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갓솁 (1) (89/204)

#89. 갓솁 (1)2021.04.25.

늘 느끼는 거지만, 편집의 위력은 대단한 것 같다. 흔히들 악마의 편집이라고 말하는, 짜깁기를 통한 악의적인 편집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신현정 피디가 보여주는 편집의 능력은 가히 예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진석의 소개와 함께 등장한 페이슬리 박이 무대 위에서 치는 피아노 소리가 방송을 통해 전국의 안방으로, 술집으로, 핸드폰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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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한 모습으로 그 가냘픈 몸 어디에서 그런 박력이 나오는지, 카메라가 세심하게 잡은 페이슬리 박이 연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표정과 함께 열 개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울려대는 선율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걸 각기 다른 방향에서 찍은 카메라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해 편집한 신현정 피디는, 페이슬리 박이 어째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불리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처럼 페이슬리 박이 연주하는 모습만 봐서는 지금 이 프로가 예능 프로인지, 음악 프로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렇게 뛰어난 연주와 더불어 그에 버금가는 실력의 연출력이 만나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자, 강형식을 비롯한 일행들은 저마다 행동을 멈추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장난 아니네!”

한쪽 손으로 대차게 뜯고 있던 닭 날개를 쥔 채로 박유나가 와! 와! 를 거듭 외쳐댔고, 류승렬은 벌써 몇 분 동안이나 맥주잔을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입가로 가져가지도 않은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그들 두 사람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강형식이나 김주형도 반응이 다소 소극적이라서 그럴 뿐 페이슬리 박의 연주에 흠뻑 빠져든 모습이었다. 특히 이하연은 몽롱한 눈빛이 되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아 멋지다! 진영 씨, 진짜 화면 잘 받는 거 같…….”

찰싹! 듣다 못한 박유나가 그녀의 어깨를 냅다 휘갈겨 응징을 가하자, 이하연이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곤 내가 다 부끄러워져서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페이슬리 박의 연주가 끝났다. 그러곤 곧바로 시작되는 만담 파티. 그 과정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페이슬리 박의 사연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해 한진석과 손발을 맞추는 것이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페이슬리 박이 중간중간 끼어들어 어설프면서도 귀엽게 느껴지는 한국말로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인 페이슬리 박의 매력이 뿜뿜하는 장면들이었고, 그러면서도 서서히 그녀의 사연 즉, 할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드러내기 위한 서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시청자들은 그저 웃으면서, 혹은 감탄하면서 보고 있을 터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얘기는 페이슬리 박의 과거사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산 출신이라는 그녀. 그리고 그녀가 파리에서 먹어봤다는 음식……. 밀면으로 추정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내가 식재료들을 챙겼고, 그 후 페이슬리 박이 피아노를 치는 동안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칼질과 피아노 연주의 앙상블. ……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럽지만, 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장면을 신현정 피디는 기가 막힌 편집 실력으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내가 다 감탄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아무튼, 그렇게 연주와 더불어 밀면 요리는 순조롭게 이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따앙! 내가 제면기를 꺼내는 찰나, 피아노 소리가 크게 올리며 페이슬리 박의 연주가 멈추었다. 그 순간, 카메라가 페이슬리 박의 얼굴을 잡는가 싶더니 천천히 클로즈업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그 눈길은 내가 들고 있는 제면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새 옮겨간 카메라의 초점이 제면기를 비추는 가운데……. 그걸로 방송은 끝났다.

“어? 뭐야?”

“설마 여기서 끝인 거예요?”

“말도 안 돼! 왜애? 좀 더 보여줘어!”

“근데, 어째서 페이슬리 박이 저러는 거지?”

“표정이 이상한데?”

“꼭 울 것 같아요.”

“저 제면기랑 무슨 상관이 있을 거 같은데?”

“형! 저거 뭔데요? 또 지난번처럼 뭐가 있는 거예요?”

“와! 무슨 낚시를 그냥!”

거실 안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나를 빼고도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들 돌아가면서, 아니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해대니 꼭 시장통 같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시끄럽게 떠들면서도 그들은 날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뭐, 그런다고 해서 말해줄 나도 아니지만. 그저 웃고만 있을 때였다.

“워우! 반응 장난 아니에요!”

류승렬이 핸드폰을 보여주자, 머리 네 개가 일제히 모여든다. 그 위로 나 역시도 슬쩍 눈길을 던졌다.

“크큭. 오늘은 실검 1위 실패네!”

“대신 페이슬리 박이 1위인데?”

“그래도 한진석보다 위야.”

그들의 말대로였다.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페이슬리 박이 실검 1위인 거야 그렇다 치고, 내가 실검 2위? 하, 황당하다 못해서 어이가 없다. 근데, 방송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지?

“많이들 보나 보네?”

내가 중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류승렬이 외쳤다.

“방송 시작하고부터 실검 찍었어요!”

“어? 그, 그래?”

……방송이 생각보다 인기가 있나 본데? 그렇다고 해서 실감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예고편이 시작되었다. 방청객들이 숨을 죽인 채, 혹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스튜디오를 바라보는 가운데, 천천히 무대를 내려오는 페이슬리 박.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주방 쪽으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카메라는 그녀의 걸음을, 그녀의 손을, 그리고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툭 하고 내려놓는 제면기. 어느새 대리석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페이슬리 박이 그 제면기를 부여잡고 울먹이는 모습을 정점으로 예고편은 끝났다. 정말이지 다음이 궁금해질 밖에 없는 연출이었다. 그 증거로 류승렬이 보여주는 댓글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 으아아아악! 뭐야! 뭐냐고! -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끝내면 어쩌라구요ㅠㅠ - 아, 일주일 동안 어떻게 기다려! - 와씨! 오늘도 당하는 거임? - 이거 완전 패턴 아님? 시청자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면 진짜……. 제발 다음 편 보여주삼!!! - 페이슬리 박이 왜 저러는 걸까요? - 아버지 때문 아닐까염? - 아버지? 아버지가 왜욥? - 사업하다가 망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민 간 거고. 그러니까, 그때 하다 망한 사업이 제면기? - 푸웁! 님, 상상력 인정! - 뇌피셜은 여기까지. - 웃을 일이 아님. 분명 범인은…… 제면기! - 범인의 인은 사람 인 자임. - 꺼지시고요. - 초반 안 되욤. - 반말 아니지만, 윗분 인정. 예의를 지킵시다. - 제면기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임. - 갑분싸……. 어쩔 거임? - 암튼, 이 방송 예고편 예술임. - 난 예고편 보려고 이거 봄. 이 정도가 방송에 대한 반응이라면…….

“형님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네요.”

“어디 어디!”

“오오! 서진영! 장난 아닌데?”

장난 아니긴 무슨……. 헉! 장난 아닌데? - 저분 누구임? - 말 잘하네요. -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요리도 잘함. - 요리보다 점 잘 보는 거 아님? - 접때도 보니까, 막 출연자들 과거 알아맞히고 그러던데. - 그거 다 짜고 치는 거래도 그러네. - 아녜요. 제 친구 중에 방송국에서 알바하는 녀석이 있는데, 걔 말에 따르면 대본에도 없는 내용이래요. - 헐. 님 친구 중에 방송국 알바생이 있었군요. - 왜 친구 중에만 있는 걸까? 그놈의 알바생은? - 저기염, 저 KBC에서 일하는데요. 윗분 말씀 사실임. - 인증할 수 없는 사실은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 뇌피셜은 위험해요. -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진영 셰프 진짜 장난 아니라더라고요. - 방송이 장난은 아니죠. - 서 셰프, 관심법! - 노노. 관심법 아니고, 예지? - 예지 아님. 과거를 들여다봄. 아무도 얘기 안 해주는데. - 헉! 그게 사실이면 진짜 무섭당. - 아무튼, 서 셰프 장난 아님. 요리도 잘하고 점도 잘 봄. - 아 글쎄 점 아니라니까. - 근데, 좀 잘 생긴 듯? - 애인 있을까염? - 원래 저런 사람이 애인 없어여. 잘난 사람은 그냥 홀로 빛날 뿐, 함부로 말 걸지도 않는달까. - 서 셰프님……. 전번 좀. - 나도 전번 좀. - 미투. 와씨, 깜짝 놀랐다. 다들 왜 이런다냐? 나한테 웬 관심들이 이렇게 많아? 아, 그리고 내가 요리하는 거 봤나? 솔직히 방송에서 보여준 요리라곤 도시락 비빔밥이랑 밀면이 다잖아? 그나마도 밀면은 아직 면도 안 뽑은 상태다. 근데 어떻게 아냐고? 내가 요리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게다가 내가 잘 생겼다?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다. 전번 얘기도 그렇고…….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왜 난 눈치가 보이는 걸까? 안보는 척하면서 슬쩍 이하연을 보다가……. 헉! 날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아, 왜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냐고요. 멋쩍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하. 사람들 참……. 왜 남의 전화번호를……. 난 관심도 없는데.”

내 말에 급 환해지는 이하연의 얼굴. 단순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만큼 날 믿고 있다는 건가? 어쨌든 내 말에 일희일비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때였다.

“이야, 이거 딱인데?”

“뭐가요?”

“진영이 별명.”

강형식의 말에 이번엔 그의 핸드폰으로 머리 네 개가 모여들었다. 나도 볼까 하다가, 조금 전 일도 있고 해서 관심 없는 척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보니까 다들 웃음을 흘리고 있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째 불안하다. 동시에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두고두고 후회할 거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때, 류승렬이 킬킬거리며 소리쳤다. 강렬한, 그러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

“갓솁이래요, 갓솁!”

멈칫. 황당해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한번 외치는 그였다.

“갓솁!”

야이씨! 하지 마! 눈을 부라렸지만, 기분이 좋은 건지 재밌는 건지 또다시 외치려는 녀석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등 뒤에서 강형식을 비롯한 네 명이 일제히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갓-솁!!!”

나참.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믿었던 김주형까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응? 신현정 피디? 시청률 때문에 전화했나? 의아함에 손을 치켜들었다. 다들 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해진다. 그사이,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

“서진영입니다.”

- 신현정이에요.

“예. 안 그래도 방송 보고 있었습니다.”

- 그러셨군요.

시청률 때문이 아닌가? 어째 말투가 좀 묘한데? 뭐랄까.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느낌이랄까.

“누구예요?”

“현정 언니?”

핸드폰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은 건지, 이하연과 박유나가 물어오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신현정이 말했다.

- 다른 게 아니고요.

“…….”

- 제가 아는 잡지사가 있어요.

“잡지사요?”

- 예. 여성과 관련해 패션 쪽을 주로 다루는 곳인데, ‘더 센스’라고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

“아, 들어는 본 거 같아요. 근데, 거긴 왜?”

- 그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

-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어……. 제 연락처를요?”

- 예. 원래 이런 건 제 선에서 커트하는 편인데……. 진영 씨한테 연락할 방도가 없다고 사정사정하는 데다가, 진영 씨한테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요. 아, 연락처는 아직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본인한테 물어보고 말해준다고 했거든요.

“그건 괜찮습니다만. 무슨 까닭인지……?”

곧이어 들려온 신현정의 대답에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여서.

- 인터뷰할 생각 없냐고 묻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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