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갓솁 (3)2021.04.30.
딸랑하는 소리는 울리는 것과 동시에 묻혀버렸다. 도로 위에 정체된 차들과 행인들이 내는 소음과 가게 내부 테이블마다 앉아 있던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 그리고 음악 소리에. 그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윤주를 바라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손님 중에는. 그러니 50평도 넘는 가게 안에서 자신의 일행을 찾아내야 하는 건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남윤주가 그런 수고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예약하셨나요?”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여직원의 물음에 남윤주는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일행 있는데요. 예약자는 남윤주고요.”
“잠시만요. 아, 절 따라오시겠어요?”
한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로 능숙하게 예약을 확인함과 동시에 자리를 확인한 여직원은, 남윤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이곤 돌아섰다. 직원을 따라간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남윤주의 눈가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현지인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운 영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와우! 이사벨! 이게 얼마 만이야? 진짜 반갑다!”
활기차다 못해서 다소 시끄러운 남윤주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비해 긴 금발의 백인 여성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일어나더니 남윤주를 한차례 안아줄 따름이었다. 그렇게 극과 극으로 반응하며 서로를 반긴 두 사람은 잠시 후 이 가게에서 시그니처 요리인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와인을 곁들인 채. 물론 그동안 밀린 수다는 덤이었다.
“레이첼 알지?”
“오, 그 레이첼? 진짜? 그쪽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온 거야?”
“응. 지난번 컨벤션 때 다시 보게 됐는데, 그때 내가 발표할 기회가 있었거든. 그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더라.”
“진짜 잘됐네.”
이국적이다 못해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외국인 미녀의 이직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튼 뒤, 이내 남윤주의 근황으로 넘어갔다.
“굉장히 좋은 일 있나 봐? 얼굴 무척 좋아 보인다.”
“말도 마. 완전 장난 아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직 학생이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라니까.”
둘 모두 웃을 수밖에 없다. 10년 전 두 사람이 갓 대학에 입학해 한 방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의 그들은 한숨만큼이나 자주 말하곤 했으니까. 정말이지 자신들이 놓인 그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노라고. 그만큼 학업은 빡셌다. 새벽부터 일어나 강의를 듣기 위해 캠퍼스를 뛰어다녀야 했고, 교수들이 수시로 요구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내지 않는다면, 집에서 보내주는 돈만으로는 학업을 이어가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성적이 떨어져 장학금을 못 받게 된다면, 그때부턴 진짜 지옥문이 열린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말고도 없었다. 안 그래도 토 쏠릴 것처럼 하드한 스케줄에 아르바이트까지 얹어질 게 뻔했으니까. 한데도 그 시절이 그리울 정도다? 농담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한국의 근무 환경이 나쁘다곤 생각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힘들어?”
“음……. 뭐, 일은 할 만해. 대우도 나쁘지 않고. 동료들도 그만하면 인간적이지. 그건 그런데…….”
“그런데?”
“그러니까, 뭐랄까……. 그게 없어. 뭔가 파악, 하고 오는? 이거다 싶은 게!”
그제야 이사벨라는 알아차렸다. 남윤주가 뭘 얘기하고 싶어하는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너도 알잖아? 사람들이 놀라워할 만한 뭔가를 찾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일이라는 걸.”
“그야 그렇지.”
그렇기에 늘 특종에 목말라 있고, 거기에 인생의 가치를 두며,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데스크와 현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찾고 또 찾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그 무언가를. 그런 면에선 두 사람 다 본질적으론 같았다. 신문사나 잡지사나. 아니 이제는 보그 사로 옮겼으니, 이사벨라 역시 동종 업계인가? 아무튼, 둘은 남들은 이해 못 할 동질감을 느끼며 쓰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더없이 반짝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윤주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 석 자가 떠오른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거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안색이 좋은걸?”
“하핫. 귀신같은 기집애.”
“그러니까, 이제 말해봐. 널 이렇게 흥분하게 만드는 게 뭐지? 세상이 발칵 뒤집힐 만한 건수라도 잡은 거야?”
아직도 뉴욕타임스지에 있을 때의 버릇이 남은 건지, 여전히 사건 타령인 이사벨라.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한차례 바라본 남윤주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사건까진 아니고.”
“아니고?”
“사람이야.”
“……사람?”
잠시 후, 보그 본사의 신임 디렉터로 재직을 앞둔 이사벨라의 두 눈이 더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 놀랍다. 올해 하반기가 대체로 이런 기분이었긴 하다만, 이번엔 진짜 놀랍다 못해 경악할 정도다. 하아……!
“갓솁이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단어. 신을 뜻하는 갓과 셰프라는 말이 합쳐져 그렇게 됐다는 건 알겠다만, 문제는 그게 날 지칭한다는 게…… 민망하고 뻘쭘하고, 그러면서도 신기하고. 난 이하연이 보여주는 핸드폰을 보다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 나니 스타 어쩌고 하더니만, 이건 뭐……. 방송이 나가고 나자마자 이 모양이다. 이하연이 그 특유의 코를 들이마시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키득거렸다.
“이거 봐요, 이거.”
그녀가 또 뭘 발견한 모양인데……. 끙. 한밤의 도로. 올림픽공원이 마주 보이는 길 위에 차를 세워놓고 이러고 있으니 그 자체로 묘한 기분이 든다. 그것도 이렇게나 딱 달라붙어 앉아서……. 그나저나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신사동에 있는 강형식의 오피스텔을 나온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 이곳…… 송파구 잠실, 도로 한복판에 차를 멈춰 세운 채 핸드폰으로 검색 삼매경 중이다. 뭐, 상관없나?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으니까.
“이예지가 글 올렸어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도 불리는 아이돌 계의 여신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녀가 뭐라고 올렸길래 이하연이 이런 반응……. 헐! - 갓솁 눈빛 장난 아니네요. 페이슬리 박 쳐다보며 제면기인가? 그 나무로 만든 기계 들어 올리는데, 눈빛이 꼭 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서 소름 돋았네요. 게다가 팔뚝에 돋은 굵은 핏줄이……. 하아, 진짜 심쿵. ……뭐지? 심쿵? 왜 하고많은 단어들 중에 이런 단어를……. 아니, 그 전에 어느 부분에서 심쿵인 건데? 핏줄을 보면 막 심장이 뛰고 그러나? 진짜 이상한 일이다. 난 안 보는 척하면서 눈길을 살짝 돌려 이하연의 눈치를 보……. 헉, 그녀가 배실배실 웃고 있다. 그게 더 무섭다면 오버일까?
“하……하하. 벼, 별걸 다 보네요. 뭐 볼 게 있다고 핏줄을……. 다음부터 소매는 걷지 말아야겠네.”
여전히 웃고 있는 이하연 때문에 슬금슬금 눈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흥!”
콧소리가 들려온다. 흠칫해서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멋진 건 알아가지고!”
응? 이 반응은 뭐지? 그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 내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그래. ……잘난 척이다.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핸드폰을 살짝 깔보듯이 쳐다보며 도도한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후룹하고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근데 왜 내 귀에는 킥킥대는 거로 들리는 걸까? 실시간 번역기도 아니고. 나조차도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웃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말한다. 아니, 이예지의 SNS에 달린 댓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 눈빛이 뜨겁게 느껴진 건 저뿐인가요? 힛, 진영 씨가 좀 그런 면이 있지. 어디 보자. 전 오히려 차갑게 느껴져서 오싹했는데요. 미쳤나 봐! 진영 씨가 얼마나 따뜻한 남잔데. 어머, 이 여자……. 뭐래? 난 심쿵 정도가 아니라 이미 심장마비 왔다가 겨우 심폐호흡하고 살아난 좀비예요. 저 두꺼운 팔뚝에 안기면 얼마나……. 헐! 나, 나도…… 아직 못해본 걸!”
주먹을 불끈 쥐며 뭔가 투지가 불타는 눈빛이 되었던 이하연이 뒤늦게 날 의식했는지 돌연 표정을 바꾼다. 그러곤 손으로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여유롭게…… 실제론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앙, 이미 임자 있는 남자인데, 어딜 넘보는 거람?”
그러면서 날 쳐다본다. 그 눈빛이 이렇게 묻는 듯했다.
‘맞죠?’
아니라고 했다간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 이 순간 난 깨달았다. 레오파드…….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말하던 강형식의 농담 아닌 농담이. 동시에 실소하고 말았다. 이 여자……. 귀엽네. 당장 이하연과 손이라도 붙잡고 길거리에 나가면 그녀에게 쏟아질 선망의 눈초리는 둘째치고, 날 향한 질투와 질시 그리고 분노의 시선을 던지며 눈을 부릅뜰 남자들이 한 트럭은 될 텐데. 그런데도 오히려 내게 말하곤 한다. 집착은 자기가 할 테니 언제든 편하게 자길 만나라고. 그러면서도 늘 갈구하고 불안해하며 조심스러워하는 그녀다. 뿐만 아니라 어떤 허식도 과장도 없이 날 대하고 있는 이하연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도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 외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날 웃게 만들고 있다.
“줘, 봐요. 저도 좀 보게.”
내 핸드폰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데이터가 아까워서만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자동차라는 한정되고 밀폐된 공간에서 핸드폰은 한 대면 충분했으니까.
“에?”
크큭. 아까의 그 도도한 승리자님은 어디 가셨나? 픽하고 웃고는, 얼빠진 소리를 내는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녀가 쥐고 있는 그대로. 그러곤 이하연과 함께 핸드폰을 쥔 채 찬찬히 읽어본다. SNS에서부터 기사까지. 사실 나에 관한 얘기들인지라 민망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하연의 반응이 재밌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곧 굳고 말았다. 갓솁! 인터넷 곳곳에 퍼진 단어. 날 지칭하는 그 단어가 수도 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놀랄 정도가 아니잖아? 난 처음으로 실감했다. 공중파의 위력을. 그와 함께 느꼈다.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 주목하고 있는지를. *** 요리사란 직업은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달라서, 토요일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특히나 적은 인원으로 돌아가는 재벌가의 주방. 그 특수한 상황 탓에 좀처럼 빠지기 힘들다. 그런데도 난 여태껏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그 탓에 다른 주방 식구들이 내 몫까지 일해야만 했다. 그게 미안했기에 연말에는 주방 식구들에게 뭐라도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방송이며 출장 등을 이유로 밖으로 싸도는 동안, 막내인 내 일까지 모두 도맡아 해준 준석이 형에겐 대체 무슨 선물을 해야 이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을는지…….
“뭐야? 얼굴이 왜 이래?”
“에? 제가 뭘요?”
어젯밤의 이하연처럼 얼빠진 소리를 내며 되묻자, 준석이 형이 눈을 길게 찢으며 의심스럽게 묻는다.
“어제 방송 때문에 그러냐?”
“그, 그러니까 뭐가요?”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잖아! 하아, 대체 무슨 고민이길래 그러는 건데?”
어제 숙소로 돌아온 뒤 하도 신기해서 인터넷을 뒤지느라 늦게 잠들었다는 얘기는 죽어도 못하겠다. 나참, 갓솁이라니…….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별명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잠을 좀 설쳤어요.”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날 준석이 형이 은근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자식이. 뭘 그렇게 부담스러워하고 그래?”
어? 뭔가 아는 듯이 말하는 형을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보자, 입꼬리를 살짝 추어올리며 준석이 형이 손을 뻗어왔다.
“그냥 누려. 다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인데 뭘. 아, 그럴 게 아니라 이참에 연예인이라도 한번 꼬셔보든가? 이번에 나온 페이슬리 박이라고 했던가? 그 여자, 꽤 예쁘던데 연락 한번 해보든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얘기하는 형을 밀어내며 툴툴거렸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머리 좀 만지지 마요. 괜히 그러다가 음식에 머리카락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쭈! 서진영이! 많이 컸는데! 응? 인기 좀 얻으니까, 형도 안 보이나 보지? 엉? 그런 거야?”
“헉! 여, 옆구리는……. 크크크큭.”
준석이 형이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있는데도, 안성댁 아주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예전 같으면 한마디 했을 텐데, 고개를 돌리며……. 어라? 지금 웃은 거 맞지? 뜻밖의 반응에 조금 놀라서 눈을 치떴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 형……. 잠시만요. 전화, 전화!”
“오케이! 나가서 받고 와.”
토요일엔 점심 식사 자체가 워낙 간소하기 때문에 식사 후 주방정리도 그다지 빡세지 않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예. 서진영입니다.”
말하자마자, 들려온 것은…….
“안녕하세요!”
텐션이 높다 못해 통통 튀는 듯한 음성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니…… 연락이 올 거란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절로 몸이 굳는 그런 내용이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들었다.
“잡지사 ‘더 센스’의 남윤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