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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일단 썰어 (1) (86/204)

#86. 일단 썰어 (1)2021.04.18.

말문이 턱 막힌다. 제품에 뭘 박아넣는다고? 헐. 미쳤네, 진짜. 하다 하다 이젠 내 얼굴을 넣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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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도 황당해서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왜 그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여긴 건지, 강형식이 걱정스럽게 물어오고 있었다.

“아, 아니. 그냥.”

그냥? 대답 한번 시원하게 잘한다.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다. 호프집에서 친구들이랑 수다 떠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 실장과 상무이사를 앞에 앉혀놓고서 제법 중요한 얘기를 하던 중에 이런 행동, 이런 말이라니. 설사 내가 원해서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건 아닐지라도 분명 실례다. 그런데도 한다는 말이 ‘그냥’이라…….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을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하루종일 차를 탔더니 좀 피곤했나 봅니다. 갑자기 집중이 잘 안 되네요.”

“아, 너무 우리 생각만 했나? 어쩌냐?”

강형식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날 바라보고 있다. 장동일 상무 역시 안타깝게 말한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들어가는 게 좋겠군.”

“아닙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일은 마무리 지어야죠.”

내 얘기에 장동일 상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일 생각만 하다 보니 서 셰프 사정은 고려치 못했군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계속 얘기하시죠.”

“정말 괜찮겠어?”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는 강형식. 그런 그를 다독이듯 장동일 상무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얘기 끝내는 게 서 셰프를 도와주는 걸 테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서두르기로 하지.”

장동일 상무는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하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강형식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난 얘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따라라라라라, 라라……. 나레이션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선택은 결국 서진영의 몫이다. 그야 그럴 테지. 상품에 얼굴을 넣든, 그보다 더한 걸 넣든 간에 결국 내 선택이겠지. 하아, 어쩐다.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나레이션은 간단명료하게 제시했다. - 서진영은 고민하고 있었다. 상품에 얼굴을 넣는다면 분명히 이슈가 될 테고, 그로서 강형식이 추진하는 브랜드 런칭에는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얼굴을 넣어야 하는 것도 아닐 터다. 서진영의 이름을 빌린 것만으로도 이슈가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닐 테고, 상품의 근본이 되어 주는 오혜금 여사의 손맛이 어딜 가는 것도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얼굴을 넣는 것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을 뿐,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 모두에게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 그러니까, 뭐야? 양자택일? 너무한 거 아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얘기잖아. 누군가는 얼굴을 넣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것보다는 나레이션의 태도 때문이다. 그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의도가 느껴진달까. 나레이션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품에 얼굴을 넣는 건 강형식의 사업에 도움이 된다. 반면 넣지 않는다고 해서 사업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효과는 적을 것이란 얘기. 아,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지금 얘기되고 있는 건, 따지고 보면 강형식뿐만 아니라 내게도 큰 기회임에는 분명하다. 내 이름을 앞세운다는 게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어떻게 봐도 나한테 이로운…… 아니, 큰 도움이 되겠지. 돈도 돈이지만, 인지도가 크게 오를 테지. 현대 사회에서 네임 밸류가 가지는 가치를 감안하면, 이건 그냥 기회가 아니라 앞에 ‘황금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넣어도 부족할 것이다. 아마도 강형식은 거기까지 생각해서 제안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 이기적인 건가? 그깟 얼굴 하나 넣는 게 뭐 문제라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았다. 그런 나를 저만치 앉아 있는 강형식이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장동일 상무는 앞으로 사업이 어떻게 진행될 건지 설명 중이었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떠올랐다. 이제까지는 정보만 던져주었을 뿐, 선택을 강요하진 않았지 않나? 그런데 왜 이번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설마? 나레이션……은 내게 선택권을 주는 것인가? 단순히 얼굴을 넣냐 그렇지 않냐가 아닌. 나레이션이 만들어가는 다큐멘터리 세상과 현실 세상에서 내가 취해야 할 스탠스. 아, 그런 건가? 순간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가 차가워졌다. 덕분에 한껏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으며 좀 더 냉철하게 내 현재 상황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철학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론 그렇게 심오한 질문은 아니고. 단지 이거다. 나레이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다큐멘터리 세상 속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강형식. 나라는 사람은 그저 보조적인 역할. 즉 엑스트라까진 아니라도 조연에 불과한 캐릭터다. 그에 반해 현실 속의 주인공은 나. 이 점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70억이 넘는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일 테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선 자신이 주연일 테니. 그럼 난 어느 쪽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걸까? 강형식이 주인공인 나레이션의 다큐멘터리 속 조연? 아니면 오로지 내가 주도적으로 끌어가는 현실 속의 주연? 지금 나레이션은 단순히 신규 브랜드 런칭…… 강형식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업에서 ‘내 얼굴’을 넣느냐 마느냐가 아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 머리를 스쳐 가는 무수한 상념 속에서 점차 생각들이 정리되고 있을 때였다. 나레이션이 말했다. - 서진영이 아주 바보는 아니다. 허!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하듯 옅은 신음을 흘렸을 때, 다시 한번 나레이션의 얘기가 들려왔다. - 여전히 둔하긴 하지만, 눈치만은 누구 못지않은 서진영인 것이다. 그걸 끝으로 BGM이 사라지고, 더 이상 나레이션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 강형식과 장동일 상무는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나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동일 상무는 하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큼, 이 정도면 충분히 먹힐 겁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이미지는 친근함과 더불어…….”

여전히 들려오는 장동일 상무의 얘기를 들으며 한차례 강형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내가 들어차 있다. 나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이다. 후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곤 결정을 내렸다.

“저기요.”

“……?”

“……?”

장동일 상무가 말을 하다말고 날 바라본다. 동시에 강형식도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날 보았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왕이면 넣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두 사람에게 한숨처럼 내뱉었다. 두 눈 꼭 감고서.

“로고 대신, 제…… 얼굴을.”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형식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싶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장동일 상무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괜찮겠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형식이 묻고 있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딨겠냐?”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녀석이 픽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재밌다는 듯 말한다.

“얼굴을 넣는다라……. 확실히 먹히긴 하겠네.”

“뭘 또 그렇게나. 신선한 발상도 아니구만.”

확실히 그렇다. 트렌드라고 하기는 뭐해도, 벌써 몇 년 전부터 간판이나 상품에 얼굴을 넣은 걸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게 나라는 게 좀 그럴 뿐이지. 하아, 상품에 떡하니 박혀있을 내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나마 사진이 아니란 게 다행이랄까. 결국, 브랜드 네임과 로고는 결정되었다. 상품명은 ‘셰프의 선택’. 로고는…… 젠장! 내 얼굴의 캐리커처로 결정된 것이다. 내 얼굴이 박힌 상품들이 전국에 쫘악 깔릴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을 때, 강형식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맙다.”

천천히 고개를 쳐들곤, 억지로 웃었다.

“그래, 그 마음 잊지 마라. 내가 지금 쪽팔려 죽을 것 같다는 걸 알고 있다면.”

내 농담 아닌 농담에 녀석이 크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숙소로 돌아와 이하연과 간단히 톡을 주고받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그녀에겐 말해주지 않았다. 내 이름을 건 상품이 출시된다는 건. 그걸 말하다 보면 내 얼굴이 들어간다는 것까지 말하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피곤함에 찌든 하루를 보내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기 전 눈을 뜬 나는 평소처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한 시간 남짓 동네를 달렸다. 그런 후, 출근해보니 웬일로 준석이 형이 이미 와있다.

“오, 서 셰프! 간만이야?”

“에이, 왜 그래요? 간지럽게.”

“뭐가? 서 셰프를 서 셰프라고 부르는데? 오호! 그러고 보니까, 어째 얼굴도 좀 달라 보이네? 때깔도 좋은 게……. 흐흐흐, 역시 방송물이 좋긴 좋은가 보다?”

장난을 걸어오는 준석이 형. 형의 툭툭 건드리는 손을 피해 몸을 비틀고 있을 때였다.

“어? 너 몸이…….”

“예?”

“뭐야? 왜 이렇게 단단해!”

말릴 틈도 없이 형이 내 옷을 들췄다. 그러자 드러나는 복근. 아우라지에 있을 때부터 해온 운동 덕에 요즘 들어 생겨난 초콜릿 모양의 복근을 보곤 준석이 형이 탄성을 터뜨린다.

“워우! 장난 아닌데? 완전 몸짱이네?”

“아, 진짜! 왜 그래요! 채, 창피하게!”

말까지 더듬고 있는 나를 준석이 형이 킥킥거리며 쳐다보다가 느닷없이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말도 없다. 그저 웃는다. 그 웃음에서 느껴졌다. 날 기특하게 생각하는 형의 마음이.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고윤수 주방장님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응?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시지? 의아해하면서도 인사를 드렸을 때였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말씀하셨다.

“서진영이. 니래 따라오라우.”

“……?”

다짜고짜 따라오란다. 뭐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쭈뼛쭈뼛 주방장님을 따라가는데……. 고윤수 주방장님이 돌아서며 덧붙이셨다.

“칼 챙겨가지고 오라.”

  *** 주방장님을 따라간 곳엔 차가 한 대 서있었다. 저번에 KS 그룹 진 회장의 팔순 잔치에 출장 나갔을 때 함께하셨던 분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출장인가? 이렇게 갑자기? 난 살짝 당황해서 물었다.

“저 혼자만 갑니까?”

주방장님은 대답해주시지 않았다. 대신 말씀하셨다.

“타라우.”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그러자, 차는 그대로 출발한다.

“어디로 가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윤수 주방장님은 툭 하고 내뱉듯 말씀하셨다.

“가보면 안다.”

그러곤 눈을 감으신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난 한숨을 삼켰다. 하기야 어디로 가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그래 봐야 출장이지. 또 어디 파티에 불려가는 거겠지. 그나저나 오늘도 준석이 형 혼자 고생하겠네. 김진호 셰프가 있으니까 그리 큰 걱정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안성댁 아주머니와 혜순이 누나에게도 왠지 미안하고. 자꾸만 이렇게 빠지다간 언젠가 잘리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고. 아, 모르겠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지며 어둠을 밀려가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야트막한 야산을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앞쪽으론 낡은 양탄자처럼 보이는 논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 건물. 2층짜리 건물이 길게 늘어선 모습과 함께 대문 위에 걸려 있는 간판이 보였다. 푸른 어린이 보육재단. 의아해서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주방장님이 툭 내뱉으셨다.

“뭐하네? 안 들어가고.”

“아, 예…….”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들어가는 주방장님을 뒤따랐다. 그러다가 문뜩 생각나서 뒤를 돌아보니, 우릴 태우고 온 차는 이미 출발해서 저만치 멀어져간다. 인사도 못 했네.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곤 다시 시선을 돌려 주방장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주방장님을 따라 마당……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한 명의 중년 여성이 반갑게 우릴 맞는다.

“오셨어요?”

“내래 좀 늦었디요?”

“아뇨. 저희도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기럼 다행이고. 인사드려라. 재단 이사장님이다.”

“아, 안녕하세요.”

“예. 오늘 잘 부탁드려요.”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미 얘기가 다 되어 있는 듯한 느낌. 대체 뭘 시키시려고 날 여기에 데려온 걸까?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이사장님이 우릴 이끌고 복도를 걸어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주방? 그것도 엄청 크다. 화로만 열 개가 넘고, 조리대도 넓어서 대여섯 사람이 늘어서 일해도 충분할 정도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주방 안에는 십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선 채로 인사를 해왔다. 그런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둥 마는 둥 하곤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서 눈길을 끄는 건……. 주방 한쪽에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있는 자루들이었다. 뭐지? 배추인가? 아니면 무? 뭔지는 몰라도 엄청난 양에 질려버린 채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주방장님이 말씀하셨다.

“뭐하네? 얼른 옷 갈아입디 않고?”

“예?”

피식. 웃으시며 주방장님이 자루들을 가리키셨다.

“저거이 오늘 네 일이디.”

“그, 그게 무슨…….”

“뭐긴 뭐이네?”

“……?”

“니래 저걸 전부 써는 거이야. 오늘 안에. 알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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