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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셰프의 선택 (4) (85/204)

#85. 셰프의 선택 (4)2021.04.16.

룸 안에선 연신 감탄사가 터지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양주가 들어차 있어야 할 샷 잔에 검은빛이 도는 액체가 담겨 있었고. 갖가지 간장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접시마다 고추장과 된장들이 종류별로 담겨 있다. 그것들을 처음 내놓을 때만 해도 사업하는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맛을 볼 수나 있을까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을 잘 보고 있었다.

“이건 그냥 양념장이 아닌 거 같군요. 음, 단맛이 익숙한데……. 아, 혹시 이거 고기 재울 때 쓰는 겁니까?”

헐. 상무라며? 그것도 우리나라 재계 1위에 빛나는 삼한그룹의 상무이사. 그런 양반이 저런 혀를 가져도 되는 거야? 와, 왠지 허망해지네. 반칙 같은 미뢰를 지닌 중년의 신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그러면서도 대답은 미루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건 돼지갈비용 양념장입니다.”

“호오. 과연. 근데, 실제로 갈비를 재우려면 양이 꽤 많이 들어갈 거 같은데요?”

“그렇진 않습니다. 갈비를 재울 때 쓰기보단, 집에서 간단히 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울 때 첨가하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물론 재울 때 사용해도 되고요.”

“아, 용도가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활용도가 높다는 말이니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느껴지네요.”

“그리고 이건…….”

여러 가지 종류의 간장과 고추장, 된장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양념장들과 쌈장들을 설명하는 데만 무려 한 시간 넘게 걸렸다. 덕분에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겨버렸고.

“좋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좋습니다. 이 정도 라인업이면 어지간한 회사에선 한동안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매우 영리해서 새로운 상품에 눈길을 잘 주지 않지만, 대신 한번 맛보고 마음에 들면 좀처럼 바꾸지 않으니까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한번 맛보고 마음에 들게’가 문제겠지.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마음에 드실 거라고.”

“허허, 녀석 보게. 지난번에 네가 가져온 간장 보고 브랜드 얘길 처음 꺼낸 게 누구였더라?”

“끄응. 아저씨시죠.”

강형식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호칭. 아저씨란 단어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언제가 녀석이 사내에서 진정한 자기편은 장동일 상무밖에 없다고 했던 말이 확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상품화할 물건들은 확인했고. 그럼, 이쪽에서도 보여줘야지?”

장동일 상무는 진짜 무슨 동네 복덕방 아저씨처럼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강형식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런 표정은 녀석에게만 보여주는 걸 테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강형식이 날 바라본다. 뭐야? 설마 지금 여기서 돈 얘기하려고? 언젠가 하긴 해야겠지만, 왠지 껄끄러운데? 친한 사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고, 오늘 사모님을 뵙고 올라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좀 그렇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BI 그러니까 브랜드명이랑 로고 몇 개를 만들었는데, 한번 볼래?”

짐작했던 것과 다른 얘기라서 좀 놀랐고, 한편으로는 의아해졌다. 아니 브랜드 이름이랑 로고 같은 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람? 이해할 수 없는 강형식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움직였다. 서류가방에서 10인치짜리 태블릿 하나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전원을 켰다. 그러더니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조작해 화면 하나를 띄우는 게 아닌가. 뭔가 싶어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뭔 이름들이 죄다……. 헐. 할 말이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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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셰프의 장맛. 서진영의 손맛. 서 셰프의 선택. SEO’S CHOICE 그중에 압권은 ‘서진영과 뚝배기’였다. 확 그냥. 생각 같아선 강형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번 달궈진 얼굴의 열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마 거울에 비춰보면 벌겋게 달아올라 있겠지? 아직 술이라곤 한잔도 마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내 모습이 얼마나 웃길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눈앞에 떠올라 있는 화면들…… 브랜드 네임 후보들이 문제였다.

“……이, 이럴 이유가 있습니까?”

더듬거리며 묻자, 예상했다는 듯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곧바로 몰래카메라였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랜드 아이텐티티, 즉 BI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알지?”

“대충은.”

“당연히 브랜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테고.”

자꾸만 유도 신문을 하고 있는 강형식이 괘씸했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어째 말려 들어가는 기분인데?

“그럼, 생각해봐. 현재 방송가에서 떠오르는 블루칩.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이번에 방송 나가면 그렇게 된다니까 그러네. 큼, 잠깐 얘기가 샜는데, 아무튼, 한창 주목받고 있는 요리사의 이름을 앞세운다는 전략은 여러모로 좋다는 평가야. 게다가 실제로도 이 제품들은 네가 만든 거나 다름없고. 그걸 마케팅에 활용하면 금세 이슈가 될 거야. 그러니 다른 이름을 쓸 이유가 없지. 안 그래?”

아 진짜. 저 자식은 쓸데없는 데서 말발을 세우고 있네. 지가 무슨 사이비 교주야?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수긍이 가고, 나도 모르게 납득이 된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데, 또 그랬다간 이대로 확정될 거 같아서 목에 힘을 주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걸까? 장동일 상무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녀석이랑 친구라고 하니, 편히 대하겠어요.”

“아,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는 건 실례고. 여튼, 이 사람이 먼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말씀하시죠.”

“원래 이 상품들의 소스를 개발하신 분은 따로 계시다지요?”

“예.”

“내가 비록 서 셰프처럼 미각이 그리 뛰어난 게 아님에도 단번에 알 수 있더군요. 이걸 만드신 분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사실이다. 사모님께선 장을 담그실 때마다 지극정성이셨다. 하기야 우리네 어머님들 중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모님께서 쏟으신 정성은 보통을 넘어섰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산속을 헤매며 직접 따와 조합한 수십 종의 나물만으로도 얘기는 끝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들에 들인 정성도 그에 버금갔고. 이를테면 볶음고추장 같은 경우, 한우를 씹힐 만큼 적당한 크기로 갈아 버무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견과류를 잘게 부숴서 넣고는 거기에 산나물 말린 가루까지 섞었는데, 그 손길 하나하나가 어찌나 조심스럽고 세밀한지……. 마치 자로 잰듯해서 요리사인 나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표정을 보니,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겠군요. 그래요. 지금 그 표정처럼 그분께서도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분이라도 그럴 거라 보오. 그래서 말인데…….”

“…….”

“그렇게 만든 제품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그, 그렇겠죠.”

“그러니, 이렇게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분 이름이 들어가야 맞겠지만, 인지도를 생각해 그분의 제자나 다름없는 서 셰프의 이름을 넣고, 대신 그로서 벌어들인 수익을 제대로 그분께 드리는 겁니다. 그게 맞지 않겠어요?”

……할 말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가장 합당한 결론이라. 하지만……. 내 이름이 들어가든, 그래서 속된말로 쪽이 팔리든 간에 한 가지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그게 뭐냐는 얼굴을 해 보이는 장동일 상무였다. 옆을 보니 강형식도 궁금하다는 표정이었고. 난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우선 수익배분 문제는 잘해주실 거라고 믿고요. 다만, 한가지…… 작더라도 좋으니, 상품 설명에 사모님 이름이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내 얘기가 끝나자, 룸 안에 침음이 흐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해도 됐고. 곤란하기도 할 테지. 방금 내게 ‘서진영이란 요리사가 직접 만든 간장’이라고 홍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렇게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다른 사람 이름을 넣자고 하니 인상이 구겨질 수밖에.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은 나도 물러날 수 없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모님 이름이 빠진다면 꼭 내가 그분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빼앗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만은 정말이지 사양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이 상품을 누가 개발했는지, 그 오랜 세월 직접 담그고 맛보고, 또 남편에게 더 좋은 음식을 먹게 하고 싶어 산으로 들로 헤매신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으니까.

“후우, 쉽지 않은 문제군요.”

장동일 상무는 방금과는 다른 표정, 다른 어조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한참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강형식이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외치듯 말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

“사모님 성함이 뭐라고 했지?”

“응? 오, 오혜금.”

녀석은 날 보곤 씨익 웃더니 얘기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문구를 넣는 겁니다. ‘오혜금 여사로부터 조리법을 전수 받은 서진영 셰프’라고 말입니다.”

“음, 나쁘지 않군.”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 그래서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따라라라, 라라……. 어?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한 배경음악. 언제 어느 때 나타나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BGM이지만, 이번만은 왠지 불안했다. 뭐지? 지금 상황에서 나레이션이 들려올 까닭이 뭐가 있지? 의아해져서, 아니 불길한 마음이 들어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마침내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장동일 상무와 강형식은 지금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간 여러모로 사업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또 그걸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온 강형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존에 있던 상품들만으로는 좀처럼 성과를 낼 수 없었고, 따라서 회장인 할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서진영이 가져온 맛간장은 그들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젠 맛 간장뿐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간장부터 고추장, 된장 그 밖의 양념장과 쌈장까지 갖가지 상품들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 관한 얘기는 생각 같아선 스킵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레이션은 동영상 같은 게 아니라서 스킵 버튼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나레이션을 들으며 불안함에 마음을 졸이고 있을 뿐이었다. - ……서진영의 이름이 들어가고, 오혜금 여사의 이름까지 넣기로 결정했으니 사실상 그들이 계획했던 일은 성사된 거나 마찬가질 터다. 이로써 강형식과 그를 손자처럼 여기며 돕고 있는 장동일 상무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오혜금 여사의 레시피대로 만들어낸 장들은 그 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 한 가지만 바꾸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임에도. 그, 그래서 뭔데……. 그게? 어째 선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불안해지는 대목이었다. - BI는 마케팅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다는 걸 감안한다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브랜드 네임만큼이나 중요한 건 로고란 점. 단순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란 얘기다. 그러니 바꿔야 한다. 그들이 시안으로 만들어온 로고 따위는 버리고. 단번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로고는……. 그래서, 뭐? 로고가 어떻다는 건데? 두근두근. 심장이 벌떡거리고 있다. 젠장. 가슴은 왜 이렇게 뛰는 거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다가 눈앞에 있는 물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머금을 때였다.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따라라라라 라라……. - 로고 대신 제품에 서진영의 얼굴을 박아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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