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CF (3)2021.04.07.
엉겁결에 악수를 나눈 뒤, 그녀가 내민 명함을 받아 내려다봤다.
시아 그룹 기획실. 실장 김서연. 하아, 미친다. 클럽에서 만났을 때 얘기하는 거로 봐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런 건가? 재벌 3세,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금수저일 테지. 그렇지 않다면, 저 나이에 무려 시아 그룹에서 실장 자리를 꿰찰 순 없겠지. 하기야 그때 강형식을 따라갔던 클럽 자체가 그런 곳이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층인, 그러나 아직 여물지 못한 정·재계 집안 출신들의 친목 파티. 그런 곳에 드나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금수저 인증이다. 그래도 그렇지 실장이라니……. 나보다 한 살인가 두 살인가 어리다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그냥 능력이 거의 어벤저스 급인 건가? 하긴, 이하연도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으니까, 놀랄 일도 아닌 건가? 아무튼지 간에 나참, 요즘 들어 만나는 여자들마다, 아니 사람들마다 어째 평범한 사람이 없냐? 난 명함을 가만히 지갑에 넣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를 한눈에 담는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지난번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차분한 모습이 인상 깊은 미녀지만, 내 기억 속에선 조금 다르다. 그날 밤 클럽에서 어딘지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그래서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눈빛과 함께 다른 이들을 차갑게 대하던 그녀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와 같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밤새 술을 마셨더랬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여자다. 한마디로 말해 벽이 느껴진다. 아, 물론 그때 클럽에서 보았던 금수저들에게도 벽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쪽과 이쪽은 조금 궤가 다르달까. 두 쪽 다 배경이며 사는 방식, 사고의 틀까지 모든 게 나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날 밤 보았던 재벌 3세들에게선 약간의 위화감과 함께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녀는 뭐랄까.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알파 별 알페라츠 간의 거리만큼이나 동떨어진 존재로 보인다. 그냥 쉽게 말해서 사는 세상이 다른 것뿐만 아니라 종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비슷하게 생겼어도 내가 붕어면, 저쪽은 잉어? 뭐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회의 내내 시선을 피하게 된다. 다행인 건 그녀 역시 딱히 내게 친한 척 굴지도 않고 일 얘기 외에는 달리 말을 걸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C 마트 쪽 비서실 직원과 권홍태 감독만이 계속 떠들고 있다. 특히 권홍태 감독은 다소 신이 난 듯 보였다. 나도 몇 번 본 적 있는 화장품 광고랑 냉장고 광고 등을 찍었다고 하는데, 무척이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컨셉은 이겁니다. 겉으로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알고 보면 속이 따스한 남자. 그 남자가 모는 차.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지금 말하는 그 남자는 누구죠? 설마 날 얘기하는 겁니까?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질문을 도로 삼킨 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 예……. 그렇군요.”
망할.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아먹는 기분인데. 어떻게 봐도 중산층, 아니 그조차도 어려운 서민에 불과한데 무슨 카리스마? 게다가 속이 따스해? 나 정도 되는 사람은 지천에 널리지 않았냐고. 하아, 이게 방송의 힘인가? 이미지란 말인데…….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근데, 그 카리스마와 따스함은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 건데? 참네, 배우들은 어떻게 연기하나 몰라? 갑자기 머릿속에 쌍천만 배우인 류승렬이 떠올랐을 때였다.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에 심취한 건지 모르겠지만 권태홍 감독이 허공을 손으로 움켜쥐며 얘기했다.
“묵직함과 친근함.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워딩이지만, 이게 바로 시아 자동차에서 이번에 선보이는 진정한 중형세단의 품격이란 이런 거다……라는 걸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거죠. 캬! 좋지 않습니까?”
야, 말은 참 청산유수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데? 난 대본을 비롯한 서류들을 들춰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대본대로만 하면 되는 겁니까?”
“하하하. 서 셰프님은 방송에서 원래 하시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거기 보시면 알겠지만, 일을 끝낸 뒤 차에 오를 땐 과묵한 느낌으로, 전화를 받고 목적지를 바꿀 땐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 되는 거죠.”
“글쎄요. 그걸로 말씀하신 느낌이 표현될까 모르겠네요. 애당초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라…….”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메이크업에서 스타일까지 싹 다 책임질 전문가들이 대기 중이니까요.”
“……그렇습니까?”
뭐, 그렇다는데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내 쪽에선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지. 여전히 걱정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촬영장에서만은 저쪽에서 책임져준다는 말이나 진배없으니까. 쯧, 광고 후의 결과야 내 책임이 더 커지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마 그때 돼서 받은 돈을 도로 뱉어내란 말은 하지 않겠지. 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일이고, 지금은 눈앞에 놓인 과제들만으로도 벅차다. 아무래도 미팅 끝나고 나면, 류승렬한테 전화해서 조언이라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촬영은 언제 들어갑니까?”
내 질문에 답한 건 C 마트 비서실 직원이었다.
“그 문제는 저희가 중간에 조정해서 최종 결정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일 자체는 대일 기획에서 주관하지만, 계약 당사자는 C 마트와 서진영 셰프님이니까요. 그런고로 모든 일정을 비롯해 세부적인 사항까지 전부 저희 측에서 관리하게 됩니다. 아,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시아 그룹 실장님을 모신 건 그래도 광고주인데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보시라고 모신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고요. 촬영 외의 모든 얘기는 저희와 하시면 되겠습니다.”
음, 이거 완전 매니저인데? 나로서야 그편이 나쁘진 않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네. 저희만 믿으십시오. 서 셰프님 바쁘신 거 다 아는데, 설마 무리하게 진행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
“이번 광고는 회장님께서도 꽤 관심 있게 보고 계시니, 제 얼굴을 봐서라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헐. 여담이라며? 무슨 여담을 그렇게 무섭게 날린데? 오늘로 두 번째 보는 그쪽 얼굴을 봐서라는 얘기는 그렇다 치고, 회장님의 관심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저 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기에 나로선 살짝 쫄 수밖에 없달까. 하아, 진짜 괜히 계약했나?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여자…… 김진숙 회장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썹에 힘이 들어간다. 그걸 본 걸까?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그저 듣고만 있던 김서연이 나직하면서 서늘한 한마디를 날려주신다.
“저희 회장님께서도 관심이 무척 크십니다.”
방점을 찍는구나. 그러니까, 뭐야? C 마트의 김진숙 회장만이 아니라 시아 그룹의 총수도 날 눈여겨보고 있다는 건데. 와씨, 이거 살 떨려서 광고 찍겠냐고. 후,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딱 이 정도가 적당한 거지. 응? 내 속내를 읽은 건가? 김서연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니, 썩소인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걸 나 말고 다른 이들은 못 본 모양이다.
“앞으로 잘해보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남자는 그저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 가시방석 같던 자리를 벗어나 거리로 나오는 순간,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우, 진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니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거다. 어쩌다 보니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고, 또 광고까지 찍게 되었지만 역시 난 소시민인가 보다. 고려 말 노비 해방을 부르짖으며 봉기했던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던 외침은 내게 해당 안 된다는 거지. 누군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왕이며 귀족이 다 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거야말로 진짜 철딱서니 없는 소리 아닐까. 확실히 대대로 세습되는 왕후장상 자체는 사라졌지만, 대신 신분제보다 더 무서운 자본의 논리라는 굳건한 벽을 쌓아 올린 새로운 기득권층. 내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왕보다, 귀족보다 더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죽하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까지 있을까. 아무튼, 되도록 이런 자리는 사절이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제발 잘난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시길.
“어?”
하여간 타이밍 하난 기막히다니까. 난 부르르 떨고 있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 바쁘지.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떠하냐?
“왜? 이참에 다 때려치우고 내 매니저나 하지?”
- 오! 그거 나쁘지 않네. 차라리 싹 다 정리하고 매니지먼트 회사 하나 차려볼까?
나원, 난 백 원짜리 동전을 던졌을 뿐인데 이 자식은 곧바로 백만 원을 베팅하네.
- 그래서 언제 찍는데?
강형식의 물음에 픽하고 웃고 말았다. 어떨 때 보면 이 녀석은 불알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또 별거 아닌 일에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화를 내는 등 호들갑을 떨지 않나.
“연락 준대. 오늘은 사전 미팅 같은 거라나?”
- 그런 건 그냥 전화로 해도 되잖아? 왜 그런 거로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고 지랄들이야!
흠, 이게 가진 자의 여유 아니 사람을 부리는 자의 마인드인가?
“글쎄다. 막상 와 보니까 별거 없긴 한데…….”
어째서 머릿속에 김서연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그래도 감독님 만나니까 진짜 찍긴 찍는구나…… 실감이 나네?”
- 크크큭. 야아, 서진영! 잘나가는데? 그러다가 영화 찍고 막 앨범까지 내는 거 아냐?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애초에 내가 니네 집에 들어갔겠냐?”
- 쿡, 모르는 거지, 사람 일은. 혹시 아냐? 네가 미운 오리였는지.
“꿈 깨셔. 내가 백조처럼 우아하게 날아오를 일은 없으니까. 뭐, 오리도 지랄하면 살짝 뜰 수는 있겠지만.”
- 아아, 의미 없는 논쟁은 여기까지 하고.
논쟁은 무슨. 그것도 그럴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성립하는 거지.
- 실은 너한테 말할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뭔데?”
혹시 또 맛간장 얘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서 살짝 긴장했다. 안 그래도 틈을 봐서 사모님께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긴 한데, 왠지 안 내켜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아직 전화도 못 드린 상황이었으니까.
- 너 찍는 김에 하나 더 찍어볼래?
다행히 맛간장 얘기는 아니……. 응? 지금 뭐라는 거지?
“뭘 찍어?”
- 뭐긴 광고지.
하도 황당해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뜬금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갑자기 웬 CF 얘기?
“너 막 나 밀어주려고 그러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다간 네 목 날아가는 수가 있다?”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찌나 시원하게 웃는지, 듣는 내가 다 절로 미소가 머금어질 정도다. 그거야 좋은 일이긴 하다만.
“웃지만 말고, 인마. 내 얘기 허투루 듣지 마. 전에도 말한 거 같긴 한데. 아무리 친구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냐?”
- 그래, 그래. 네 말이 맞긴 한데, 근데 그거 오해다. 내가 꺼낸 얘기가 아니거든.
“응? 그럼……?”
- 너 이번에 C 마트 쪽 하고 광고 계약하는 거 장동일 상무님도 아시거든.
그랬겠지. 녀석 통해서 법무팀 중 변호사 한 명이 내 서류를 검토해줬는데.
“그런데?”
- 원래부터 너한테 관심이 많은 분이신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된 거 아니겠냐? 너에 대한 진가를.
헉.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진가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그래서 뭘 찍으라는 건데?”
어차피 장동일 상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란 마음에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 뭐긴 뭐겠어? 식품 광고지.
“그쪽은 이미 광고 모델 있지 않아?”
- 아, 내가 말 안 했나?
“……?”
- 우리 이번에 새로 브랜드 런칭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