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갓솁 (2) (90/204)

#90. 갓솁 (2)2021.04.28.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김서연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새벽까지 해야 할 서류 검토를 하면서 반쯤은 여흥으로 보는 거였으니까. 나머지 반은 광고주로서 자사 차량 광고 모델의 방송을 모니터하는 거랄까. 아무튼, 딱 그 정도였다. 뭐, 예전이라면 약간의 사감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하연과 그가 만나는 걸 본 이후론 사적인 감정은 딱 끊어버린 그녀였다. 그랬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하지만…….

- 그래서, 서 셰프님은 언제부터 요리를 시작했는데요?

- 날 때부터?

- 킥! 장난치지 말고∼.

- 장난 아닌데?

- 엉? 정말?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고, 페이슬리 박이 인사를 한 후 소파에 잡자마자 시작된 대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김서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사람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때론 웃기도 하고 또 때론 진지해지면서 어느새 서류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녀는 집중했다.

-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서 라면 끓여 먹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부모님들이 바빠서 라면 끓여 먹고, 동생 있는 애들은 떡볶이까지 곧잘 해서 먹이는데. 계란 부쳐서 열무김치랑 고추장 넣고 비빔밥 해 먹는 애들도 많다니까요. 한진석 씨는 안 그랬어요?

김서연은 중얼거렸다.

“난 아줌마가 해줬는데.”

엄마도 아빠도 아닌 아줌마. 어떻게 보면 바쁜 부모님 대신 스스로 음식을 해 먹는 아이들보단 나을 거다. 그거야 너무나 당연한 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쓸하지 않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외로웠다. 외동딸이라서?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바빠서만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들이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쯤은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다소 빠른 시기에 철이 들었고, 그 덕분에 이해의 폭도 꽤 넓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바쁜 엄마 대신 집안일을 돕는 아줌마가 차려주는 밥도 군소리 없이 먹었고, 밥을 먹기 전이나 후에도 언제나 예의 바르게 감사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혼자서 먹는 밥은 전혀 맛있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땐 아줌마 역시 자신과 한 상에서 먹질 않았고, 그 때문에 늘 혼자서 밥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밥상 위의 음식들은 푸짐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쓸쓸했다. 그때의 기억들이 머리에 떠오르자, 김서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맴돌았다.

- 그렇게 호기심에 시작하지만, 점점 빠져들게 되고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그게 직업이 되어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거죠. 저처럼요.

방송에서 서진영이 하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저 사람……. 말을 잘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에 꽂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만 옛 생각이 나게끔 만든다. 자신이 왜 사업 쪽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그 질문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부모님이 바라시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꿈꿔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꿈?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렇긴 해도 어떤 이에겐 달콤할 테고, 또 어떤 이에겐 꽤 멋진 말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좀 더 구체적이고 딱딱한, 그러면서도 차가운 이미지였다. 사업가로서의 꿈. 남의 실패를 기회 삼아 회사를 집어삼키는 작업. 헐값에 사들인 땅 위에 가치 있는 무언가를 올려 비싼 값에 되파는 작업. 남들이 보지 못한 재화의 가치를 일찌감치 파악해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가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작업. 그 작업들을 하나로 모아 일반인들은 인생을 몇십 몇백 번 되살아도 이룰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 그것만이 그녀가 현재 가진 꿈일 뿐이다. 아무리 다른 말로 포장해도 사업이란 그런 거니까.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일을 평가절하하며 스스로를 경멸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저 직업일 뿐이라고. 그러나 왜일까? 지금 서진영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조금 더 그를 일찍 만났더라면 자신은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꿈은 뭐지?”

그녀의 읊조림 속에 페이슬리 박의 연주가 시작되고, 서진영은 그녀의 질문을 듣지 못한 채 요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이슬리 박이 연주를 채 마치지 못한 채 방송이 끝났다. 이어지는 예고편. 지난번에 보았던 것처럼 꽤 흥미로웠다. 예능 쪽은 처음이라고 하던데, 상당히 재능있는 피디라는 생각을 하면서 TV를 껐다. 그러곤 다시 서류를 집어 든 그녀였지만, 이상하게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결국, 한참이나 서류를 뒤적이다가 창밖을 쳐다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서 받는다.

- 예, 실장님.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G5 촬영이 언제라고 했죠?”

-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일정을 확인한 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스쳐 갔다.

  ***

“이, 인터뷰요?”

내가 되묻자, 수화기 너머에서보다 주위 반응이 더 뜨겁다.

“인-터-뷰!”

“정말?”

“오오! 서진영이!”

“꺄아아악! 축하해요!”

“잘됐네요.”

제각각 개성 넘치는 반응들은 깡그리 무시했다. 대신 신현정 피디의 말에 집중했다.

- 예. 꼭 좀 하고 싶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몸이 달아오른 듯하달까.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했겠죠. 특집으로 다루고 싶다고. 그것도 이왕이면 독점으로요.

특집에 독점이라……. 참 현실감 떨어지는 얘기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한 명이 그 대상이 된다면 차라리 그런가 보다 하겠다. 아, 그러고 보니 다들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있었을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저 말의 대상이 나라는 게 그렇게나 위화감이 들 수가 없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좀 그러네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 반응이 뜨겁게 끓어오른다.

“아, 왜애!”

“왜요!”

“아 진짜!”

“해요오!”

“…….”

뭐냐고, 이 반응들은? 난 손을 들어 훠이훠이 내저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착 달라붙는 다섯 사람. 아니 김주형을 제외한 네 사람. 어이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으앗하고 비명 아닌 비명이 들려왔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잽싸게 달려가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가버렸다.

“솔직히 얼떨떨하네요. 사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제가 그럴만한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 그 기분 알 거 같아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후우, 나도 안다. 유명해진다는 의미 정도는.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명예도 중요하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다. 그러나 한편으론 늘 생각해온 바가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고, 그 욕심이 탐욕이 되었을 때 삶은 한순간에 파탄이 나는 거라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욕심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이상을 바라게 되면 이제껏 쌓아온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리라. 그래서 부담스럽다. 단순히 인터뷰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걸 두고 하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방송도, 광고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데도 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돈 때문이다. 아니 사람 때문인가? 신현정 피디와 C 마트 김진숙 회장을 떠올린 난 픽하고 웃고 말았다. 사람 때문인 건 맞지만, 둘은 그 의미가 다르니까. 어쨌든 돈 때문이든 사람 때문이든 방송이나 광고는 내게 의미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도 일종의 직업으로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인터뷰는 말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 이만큼 잘 났다.’라고 얘기하는 거니까, 부담스러울 수밖에.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막 말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듣고만 있던 신현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지는 마시고요.

“……?”

- 전 그렇게 생각해요. 진영 씨가 바에서 저희와 대화를 나누었던 덕분에 유나가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됐잖아요? 방송도 따지고 보면 그렇죠. 그때 일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사적인 자리가 TV라는 매체를 통해 확장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소통 창구?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진영 씨에겐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어요. 그건 직접 대화해보지 않고선 느낄 수 없는 거죠. 그게 지금 방송에서 또 다른 힘을 발휘하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터뷰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해요. 잡지라는 매체. 활자라는 소통 창구를 통해 대화를 하는 거죠.

신현정 피디가 이렇게까지 길게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녀의 성격으로 비춰볼 때 거의 틀림없을 거다. 그런데도 이런다는 건……. 그만큼 날 진심으로 생각해준다는 의미겠지. 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잠시 말이 없던 신현정 피디가 이번에도 역시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것은 설득도 강요도 아니었다. 그녀 말마따나 자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나로선 그저 고맙기만 한 조언이었다.

- 전 진영 씨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 긍정적인 힘을 믿으니까요. 그 영향력이 좀 더 확대되어 많은 이들에게 미쳤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진영 씨에 대해 알게 됐으면 하는 거고요. 그저 그뿐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어디까지나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어차피 결정은 진영 씨가 하는 거잖아요?

맞는 말이다. 앞부분의 얘기는 공감하기 어렵지만, 결국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 그리고……. 대체 신현정 피디가 나에게서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내 힘이 아닌 나레이션으로부터 비롯된 힘. 그런데도 날 그렇게 평가하는 걸 들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방송사 피디인 그녀가 마치 매니저처럼 내게 이런 연락을 한 것부터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무리 아는 잡지사고, 또 그쪽에서 내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 시간을 내가며 심력을 소모할 까닭이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갑자기 강형식이 떠오른다. 신현정 피디만큼이나 내게 호의적인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또 한 사람 있었지. 이하연. 아니, 한 명 더 있구나. 류승렬. 아니다. 생각해보니 그밖에도 많구나. ……박유나, 김주형, 고윤수 주방장님, 김진호 셰프, 준석이형, 그리고 아저씨와 사모님까지. 그 외에도 더 있겠지만……. 가족들을 제외하고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내게 호의적이란 게 신기하기만 하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 그건……. 나레이션이 준 선물이겠지. 설사 그 주인공이 강형식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삶은 분명 그로부터 시작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다른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힘은……. 거짓이라고만 할 수도 없겠네. 적어도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그렇다면, 그 믿음에 그만큼 부응하면 그뿐.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거 아닐까…… 싶다. 생각 끝에 픽하고 웃고는 코끝을 문질렀다. 그러곤 얘기했다.

“……하죠. 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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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현정 피디로부터 연락을 받은 남윤주 팀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안 그래도 다음 달에 나갈 잡지에 특집으로 다룰 만한 사건 혹은 사람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차였는데. 방금 본 방송이 그녀에게 일종의 영감을 준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이번 편, 즉 페이슬리 박에서 느낀 것 때문만은 아닐 터다. 오히려 지난번 방송인 류승렬의 두 번째 편에서 자신도 모르게 울고 말았던 기억 때문이리라. 어찌 되었든 그때의 감상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었고, 오늘 방송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은 감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연락할 방도가 없다는 것. 연예인이 아니라서 매니저나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가게를 가진 것도, 회사에 적을 둔 사람도 아니라서 딱히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답답했는데……. 다행히 선배이며 사장인 강태경이 담당 피디인 신현정 피디와 대학교 동문이었던 것. 그것도 한때 함께 어울렸던 동아리 출신이었던 게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선배님!”

- 이 자식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아임 쏘리! 히히. 아무튼, 고마워요!”

- 너 자꾸 혀 꼬부라진 말 쓸래? 나 0개국어 한다고 했어 안 했어?

“아임 비지! 끊어요!”

- 야! 그냥 끊으면 어떡해? 어떻게 됐는지는 말해줘야…….

뚝! 거침없이 전화를 끊은 남윤주 팀장이 헤실헤실 웃으며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일을 해치웠으니, 이제 자신에게 보상을 해줘야 할 타이밍이란 생각으로.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다.

“이사벨! 안 그래도 지금 나가던 중이야. 응? 어디? 오케이! 지금 바로 갈게.”

신바람이 난 그녀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먼저 갈게요. 다들 내일 봐요!”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미소지었다. 서진영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좋았고, 오랜만에 이사벨라를 만나는 것도 좋았다.

‘보그로 스카우트됐다고?’

원래 뉴욕타임스 쪽에 있다가 세계적인 잡지사인 보그 본사로 스카우트되어 자리를 옮긴 이사벨라.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클래스메이트였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린 그녀는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나 자신이나 이렇게 잡지사에서 근무하게 될 줄은.

“아, 좋다!”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던 그녀. 띵! 엘리베이터가 서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남윤주 팀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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