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일단 썰어 (3) (88/204)

#88. 일단 썰어 (3)2021.04.23.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작업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산처럼 쌓여있던 겨울무들은 오후 5시가 되기도 전에 작은 조각들이 되어 수백 개의 플라스틱 상자에 담겼고,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내 덕분에 일찍 끝났다며 칭찬을 하기 바빴다. 기분이 날아갈 그것 같았다. 아주머니들의 칭찬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었다. 오늘 느낀 그 감각. 그건 뭐였을까? 이해할 수 없는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간질거렸다.

“저어……. 주방장님.”

이사장님과 아주머니들의 배웅을 받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망설이다가 고윤수 주방장님을 불렀다. 아무런 말씀 없이 날 바라보는 주방장님. 뭐냐고 묻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뭘 묻는지 다 아신다는 눈빛이셨다.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그 감각은…… 뭘까요?”

여전히 대답 없이 쳐다보시던 주방장님은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러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별거 아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니래 걸을 때, 어떻게 걸을까 생각하면서 걷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뇨.”

“기럼, 밥 먹을 땐?”

“그야…….”

할 말이 없다. 누가 밥 먹을 때 의식적으로 손을 쓸까? 입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기런 거디. 사지를 쓴다는 건.”

난 곱씹었다. 주방장님을 말씀을. 그런 내게 다시 얘기하셨다.

“칼도 마찬가지디. 걸을 때 어느 쪽을 발을 내디딜디, 힘을 얼마나 줄디 생각하디 않는 거랑 같디. 손도 마찬가디. 뭔가를 집을 때, 힘을 이만큼 줄 거라 생각하딘 않잖네? 저걸 들어야디 하고 잡는 순간, 그저 자연스레 그래 되는 거디. 그런 거이야. 칼질도.”

“아!”

탄성이 나왔다. 아직 명확하게 정리가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동안 앞뒤 꽉 막혀 보이지 않던 눈이 뜨인 느낌이랄까.

“힘이란 거이 그런 거이디. 근육을 이만큼 쓰겠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하는 거가 사람 아니네? 기럼 어쩌야겠네? 손을 쓰듯 칼을 쓰려면 그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하디 않겠네?”

“……예.”

“하믄, 어떻게 해야 그리 되갓니?”

“그건…….”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무를 썰 때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 행하던 행동들. 생각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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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힘이 빠졌었습니다. 그땐…….”

피식. 웃으신 주방장님이 말씀하셨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디.”

“……?”

“몸이 기억하는 거이야. 여기가 아니라.”

주방장님은 말씀하시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계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러니까, 칼질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주방장님께 물은 건지, 아니면 나 스스로에게 물은 건지 모를 말이었다. 그 물음에 고윤수 주방장님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계셨다. 그런 주방장님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든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 주방장님에 내주신 숙제를 결국 내 손으로 풀지 못한 셈인지 모른다. 아마도 오늘 거길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많던 무들을 미친 듯이 썰지 않았다면……. 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을 테지. 당연하지만, 이 감각이 내 것이 되었다곤 말할 수 없을 터다. 이제 겨우 실마리만 잡았을 뿐. 이걸 내 힘으로 만드는 건 또 다른 얘기일 거다. 그 길이 쉽지만도 않을 거고. 결론부터 말하면, 주방장님의 말씀처럼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부단히 칼을 놀려야 할 거다. 힘이 빠지고, 무의식적으로 칼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칼질을 할 수 있게끔. 저택으로 돌아와 숙소, 침대 위에 앉아서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불현듯 떠올랐다. 아저씨와 함께 쇠를 두드리던 때가.

“아!”

그거였나? 아저씨가 말씀하신 게? 결국……. 아저씨랑 주방장님이 말씀하신 건 통하는 거였다?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과 원하는 대로 칼을 다루는 방법은 결국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아, 나 진짜…… 미련하구나.”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저씨가 나더러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라고 하신 말씀에 깃든 의미를. 동시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내가 뭐라고. 며칠 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가르침을 주신 걸까?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앞뒤 재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가다가 통화가 연결됐다.

- 어머, 진영아. 무슨 일 있니?

사모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확인했다. 밤 9시. 늦었다면 늦은 시간. 걱정스럽게 묻고 계신 사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뇨. 그냥…….”

쑥스럽지만, 그래도 말했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불쑥 물으신다.

-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예.”

- 그래. 먹고 싶은 반찬 있으면 말하고. 만들어서 보내줄 테니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 주방에서 매일 남는 거만 해도 충분해요. 아시잖아요. 회장님 드시는 거라 어지간한 레스토랑보다 맛있다는 거.”

- 호호호. 그렇긴 하네. 아이참. 알았어요. 이이가 전화 바꾸라고 난리다. 자요!

- 내가 언제 그랬……. 큼, 지금이 몇 신줄 알고 전화질이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살짝 지친 듯한 음성이었지만, 여전히 괄괄한 목소리였다.

“뭘요. 아직 주무시려면 멀었구만요. 어차피 잠도 안 와서 TV 보고 계시지 않았어요?”

- 이놈이! 사람을 뭐로 보고! 라디오 듣고 있었다, 이놈아!

크게 웃고 말았다. TV나 라디오나.

“아저씨, 있잖아요. 오늘…….”

통화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간만에 기분 좋은 밤이었다. *** 기분 좋은 일은 또 있었다. 아저씨와 통화 후, 이하연과 톡까지 주고받은 뒤 잠이 들었던 어제. 평소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나 운동까지 마친 뒤 출근했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였다.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칼질을 감각이 남아 즐겁기만 한 기분이었다. 그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더없이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 페이슬리 박이 공연 스케줄을 연기한 모양이에요.

“아, 혹시?”

- 예. 한동안 할아버지 곁에 머물기로 했다나 봐요.

“잘됐네요.”

- 저희한테 고맙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신현정 피디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살짝 떠 있는 느낌이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음성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자부심이 드는 걸까? 하긴. 요리 프로라곤 하지만, 힐링을 표방한 방송이었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기존의 예능 프로와 달리 재미 본단 감동을 추구한다는 평이 많았으니까. 한마디로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거다. 안 그래도 요즘 그런 인식이 강했고, 그런 이미지는 애당초 이 프로를 기획했을 때부터 그녀가 모토로 내세웠던 거였는데, 출연했던 게스트가 직접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했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겠지.

- 진영 씨한테도 고맙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제가 뭐 한 거 있다고요.”

-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하하하.”

그저 웃을 수밖에. 나레이션 덕입니다…… 하고 말할 수도 없으니.

- 아 참, 촬영 일정은 곧 결정될 거예요. 아직 확정이 되지 않아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게스트 섭외 문제로 조금 늦어지고 있네요.

뭐, 상관없지 않나? 이번에 촬영한 ‘페이슬리 박’ 편은 3회분으로 나뉘어 방영될 계획이니 다음 방송 촬영은 조금 늦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알겠습니다. 확정되면 연락 주세요.”

신현정 피디와 연락을 끊고 나서 잠시 떠올려 보았다. 지금쯤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페이슬리 박의 얼굴을. 그녀의 웃는 듯 우는 표정도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 표정을 따라 하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였다. 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예. 서진영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다름 아닌 C 마트 직원. CF 촬영 때문에 전화했나? 예상은 들어맞았다.

- 잘 지내셨죠?

“예. 덕분에요.”

- 아, 다른 게 아니라요. 스케줄 나와서요.

한참까진 아니고, 한 십오 분 정도 통화를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 주라…….”

이거 잘하면 촬영이 겹칠 수도 있겠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한쪽에 얘기해서 미루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되나? 참네. 내가 뭐라고 촬영 스케줄을 바꾸라 마라 하겠냐고. 제발 겹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신현정 피디한테 문자를 보냈다.

- 죄송한데, 촬영 날짜를 되도록 다음 주 수요일은 피했으면 합니다. 그날 중요한 스케줄이 있어서요.

혹시라도 건방져 보일까 봐 CF에 관한 얘기는 뺐다. 그러고도 혹여 무례하게 비칠까 싶어 몇 번이나 문장을 다듬고서야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길.

간단한 답변이었지만, 신중하면서도 배려심이 느껴지는 신현정 피디의 문자였다. *** 주방장님이 내주신 숙제를 풀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칼질이 즐거워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간은 엄청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강형식도, 이하연도 만나지 못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일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이런저런 모임에도 나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브랜드 런칭 때문이었다. 강형식은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느라 그랬고, 이하연은 얼마 전 중국에서 런칭한 패션브랜드 마케팅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 금요일이 되어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강형식의 오피스텔에 모인 멤버는 오늘도 같았다.

“엄청 밀리더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하철 타고 오는 건데…….”

내 얘기를 들은 류승렬이 조금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형, 아직도 차 없어요?”

“타고 다닐 일이 없는데, 뭐하러 사?”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죠. 요즘 차는 필수죠. 필수. 안 그래요? 누나?”

“그야 그렇지. 진영 씨, 요즘 돈도 많이 버는데 차 한 대 뽑으세요. 제가 예쁜 거로 골라드릴게요.”

박유나가 살짝 나온 배를 안은 채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김주형이 쳐다보고 있었고.

“참나. 그걸 왜 누나가 골라요? 형수님이라면 몰라도.”

“어머! 지금 차별하는 거니?”

“아, 진짜! 차별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죠. 당연히 형이 차 사는데, 애인이 골라야 하는 게 아니냐고요!”

진짜 별것도 아닌 거로 투닥거린다. 뭐, 그만큼 친해졌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좀 묘한 기분이긴 하네. 이하연을 두고 류승렬이 자꾸만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니고, 설사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민망하기만 한 호칭이었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형식이는?”

집주인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서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기지만, 그건 그거고 일부러 이하연은 얘기에서 뺐다.

“형식이 형이랑, 형수님도 곧 도착하신대요.”

아씨, 겨우 말 돌려놨더니 저 자식은 또 형수라네.

“야, 듣고 보니까 좀 이상하다? 하연이가 너보다 한 살 어리지 않아? 근데 왜 자꾸 형수님이라고 불러?”

얼씨구? 박유나가 기름까지 붓는다.

“형수님을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 형수라고 불러요?”

“와씨! 그럼 난 왜 그냥 누나야? 너, 이이한테는 형님이라고 하잖아?”

“아, 진짜! 오늘 왜 그래요? 형님, 누나 오늘 뭐 있어요? 왜 이렇게 까칠해?”

김주형은 그저 웃고만 있을 뿐,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현명함을 보였다.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류승렬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튀어나갔다. 아, 5천만 국민이 입을 모아 상남자라고 부르는 쌍천만 배우께서 저런 모습이라니. 아마 다른 데 가서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다들 와 있었네?”

“앙! 눈이 너무 많이 와!”

“춥지? 얼른 들어와.”

“형? 이거 뭐……. 오올! 맥주! 역시 형식이 형이 뭘 좀 안다니까! 누나! 우리 이참에 치킨 어때?”

“호호호. 치맥 좋지! 근데, 지금 눈 와서 금방 오려나?”

“에이, 누나가 뭘 모르네. 요즘은 앱으로 시키면 10분 안에 온다니까 그러네.”

말만이 아니었다. 류승렬은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터치하지 않아서 주문을 마쳤다.

“금방 올 거예요.”

녀석의 말대로였다. 방송이 시작하기 전에 오겠나 싶었는데, 무려 5분이나 남겨놓고 치킨이 배달된 것이다.

“와! 역시 맥주엔 치킨이라니까!”

“난 양념!”

“하앙! 다리 누가 먹었어!”

“날개 먹어요, 날개!”

“자, 한잔할까?”

모두들 기분 좋게 맥주와 함께 치킨을 뜯고 있을 때, TV에서 방송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들려왔다.

“한다!”

화면에 떠오른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로고 보이고, 실제로나 화면상으로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한진석이 등장하며 방송이 시작되었다. 류승렬이 말한 것도 그때였다.

“요즘 반응 장난 아니던데. 이러다가 진영이 형 완전 스타 되는 거 아니에요?”

그의 말을 이하연이 받아쳤다.

“새삼스럽긴. 원래부터 진영 씨는 스타라니까!”

그 말에 날 제외한 모두가 깔깔 웃고 있을 때, 한진석이 멘트를 내뱉었다. 드디어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3주짜리로 편집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페이슬리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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