 절도사건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별일 아니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별일이다. 적어도 세 시간짜리. 위성통화까지 동원하고 현지 법인의 직원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고 하더라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이상이면 이상이지 줄어들진 않을 터였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그깟 절도…… 누가 훔친 건지는 몰라도 옷값을 대신 물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중국 현지의 법이 그렇고, 그 법대로 공안들을 상대하며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매장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줘 봐요.”

그녀의 요구에 윤 대리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최대한 간략하게 쓰인 종이를 대충 훑어보곤, 그 아래에 자세하게 기술된 서류들을 읽어나가는 이하연의 눈매가 어느새 날카로워져 있었다. *** 촬영이 끝났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 무려 10시간에 가까운 촬영이었다. 와, 진짜 장난 아니다. 토 나올 것 같다고 하면 지금의 내 심정이 이해가 가려나? 언젠가 한진석에게 듣기로 연예인들은 이처럼 하루 종일 촬영하는 게 일상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 대체 어떻게들 견디는지 모르겠다. 사고를 당해야만 PTSD를 겪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내 상태는 그냥 스트레스라고 말하긴 어렵고, 거의 외상 후 스트레스 수준이랄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집까지 갈 생각만으로도 정말이지 까마득하다. 아무래도 택시를 타고 가야 할 듯.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권태홍 감독이 다가왔다.

“진짜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뇨. 감독님께서야말로 고생하셨죠.”

돌아보니, 스탭들이 미소를 보내온다. 생각 같아선 저들을 다 데리고 회식이라도 하고 싶다만. 지금 내 상태가 그럴 상태도 아니었고, 또 저들은 저들대로 바쁘다. 나야 이걸로 촬영이 다 끝났지만, 권태홍 감독을 비롯해 스탭들은 이제부터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일 테니. 편집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한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나중에라도 저들이랑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다들 추운데 고생하셨어요.”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인사까지 마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김서연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하곤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세상일이란 늘 그렇듯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거지.

“서진영 씨?”

“예?”

“바로 들어가실 건가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가면서 이하연에게 전화도 해볼 참이고.

“별다른 일 없으면, 그러려고요.”

대답한 나를 김서연이 빤히 쳐다본다. 뭐지?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러시죠?”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 대신 물어온다.

“술 마실래요?”

“……?”

“…….”

“술……이요?”

내가 되묻자, 그녀가 도도하기만 하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하얗게 재가 되도록.”

1656122412586.jpg

  뭐가 되도록? 귀로는 들었는데, 머리로는 쉽게 접수가 안 돼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기억해냈다. 언젠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들이.

“글쎄요. 저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게 기억나네요. 때론 재가 되도록 태워버려야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법이라고.”

  내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말했었지.

“태우라면서요? 그래야 다시 타오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녀와 난 한 공간에서 자고 있었더랬지. 술이 만땅 취해서. 물론 둘만 있었던 건 아니고, 강형식과 몇 명이 함께 있긴 했지만. 아무튼, 다시 떠올리면 살짝 민망해지는 기억이다. 그나저나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싫어요?”

흠, 싫을 거까진 없지만 피곤한데……. 이미 마음속으론 거절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모나지 않게 얘기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 싫으냐고요.”

응?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를 쳐다보자, 김서연이 말한다. 한데, 말투며 표정이 하도 당당해서 그게 또 놀랍다.

“난 당신한테 관심 많은데.”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훅 들어온다.

“가요, 술 마시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