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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인터뷰 (1) (92/204)

#92. 인터뷰 (1)2021.05.02.

얼굴을 본 게 아닌데도 꼭 본 것 같았다. 그저 통화만 했을 뿐인데. 그것도 5분 남짓? 그 정도 통화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뚜렷하게 박히는 인상을 심어준다는 게 신기했지만, 것보다는 인터뷰 날짜가 신경 쓰였다. 화요일. 광고를 찍기로 했던 수요일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방송 촬영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당연히 남윤주 팀장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신현정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신경 쓰지 마세요. 촬영은 빨라도 목요일 이후에나 하게 될 테니까요.

바쁜지 길게 통화를 하진 못했지만, 몇 마디 나누지 못한 대화 속에서도 날 배려한다는 느낌이 전해져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후우.”

단 두 통화였다. 더 센스의 남윤주 팀장과 KBC 방송국의 신현정 피디와의 전화. 그런데도 심력이 고갈되는 이 기분은 뭘까? 동시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듯한 느낌……. 뭐랄까,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인터뷰를 할 것 같은 기분?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뭔 전화인데 그렇게 오래 해? 아! 혹시 그 여자야? 페이슬리…….”

“그런 거 아닙니다.”

단호하게 부정하곤 빗자루를 잡는데, 준석이 형이 헤드록을 걸어온다. 탁! 탁! 탁! 숨이 막혀서 형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치자, 그 모습을 보곤 혜순이 누나가 킥하고 웃었다. 아씨, 뭐야? 이게 웃을 일인가? 와,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 없네. 설마하니 혜순이 누나가…….

“컥컥……. 숨넘어가는……. 아, 형! 그렇게 갑자기 목을 조르면 어떡해요?”

“후후. 이 형을 감히 우롱한 죄다.”

“아 진짜! 누가 우롱했다고…….”

“그래서 누군데? 여자지?”

“……뭐, 그렇긴 한데.”

여자는 여자지. 두 명 다.

“얼씨구? 이거 이거, 얌전한 고양이…….”

“그런 거 아니고요. 인터뷰 때문에…….”

“뭐!!!”

아 깜짝이야! 어찌나 크게 고함치는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놀랬잖아요!”

“놀라긴 내가 더 놀랐다!”

“……?”

준석이 형뿐만 아니라 혜순이 누나…… 심지어 안성댁 아주머니까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데 그 얼굴들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한숨을 내쉬곤 이실직고하려는 찰나였다. 문이 열렸고, 김진호 셰프가 카리스마 작렬하는 포스로 성큼 들어섰다.

“왜들 그러고 있어? 일 끝났으면 가서들 쉬지 않고?”

오, 역시. 한마디를 해도 무게감이 다르달까. 딱 내가 닮고 싶은 분위기 그 자체인 김진호 셰프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막내가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요.”

홀랑 일러바치는 준석이 형. 아놔, 그새를 못 참고서. 저 형은 절대 스파이 같은 거 하면 안 될 사람이라니까. 아마 잡히면 고문은커녕 손톱깎이만 보여줘도 자신이 아는 건 모조리 털어놓을 남자다.

“인터뷰?”

“벼, 별거 아닙니다. 더 센스라고 잡지사라는데, 거기서 인터뷰 좀 하자고 하더라구요.”

더 센스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혜순이 누나가 눈을 빛내는 게 느껴졌다. 살짝 신경 쓰였지만, 더는 신경 쓸 수 없었다. 날 가만히 바라보던 김진호 셰프가 말했기 때문이다.

“잠시 나 좀 보자.”

그러곤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려던 김진호 셰프가 걸음을 멈추곤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쉬고, 저녁에 보죠.”

안성댁 아주머니랑 혜순이 누나까지 포함해 얘기하는 터라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것이다.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난 다시 한번 감탄하다가 준석이 형의 고갯짓에 현실을 깨닫곤 서둘러 김진호 셰프를 따라나섰다. *** 밖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김진호 셰프는 날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흠, 김진호 셰프도 숙소에서 생활하는지는 몰랐는데? 원래 출퇴근하던 거 아니었나? 조금 의아해져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고윤수 주방장님의 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 주방장님 쪽이 조금 고즈넉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좀 더 깔끔하고 정갈하달까. 특히 한쪽 벽을 거의 다 메우다시피 한 책장이 눈길을 끈다. 빈칸 없이 꽂혀 있어서, 대충 헤아려도 천 권은 너끈히 넘을 듯 보였다. 당연히 요리에 관한 책들이거니 하고 살펴봤는데, 의외로 다른 책들이 대부분이다. 분야도 제각각. 시집도 있었고, 소설도 보였다. 간간이 철학책으로 보이는 제목들도 보였는데,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나 보던 저자들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뭘 그렇게 보지?”

커피 향과 함께 찻잔을 들고 온 김진호 셰프의 질문에 난 고개부터 내저었다.

“아뇨. 그냥 좀 신기해서요.”

“……?”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내 눈길을 따라 책장을 훑어보며 의자에 앉고는 찻잔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으신다. 그 찻잔을 보곤 나도 모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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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그잔이었는데, 하트를 사방팔방 날리고 있는 토끼 캐릭터가 어쩐지 김진호 셰프의 이미지랑 매칭이 되질 않아서. 내 속내를 읽으신 걸까? 김진호 셰프가 별스럽지 않다는 듯 말씀하셨다.

“딸애가 사준 거다.”

“아! 따님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말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느라 주방 식구들하곤 소통은커녕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애 엄마랑 캐나다에 가 있다.”

음…….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조기 유학…… 그런 건가? 궁금하긴 했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거 같아서 굳이 묻진 않았다. 김진호 셰프도 더는 말해줄 것 같지 않았고. 대신 말씀하셨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인원을 보충할 생각이다.”

“예?”

“준석이가 계속 밑 재료를 다듬을 순 없으니까.”

“아……!”

결국, 나 때문이란 얘기인데…….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날 가만히 바라보던 김진호 셰프는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김진호 셰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알아서 나가란 얘기 아닌가 해서요.”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그러더니 불쑥 물으셨다.

“그럼 곤란하기라도 한 건가?”

“…….”

“방송도 그렇고, CF도 찍기로 했으니 수입은 충분할 텐데?”

“그야 그렇긴 하지만…….”

혹시 고윤수 주방장님과도 얘기가 끝난 건가? 이대로 끝인가 싶어서 뭔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내게 김진호 셰프께서 묘한 질문을 던지셨다.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주방장님께서 달리하신 말씀도 없고.”

“아……. 그럼?”

“딱히 여길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물론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스스로 결정 내려야겠지만.”

안심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해졌다. 아무리 인간이란 족속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존재들이라곤 해도, 이건 너무 형편 좋은 얘기 아닌가. 지금 김진호 셰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방송이나 기타 활동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 있어도 된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원하면 여길 나가도 좋다. 그런데도 월급은 준다.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제공한다. 그 외에도 갖은 편의를 봐준다. 이 이상 좋은 조건이 있을 수 있나? 물론 가능하다. 단, 아무런 대가도 없이……라는 건 믿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려도 벌써 잘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거잖아?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역시, 그런 거겠지.

“오늘 부르신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거겠죠?”

이제까지와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자, 김진호 셰프가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까지처럼 지내면 된다. 계속해서 방송에 출연해도 좋고 CF를 찍어도 무방하다. 인터뷰 같은 건 얼마든지 해도 상관없고. 대신…….”

“…….”

“프로필에 한 줄만 추가해주면 되는 거지.”

“……프로필이라고 하시면?”

“소속.”

“소……속이요?”

“삼한그룹 식품개발부 연구원쯤이 되겠군.”

“아!”

놀랐다. 얘기가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된다.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도 아니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으니까. 일종의 홍보 효과를 노리는 거라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김진호 셰프가 덧붙이고 계셨다.

“짐작하겠지만, 만약 계속해서 남아 있겠다면 연봉 협상도 다시 하게 될 거고, 그 외에도 그룹 차원에서 약간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겠지. 이건 짐작이지만, 원한다면 숙소를 저택 밖의 오피스텔 같은 곳으로 옮겨줄지도 모르고. 그 정도가 아니면 널 붙잡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회사에서도 알고 있을 테니.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걱정할 건 없다. 여태껏 하던 대로 주방에서 일하는 건 변함없을 테고, 달리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을 테니까.”

제법 길게 이어진 얘기는 확실히 합리적인 제안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 들어온 덕분에 방송에도 출연하고 심지어 CF까지 찍게 되었다고 말하면 이쪽에선 할 말이 없음에도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절할 까닭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여길 관두기엔 한 사람의 존재가 걸린다. 강형식. 나레이션의 표현대로라면 아직 녀석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는 현재 진행 중.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더불어 내가 그에 미치는 영향은 또 어떨지……. 이 외에도 많은 부분이 궁금하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젠 강형식 자체가 걱정돼서라도 이대로 물러나긴 어렵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런 거니까. 끊겠다고 해서 칼로 자르듯 잘라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인연이라는 것은.

“소속만 그렇게 해두면 된다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호 셰프를 보면서도 여전히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너무 과한데? 겨우 소속을 바꾸는 것만으로 내게 주어지는 혜택이.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조금씩 인기를 얻으면서 갓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지만, 그 정도로 이런 대우라……. 뭔가 찜찜한 기분이긴 해도 나로선 고개를 내젓긴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다시금 놀랐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어째서인지는 나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방금 내뱉은 내 음성은 묘하게 딱딱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족처럼 느껴지던 주방 식구들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비즈니스로 변하게 된 듯한 서운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걸 느낀 걸까. 김진호 셰프가 옅은, 그러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이해한다고…… 말하긴 어렵겠지. 그렇지만, 이 말만은 해주고 싶군.”

“…….”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주방 식구들 중 누구도 널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만은 기억해주면 좋겠군.”

한 템포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왠지 안심하게 돼서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딱딱하던 음성이 다소 풀어지는 걸 느끼며 일어섰다.

“그럼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김진호 셰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방을 나왔다. ***

“지금쯤이면 진호가 만나고 있을 겁네다.”

고윤수 주방장의 얘기에도 강 회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회장실 한쪽에 나 있는 유리창을 통해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그런 그에게 고윤수 주방장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이걸로…… 별다른 의심은 하디 않겠디요.”

누가 어떤 의심을 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게 고윤수 주방장의 생각이었고, 강 회장 역시도 따로 묻지 않는 걸 보면 그 심중을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걸 테다.

“외로운 아이일세.”

강 회장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그러면서도 회한이 담긴 눈빛이었다.

“알디요.”

“자네가 아낀다 들었네.”

“…….”

“……서운한가?”

“바라는 거이 없으니, 서운하고 말고도 없디 않겠습네까?”

“많이 바라지 않네.”

“이 늙은이야, 회장님께서 그러시길 믿는 수밖에요.”

“지금만큼만…… 더도 말고 지금만큼만 그렇게 해주면 더 바랄 게 없음이야.”

강 회장의 눈동자에 어린 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달리 믿는 바가 있는 것일까. 고윤수 주방장은 강 회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변하디 않을 겁네다.”

“……그런가?”

“그런 아이니까요.”

안심했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이 된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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