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제안? (1)2021.05.12.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이하연이었다.
“지금 막 끝났어요.”
자꾸만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혹시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바로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에 픽하고 웃었다. 덕분에 주의가 좀 흐트러졌는지 모른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묻는 얘기를 놓치진 않았다.
“아뇨. 인터뷰 자체가 힘든 건 아니었는데, 조금 지치네요.”
힘든 거나 지친 거나. 말해놓고 보니 그게 그건가 싶기도 한데, 어감상으론 어떤지 몰라도 실제로는 확실히 달라서 한 말이었다. 그걸 이하연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스튜디오 안의 사람들이 사진 촬영을 비롯해 인터뷰 내내 날 바라보던 눈빛들을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하아, 좀 그랬어요. 아뇨, 아뇨. 다들 친절했어요.”
너무 과하게 친절해서 탈이지.
- 그럼 내년 1월에 나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 고생했어요.
물먹은 솜 같던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느낌이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나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한 건가 싶기도 하고. 뭐, 오늘 하루쯤은 이래도 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인터뷰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건 줄 알았으면 절대로 안 했을 거다. 아무튼, 좋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고마워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밥 먹을래요?”
수화기 너머인데도 뭔가 팟! 하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은 힘들겠네요. 곧 있으면 회의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음, 그래요?”
- 예. 진영 씨도 힘드셨을 텐데, 일찍 들어가서……하앙……쉬세요.
아쉬운 목소리. 크크큭.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기다. 지금 이 순간만은 레오파드가 아니라 푸들 같은 느낌이라서. 그것도 잔뜩 기가 죽어 귀가 축 늘어져 있는 그런 느낌.
“알겠어요. 하연 씨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이따가 또 통화해요.”
- 네에.
입도 댓발 나왔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냥 내 망상일 뿐일까? 속으로 키득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개찰구 쪽으로 걸음을 내딛는데…….
“자갸, 저 사람 그 사람 아냐?”
“어? 누구? 아! 맞는 거 같은데?”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힐끔거리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놓고 얘기하고 있는 커플이라서 듣고 싶어 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들어보니 서 셰프 어쩌고 하는 내용들이다. 나참. 수군거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손가락질은 좀 그렇지 않나? 살짝 불쾌해졌지만 무시했다. 남들 시선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방송에 출연한 덕분에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거란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짜 내가 유명인 혹은 연예인이라는 자각 자체가 없으니 그저 내 할 일만 잘하면 그뿐이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술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찰칵! 바로 앞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촬영음이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물어온다.
“저기……. 서진영? 맞죠?”
배낭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난 그 남자에게 ‘남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고 묻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쓰게 웃었다.
“예. 맞습니다.”
“오오! 서진영! 와아! 서진영!”
호들갑이다.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또 한 손으로는 날 가리키며 연신 탄성을 내지르고 있는 남자였다. 주위의 시선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수군거림도 번져간다.
“거봐! 맞다니까!”
“와, 진짜네?”
“사인 받을까?”
“사진이라도 찍어.”
“그럴까?”
“엄마, 저 아저씨……. TV에 나왔던 아저씨 아냐?”
“맞네. 서 셰프.”
“앗! 갓솁이다!”
“진짜? 어머! 진짜!”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거울에 비춰보면 지금쯤 내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을 거다. 어쩐다?
“사인해줘요!”
그때, 눈앞의 남자가 백팩을 내리며 물어온다.
“……주세요.”
남자가 가방에서 꺼내 내민 종이에 대충 사인을 해주었을 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진 찍어도 돼요?”
언제 다가온 건지, 여학생들이 쑥스럽게 묻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걸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그곳에 발을 묶였다가, 전철이 들어오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 노크 소리가 들리고, 명제준 세원시장의 들어오란 얘기에 문이 열렸다.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서른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한데 특이한 것은 눈이 작거나 턱선이 가는 것도 아님에도 인상이 무척 날카롭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눈빛 때문일 터다. 쉴 새 없이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냉정하게 모든 걸 바라보는 그런 눈빛. 그 눈빛을 발하며 남자가 다가와 명제준 세원시장 앞에 섰다. 이어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다. 희한한 것은 명제준 세원시장 역시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명제준 세원시장은 책상 앞에 앉아 나른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태도로 뉴스 기사들을 읽고 있을 뿐이다. 그러길 몇 분. 명제준 세원시장이 천천히 물었다. 어느새 모니터에서 눈을 뗀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에 가 있다. ‘네 마음에 요리를 들어봐!’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 프로가 그렇게 인기라고?”
애초에 TV프로, 그중에서도 예능에 출현한다는 계획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 명제준 세원시장이 선거 전부터 자신의 오른팔, 아니 지낭으로 삼아온 대외협력보좌관의 전략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묻고 있는 명제준 세원시장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어딘지 모르게 타성에 젖어 있는 느낌. 그러면서도 대외협력보좌관을 올려다보는 눈은 노회한 정치가의 그것이다.
“요즘 한창 잘나간다고 들었습니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명제준 세원시장의 표정은 별달리 바뀌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들고 한차례 훑어보곤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였다. 삐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내선전화가 울렸다. 버튼을 누르자, 비서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왔다.
- 송 이사님 오셨습니다.
순간 명제준 세원시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입가에 그려지듯 옅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매도 살짝 휘며 살갑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그려냈다. 대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노동운동으로 시작해 세원시장까지 오른, 그로 인해 팬이나 다름없는 지지층을 지니고 있는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장년의 남자가 시장실로 들어섰다. 그를 본 명제준 세원시장이 버선발로 뛰쳐나가듯 반갑게 맞는다.
“아이고, 어쩐 일이십니까? 귀하신 분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다하시고.”
“허허허. 근방에 일이 있어 왔다가 시장님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해서 왔지요.”
“아, 그렇습니까? 앉으시지요. 어떻게? 간만에 바둑이나 한판 두실까요?”
“그거 좋지요. 안 그래도 지난번에 처참하게 패한 후, 내가 칼을 갈았다는 거 아니오. 오늘은 각오해야 할 거요.”
웃음과 함께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대외협력보좌관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두 사람이 눈치챌 틈도 없이 시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그 시각, 여당인 대한당의 당사에선…….
“그래서 그 사람은 어쩐다는 얘긴가? 아직도 결정을 못 했다던가?”
“하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정말, 답답한 인사 아닙니까?”
두 사람, 당 대표인 최수길 의원과 3선 의원 박주철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 얘기의 중심에는 대한당에서 영입하고자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명제준 세원시장. 노동자 출신으로 시작해 사시를 패스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무소속으로 시장에 당선. 그 후로도 세원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연임까지 성공한 터였다.
“허참. 답답한 인사라……. 노련한 건 아니고?”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란 건 맞습죠.”
“그 속이 시커먼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문제지. 참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어찌 그리 좋아하나 몰라?”
“그러니 연임까지 한 거 아니겠습니까?”
최수길 당 대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다음번 대선까지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음에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었고, 여소야대의 정국은 여전하다 보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내년에 있을 총선까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좀처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난 이해가 가질 않네.”
“…….”
“그치의 행보를 보면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거랑 그리 다르지 않지 않나? 그러면 차라리 그냥 우리 당에 입당하면 될 일을. 어째서 그렇게 혼자 그러고 앉았냔 말일세.”
“그만큼 야심이 큰 거 아닐까요?”
“글쎄. 이젠 그조차도 잘 모르겠네. 도무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계속해서 타진하고 행보에 신경 쓰도록 하게. 혹시라도 야당으로 가기라도 한다면 그런 낭패도 없으니까.”
이번엔 박주철 의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한바탕 홍역을 치르듯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인을 해주고 또 사진까지 찍은 뒤에야 전철에 탈 수 있었다. 전철 안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날 알아봐서 민망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까처럼 대놓고 사진을 찍거나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석상처럼 몸을 굳히고서 서 있었다. 그러길 한참. 목적지에 이르러 내릴 때쯤 되었을 때였다. 신현정 피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진영입니다.”
- 아, 얘기 들었어요. 인터뷰 끝나셨다고.
“예. 덕분에요.”
내가 걱정돼서 전화하신 건가? 고마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을 때였다.
- 아뇨.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피디님 아니셨으면, 인터뷰할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인터뷰란 말을 하면서, 괜스레 신경이 쓰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승객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 내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때, 신현정 피디가 말했다.
-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촬영에 출현할 게스트가 확정됐다고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 혹시 명제준 시장님이라고 아세요?
알다마다.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편인 나라고 해도 어떻게 그 사람을 모를 수가 있겠냐고.
“세원시장……님 아닌가요?”
- 맞아요.
“……설마?”
- 그렇게 됐어요.
헐. 잘은 모르지만, 명제준 시장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여야의 예상을 깨고 당당히 세원시장에 당선된 인물로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여당이건 야당이건 그를 품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고 있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틈만 나면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여론전도 서슴지 않는다고 하던데. 항간엔 다음 지방 선거에서 서울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오는 거로 봐선 야망도 꽤 큰 듯하지만, 정계에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기엔 정치적 기반이 너무 약했으니까. 대신 국민들에겐 꽤 인기가 있었다. 서민 출신, 정확히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그 후 인권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발을 들인 지 겨우 3년 만에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던 세원 지역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큰 폭으로 따돌리고 시장이 됐다는 점이 국민들의 호감을 산 거겠지. 일테면 개천에서 난 용이란 거다. 요즘처럼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더는 출세할 방도가 막힌 상황이나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다를 수밖에. 그렇게 보면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두리뭉실하게 물었지만, 내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은 신현정이 그 특유의 낮으면서도 고혹적인 음색으로 대답했다.
- 회의가 길어지긴 했죠.
그럴 테지. 아무리 서민적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한들 정치인은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쇼 프로에 불러낸다는 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잘되면 본전치기고, 자칫하면 그대로 폭망하는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잘못돼서 정권에 밉보이기라도 하면 프로그램이 폐지될 가능성도 있었고. 나야 별 상관없지만, 신현정 피디나 방송국에서 안게 될 부담은 꽤 높을 텐데…….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전철이 목적지에 도달했고, 지하철을 벗어날 때쯤 전화를 끊은 나는 신현정 피디와 나누던 얘기를 떠올리며 저택으로 향했다.
“명제준 시장이라…….”
아, 모르겠다. 어련히 알아서 결정했겠냐고.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곤 저택 앞에 섰다. 오늘 하루 스튜디오에서는 물론이고 지하철에서조차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그런가. 안 그래도 피곤한데. 지금의 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인지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머리가 잘 굴러가질 않는다. 아, 얼른 가서 씻고 쉬어야지.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응? 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숙소 건물 앞. 낯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강윤식?
“이제 오는군.”
강형식의 사촌이며 삼한 그룹 강 회장의 손자인 강윤식이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 대꾸하지 못하다가 한 템포 늦게 인사를 하자, 그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잠시 얘기 좀 하지.”
흠, 이건 또 무슨? 의아함이 들기는 했지만, 것보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말고 다음에 하면 안 될까? 하지만, 그런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고용주인 강 회장의 혈육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강형식의 일과 관련이 있지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기분 나쁜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