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일단 썰어 (2)2021.04.21.
숨넘어간다는 느낌이 이런 거 아닐까? 천장에 닿을 듯 쌓여있는 자루들. 그 안에 든 건 무였다.
아, 젠장! 차라리 배추가 나은데. 한숨이 나온다. 내게 그저 ‘썰라’는 주문만 하시곤 어디론가 가버리신 주방장님이 급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어쩌랴?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좀 많죠?”
주방장님과 함께 자리를 뜬 이사장님을 대신해, 이곳 주방을 맡고 있다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묻고 있었다.
“그러네요. 많긴 많네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많았다.
“여기서만 먹을 게 아니라서요.”
무슨 말인가 싶어서 아주머니를 바라보자, 다른 아주머니들이 키득거리며 날 바라본다. 한데, 그 웃음이……. 놀린다기보단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뭐랄까. 여자들만 있는 공간…… 그것도 아줌마들만 있는 곳에 총각 한 명이 들어오니 그것만으로도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이런 거 좀 그런데. 멋쩍달까. 쑥스럽달까.
“실물이 낫네.”
“어머, 몸 좀 봐. 우리 남편이랑은 천지 차이네.”
“호호호. 비리비리한 사람이 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
“총각! 잘 좀 부탁해요?”
“아, 예…….”
하아, 이게 간단히 부탁한다고 말해도 될 양인가? 수백…… 아니 천을 가볍게 넘을 것처럼 보이는 무들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깍두기를 담그는 데 쓰일 겨울 무들을 아주머니들과 둘러앉아 물에 씻고 있을 때였다.
“……우리 재단이 운영하는 보육원이 전국에만 스무 개가 넘거든.”
“딱 스물여덟 곳이지.”
“호호호. 좀 많지?”
아주머니들은 어느새 말을 놓고 계셨고, 그게 오히려 날 편하게 해주었다. 문제는……. 스무 개 넘는 보육원……. 솔직히 이건 스무 개가 넘는 게 아니라, 서른 개가 조금 안 된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 거 아닌가?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보육원에서 애들에게 먹일 깍두기를 만드는 게 오늘의 미션이란 건데.
“깍두기는 저희가 담글 거고요. 자기는 무만 썰어주면 돼.”
깍두기까지 담그진 않아도 된다고 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와, 진짜. 이건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난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린 눈빛이 되고 말았다. 그렇긴 한데……. 웃긴 건 열 명 조금 넘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빙 둘러앉아 씻다 보니 어느샌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류승렬이 진짜 그렇게 잘생겼어?”
“킥. 왜? 잘생겼으면 어쩌게?”
“호호호. 뭘 어째? 그냥 그렇다는 거지?”
“녀석이 잘생기긴 했죠. 뿐만 아니라 힘도 세요. 저보다 나을 걸요? 아, 이참에 녀석도 확 부를까요?”
“어머! 진짜?”
“불러! 얼른얼른!”
“오호호호. 김 씨 좋아하는 거 봐!”
“내가 언제?”
까르르 웃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이러고 있으니, 예전에 함바집에서 일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때도 아줌마들이랑 이렇게 옹기종기 앉아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했었는데. 그것도 아침 점심, 두 끼……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던 수백 명분의 음식을.
“근데, 서 씨는…….”
“참네, 서 씨가 뭐야, 서 씨가? 서 셰프님이라고 불러야지.”
“호호. 맞네. 서 셰프님. 서 셰프님, 방송 잘 보고 있어요.”
“근데, 진짜 그거 진짜야?”
“예? 뭐가요?”
“진짜 막 과거가 보이고 그래?”
응? 이거 또 무슨 소리래? 난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그러던데? 게스트들 과거를 딱딱 맞춘다고.”
“그거 다 짜고 치는 거라니까, 그러네. 그지?”
“음……. 글쎄요.”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다 씨익 웃었다.
“제가 좀 신기가 있어서요.”
“어머? 진짜?”
“그럼 막 점도 보고 그래?”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아주머니들. 하얀 작업복에 흰 모자를 쓴 채 고무장갑을 끼고서 무를 씻고 있던 그녀들의 눈에서 빛이 난다. 그 빛나는 눈동자가 일제히 날 쳐다보는데……. 아우, 나 지금 뭔가 실수한 거 같은데? 레이저와 막상막하인, 어떻게 보면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 된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러다가 아주머니들 사주팔자까지 봐줘야 하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 서진영은 늘 그렇다. 뭐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나레이션을 향해 소리쳤다. 뜬금없이 튀어나와선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은근 부아가 치밀어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얘기했다. - 그는 꼭 자기 무덤을 판다. 그렇게 오늘도 열심히 삽질 중인 서진영인 것이다. 예, 예. 암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댁이 보는 나란 놈은 그런 놈이겠지. 하아,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농담도 통할 상대가 있는 거지. 어디 세계 최강의 대한민국 아줌마들을 상대로 장난질을 하겠나. 난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하하하. 노, 농담이죠. 다……당연히!”
“호호호. 근데 왜 목소리가 떨리는 걸까?”
“가만 보면, 진짜 귀엽다니까.”
“그러지 말고 이따가 우리 애 사주 좀 봐줘. 내년에 수능 봐야 하는데, 대학이나 갈 수 있는지.”
“난 어머니…….”
“우리 남편, 이번에 승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 그 많던 무가 어느샌가 새하얀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우야. 허리가…….”
마지막 한 개를 마저 씻고 일어서, 허리를 펴니 두두둑하며 관절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나에 비해 아주머니들은 훨씬 더 가뿐한 모습들이었다. 허리를 두드리곤 있어도, 그저 그뿐.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에서 외숙모의 얼굴과 함께 사모님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다들 밥 먹고 하지.”
“자자, 오늘은 비빔밥이니까 이리들 모여!”
양푼 비빔밥이었다. 근데, 그 양푼이 내가 생각하는 크기가 아니다. 진짜 말 그대로 양푼. 어지간한 솥보다 커서 십 인분은 너끈히 비빌 정도였다. 거기에 밥과 무채 그리고 고추장이 비벼졌다. 언제 했는지 계란 후라이들까지 들어가니 불그스름한 밥알에 윤기가 도는 게 제법 먹을 만해 보인다. 그걸 한가운데 두고서 숟가락만 들고 모여드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나! 먹성도 좋지!”
“호호호. 많이 먹어. 아드-을!”
“어머, 왜 서 셰프가 김 씨 아들이야?”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이 버는데, 이참에 확 그냥 우리 아들 삼으려고.”
또다시 까르르 웃는 아주머니들. 그러더니 다들 밥을 먹으며 한마디씩 거든다. 저마다 날 자기 아들 삼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개중엔 사위 삼겠다는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란다. ……띠동갑도 아니고, 띠띠동갑 와이프를 얻게 생겼다. 그렇게 한동안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고 나서, 잠시 쉰 뒤 또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서걱! 아저씨한테 받은 칼로 무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삭퉁! 삭퉁! 반으로 가른 무를 썰기 좋게 자른 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닥. 한입에 먹기 좋을 만한 크기, 어떻게 보면 점을 찍기 직전의 주사위 같은 모양으로 잘라냈다.
“요리사가 다르긴 다르네.”
“TV에 나오는 사람인데 당연한 거지.”
“우리 사위! 칼질 하나는 예술이네?”
“어머? 우리 아들이 칼질만 잘하는 줄 알아?”
“호호호. 그럼 뭘 잘하는데?”
또다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농담과 웃음소리. 생각하기에 따라선 엄청 열악한 작업 환경.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리대를 둘러싸고 무를 써는, 그야말로 단순하기만 하고 힘만 드는 노동을 하면서도 흥겨움이 가득한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고 만다. 그렇게 한참을 썰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닥. 그러다가 느껴졌다. 도마를 때리는 소리만이 아니라 손끝으로 전해지는 리듬감. 그건 일종의 감각이었다. 단지 귀로만 들리는 감각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하는 박자. 그 소리가 자극이 된 걸까? 몸이 절로 익숙해져 간다. 그 박자에. 물론 그런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운동과 노동이 다른 이유. 근육을 한계까지 사용해 한껏 팽창시킨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금 뜨겁게 달구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몸을 단련하는 게 운동이라면, 노동은 그저 필요한 근육만 사용해 쉴 새 없이 혹사 시킬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중간에 쉬는 과정이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상된 근육이 수복되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은 운동과 달리 갈수록 몸이 지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열량 소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근육 자체가 지친다는 의미다. 어쨌든, 무를 한 백 개쯤 썰었을 때부터 슬슬 어깨와 팔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허리며 다리까지 후끈하다. 슬슬 달아오르던 몸이 어느샌가 한계치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그래도 처음엔 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간만 그랬을 뿐.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달라붙어 썰어대고 있음에도 여전히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들을 보자니 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러다간 해가 질 때까지 썰어도 다 썰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칼질을 하는 손이 갈수록 빨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썰었을까. 팔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간다. 동시에 다리도 풀리고. 그런데 이상하게 동작은 점차 단순하게 반복되고 있다. 나 스스로가 마치 무를 썰기 위해 태어난 기계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더 희한한 건, 몸에서 힘이 빠질수록 정신이 몽롱해지며 집중이 된달까. 아니 정확히는 생각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 틈에 잡념은 사라지고, 보이는 건 무뿐이고, 오른손은 저절로 움직여 칼을 내리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깍둑썰기를 끝내고 도마가 비자마다 왼손은 보지도 않고 무를 집어온다. 이 일련의 과정이 아무런 계산도, 생각도 없이 저절로 이어지고 있다. 그걸 느끼지도 못한 채 작업을 지속해나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고, 그에 비례해 점차 팔뚝이 금방이라도 경련할 듯 떨리기 시작했는데……. 어? 어느 순간엔가 손목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는가 싶더니 팔목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사라져 있다. 하도 썰어대서 마비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을 뿐이다. 통통통통통통통. 어느샌가 바뀐 소리. 도마를 때리는 소리가 단순히 리듬감 있다고 말하기엔 힘든,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로 바뀌어 들리기 시작해서 그런지 기분이 즐거워졌다. 뭘까? 그저 무를 썰고 있을 뿐이다. 기분이 좋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재밌다. 이 기분…… 계속 느끼고 싶다.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어째 손동작도 매끄러워진 거 같다. 그러다가 놀랐다. 칼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무의 단단함과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게 칼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지고, 또 팔뚝을 타고 어깨로 올라 머리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신이 났다. 통통통통통통통통통통. 가볍게 두드리듯 칼질을 하고 있음에도 무는 마음먹은 대로 썰려 나간다. 마치 나 자신이 신들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정말이지 미친 듯이 칼질을 했고, 그때마다 무는 금세 분해되어 도마 위에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순삭이었다. 무 하나가 갈라지고, 썰리고, 깍둑썰기해서 수십 개로 나뉘는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칼질이란 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미친놈처럼 히죽히죽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신이 나서 칼질을 하고 있다가 불현듯 주위가 조용해진 걸 깨달았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다들 왜 날 쳐다보고 있는 거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와아!”
아주머니들 중 한 분이 탄성을 내질렀고, 어떤 아주머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보며 손을 쳐들었다. 그 손이 날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썰고 있는 무를 가리켰다. 통통통통통통통통. 아주머니들을 둘러보면서도 여전히 움직이는 손. 그 손끝에서 칼질이 이어졌고, 그 칼질에 무가 썰리고 있었다. 스윽. 깍둑썰기가 끝난 무들이 조각조각 나서 양푼으로 들어가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왼손이 가져온 무가 다시금 도마에 올라오는 순간, 통통통통통통통. 또다시 오른손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이게 지금 나라고?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데 손이 움직이고, 칼질을 하고, 무를 썰고 있다? 마치 머신이라도 된 듯 움직이고 있는 두 개의 손을 나조차 신기한 듯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묘한 눈길이 느껴져 쳐다보니, 문 쪽에서 주방장님이 날 바라보고 계셨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