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 CF (2) (80/204)

#80. CF (2)2021.04.04.

박 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는 김진숙 회장은 창밖의 도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채로 습관처럼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들긴다. 톡톡톡…….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거슬릴 법도 하건만, 박 실장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만큼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패턴이란 얘기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제안서는 서 셰프에게 무사히 전달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조만간 서 셰프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톡. 책상과 부딪히던 손톱이 멈추자, 소리 또한 사라졌다.

“무시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면 부드러워 보이지만, 꽤 강단이 있는 친구니까요.”

“우유부단하진 않다?”

“그렇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김진숙 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불쑥 물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그럼, 어떤 식으로든 반응은 보인다 치고. 문제는 거절했을 때인데……. 대응책은 있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꼭 그 친구여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글쎄. 우리 쪽만 걸쳐 있다면 그 말이 맞긴 한데……. 일이 좀 복잡하게 됐달까.”

“.....”

“오케이. 그 문제는 여기까지. 다음 사안 부탁해.”

그녀의 지시에 박 실장은 일언반구 없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김진숙 회장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아니 어떻게……라고 해야 하나? 원래는 C 마트 계열의 광고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시아그룹 측에서 서진영을 콕 집어서 CF를 찍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동안에도 시아그룹의 광고야 김진숙 회장이 가지고 있는 대일 기획에서 도맡아 제작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나? 물론 남의 손을 빌려 서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거니 나쁘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왠지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느낌이랄까.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걸까? 김진숙 회장은 살짝 불길해졌다. 그런 그녀를 박 실장이 보고를 이어가면서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루 이틀 본 모습도 아닌지라, 현재 자신이 모시는 회장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말씀드려야 하나?’

그래서 잠시 잠깐 김진숙 회장의 조카인 김서연에 대해서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가 알기로 김서연이 단지 연애 감정만 가지고 일 처리를 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괜스레 나섰다가 집안싸움에 휘말릴, 즉 고래 싸움에 등이 터져나가는 새우가 되는 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실장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김진숙 회장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해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올리고 있는 보고의 중요도가 서진영의 CF 건만큼이나 매우 낮기도 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김진숙 회장의 개인적인 관심사로 시작되어 이렇게까지 판이 커진 서진영에 대해서 김진숙 회장이 좀 더 즐기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이었기에. 이를테면 유희인 것이다. 기껏해야 서진영이 끼치는 영향력이 대한민국을 뒤흔들 정도가 아니라면. 아직까지는 말이다.

  *** 연락을 받았다. 자신이 기획해서 올린 안건이 무사히 통과되었고, 조치 또한 발 빠르게 취해졌다는 것은. 그래서인지 지난번에 미국에서 구입한 회사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는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김서연은 무척이나 고무된 얼굴이었다. 뭐랄까.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받은 기분이랄까? 물론 서진영을 시아 자동차의 신규모델 CF에 기용하는 건에 대한 분석은 공적인 영역임은 틀림이 없다. 비즈니스에 관련해선 철저하게 효율을 추구해온 그녀로선 당연한 일일 터다. 거기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여태까지의 그녀를 생각하면 분명 그래야 하지만……. 김서연은 떠올렸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났던 그를. 좋은 집안에 태어난 것밖에는 내세울 게 없는 이들, 그녀의 눈으로 보자면 한량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친목 도모라는 명목으로 모인 클럽에서 처음 만났던 남자…… 서진영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그녀답지 않은 일탈까지 이끌어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절제로 주위로부터 감정이 거세된 거 아니냐는 평을 듣는 그녀가 밤새 술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남녀 여럿과 함께 호텔 방에서 잠들었었다. 그것도 무방비할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날 새벽, 조용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방을 떠나던 그 남자. 서진영을 떠올리곤 김서연은 작게 웃고 말았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변명해도 이번 일은……. 그 남자에 대한 흥미로 시작한 일인 것도 틀림없다. 만일 서진영에게 일체의 관심조차 없었다면, 애당초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보지도 않았을 테니까. 평소 쇼 프로 같은 예능프로는커녕 드라마조차 보지 않는 이유가, 뉴스를 빼곤 시청할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같아선 그 뉴스조차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기에 움직이는 시간에 잠깐잠깐 확인하는 거로 대신하고 있을 만큼 바쁜 그녀이기도 하다. 그런 마당에 일개 예능프로의 메인 셰프를 콕 집어서 CF 계약을 추진한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일이었다. 그만큼 파격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그러나…….

“재밌어.”

그 남자도, 현재 돌아가는 사정도, 또 그로 인해 지금쯤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고모의 반응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촬영장에서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게 됐을 때 서진영이 보일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 과연 그때도 재만 남을 정도로 삶을 불태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평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일 처리를 해나가는 그녀였다. *** 정말 일사천리라는 말이 뭔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강형식을 통해서 소개받은 변호사가 한차례 검토한 결과 계약서에서 어떠한 독소조항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의문이긴 했지만, 아마도 자신을 의식한 게 아닌가 싶다는 강형식의 말에 납득했다. 외삼촌댁까지 찾아왔을 정도라면, 이미 나와 강형식의 관계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검토가 끝난 후 곧바로 박 실장에게 연락을 취했고, 다음 날인 오늘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 다시 말해 박 실장이 내게 제안서를 주고 간 후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에 계약까지 전부 해치운 셈이다. 물론 그러는 동안 본업을 내팽개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주방 일에 최선을 다했고, 주방장님의 숙제를 풀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어제는 약간의 실마리까지 찾아내서 한껏 기분이 고양된 상태다. 아마도 운동을 꾸준히 한 게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긴 한데, 사실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칼질이라는 게 단순히 빠르냐 혹은 힘을 얼마나 주느냐만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건 그렇고…….

“헐!”

진짜 믿어지지가 않는다. 계약서에 따라 현재 내 계좌에 들어와 있는 계약금을 보고 있자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대체 공이 몇 개야? 몇 번을 세어봐도 바뀌는 건 없다. 1억 원. 이러니 다들 열심히 일할 생각들은 않고 로또를 사거나 연예인을 하겠다고 난리들이지. 쯧, 그러다가 패가망신하기가 십상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알려야지. 안 그랬다가 나중에 또 무슨 얘길 들을지 모르니까. 안 그래도 지난번 촬영 때 연락을 하질 않아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더랬는데. 참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집착 한번 쩐다. 뭐, 싫지는 않지만.

- 지금 막 계약 끝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제 톡을 보냈으니, 곧 답톡이……. 부르르르르. 엉? 다이렉트로 걸려오는 전화에 기가 막혔지만, 일단 받고 본다.

“여보…….”

- 꺄아아아아악! 축하해요오오오오!

이 한결같은 반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닌 이하연이 계약한 줄 알겠다. 그리고 막말로 대기업 그것도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라는 대현그룹 출신이면 1억은 돈도 아니지 않나? 아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하연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내가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서민적이라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치스럽다곤 말하기 어려운 여자가 그녀였으니까. 그게 아니라도 내 일을 이만큼이나 함께 기뻐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일일 테고.

“감사합…….”

- 앙! 그래서 우리 언제 만나요?

“…….”

- 왜에에에? 큰 건 하나 했는데, 한턱 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 그렇긴 하죠.”

어째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하아, 그럽시다. 이따 저녁에 봐요. 아, 바쁘면 어쩔…….”

- 안 바빠! 한 개도 안 바빠요! 응응. 어디로 갈까요? 나 스파게티도 좋아하는데. 아앙! 피자도 먹을까?

“……그러다 살찔 텐데요?”

- 쿠룹!

이건 또 무슨……. 하여간 웃음소리 하난 진짜 특이하다니까.

- 쿡쿡크……. 까짓거 찌면 찌는 거죠.

와, 완전 천하태평이네.

“하긴, 그 얼굴이면 몸매가 어떻든 상관없기는 하겠네요.”

- 응? 그거 지금 칭찬?

“……예쁘단 얘깁니다만.”

잠시 말이 없다. 그러다가 들릴 듯 말 듯, 정말이지 모깃소리만큼 작은 음성으로 물어온다.

- 저, 정말?

크크큭. 진짜 미워할 수가 없다.

“정말.”

- 리얼리?

이러다간 끝이 없을 거 같아서, 확 내질렀다.

“그래요. 하연 씨는 돼지처럼 뚱뚱해져도 예쁠 테니까, 오늘은 허리띠 풀고 마음껏 먹어요.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테니까.”

- 아앙! 그건 좀 그렇다. 나 그렇게까지 많이 못 먹는데. 아, 잠깐만요. 예? 아, 진짜.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자, 잠깐만요. 저기, 진영 씨…….

흠, 알 만하다.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인데.

“내일도 괜찮고, 모레도 괜찮으니까 편할 때 말해요. 무조건 하연 씨한테 맞출 테니까.”

- 진짜요?

“처음으로 기뻐해 준 사람인데, 그 정도도 못할까 봐요?”

어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째 대꾸가 없다.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 서, 설마 나한테 맨 처음 연락한 거예요?

“그러라면서요.”

- ……그냥 오늘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뇨. 그럴래요.

히유, 집착이 시작되는 조짐이 보인다. 안 되겠다 싶어서 딱 잘라 말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말씀 안 드렸는데, 형식이가 이번 일 많이 도와줬거든요. 그냥 오늘은 녀석이랑 술이나 한잔할 테니까, 바쁜 일 끝나면 연락 주세요.”

잠시 말이 없던 이하연이 살짝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에.

킥. 어째선지 웃음이 나오려 하는 걸 참고서 최대한 진지하게 얘기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일 끝나면 연락 줘요. 아, 그리고 아까 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 아!

급 환해진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그리고 바보처럼 웃는 얼굴도. 물론 그 얼굴이 커다란 눈과 긴 눈썹과 더불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라는 게 반전 아닌 반전이겠지만.

- 헤헤헤. 늦더라도 연락할 테니까, 술 마셨다고 안 받고 그러기 없기에요?

“걱정 마시고, 얼른 일보세요.”

기분이 좋아진 건지, 이하연은 밝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피식. 웃으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의무감에서 그런 게 아니라, 말해주고 싶은 이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이하연에게 말했던 대로 강형식과 만나서 조촐하게 둘만의 파티를 했다. 공구와 기름통, 자동차 부품들이 널려있는 정비창에서. 언제나처럼 맥주를 짝으로 갖다 놓고 마셨더랬다. *** 촬영 전 미팅을 위해 대일 기획사 측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다행히 저쪽에서 내 사정에 고려해 줘서 토요일 오후에 청담동 거리 어느 카페에서 그들을 만났다. 어차피 토요일 오후에는 주방일도 한산한 편인 데다가,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주방 식구들이 편의를 봐준 덕분이기도 했다. 늘 그렇지만, 그들에겐 고맙기만 하다. 미팅이 끝날 시간에 맞춰서 이하연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별문제 없으면 빠르게 끝낼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그리고 놀랐다.

“어?”

뭐지? 왜 저 여자가……? 거침없이 걸어가던 내 걸음은 한순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카페 안, 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을 제외한 남녀가 구면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남자 쪽은 C 마트 비서실 소속으로 박 실장을 대신해 지난번 계약 때도 봤던지라 이상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여자 쪽이다.

16561222417169.jpg

  김서연……이라고 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떠올린 이름 석 자. 아직 날 발견하지 못했는지 남자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그날 밤…… 그리고 그 다음날 호텔에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봤던 그 얼굴이 분명하다. 하아, 진짜 인생 참……. 버라이어티하네. 난 한순간 어쩔까 망설이다가 이내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리곤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테이블 앞에 이르러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저자세도 아닌 태도로 인사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다들 와계셨네요.”

“서진영 셰프님! 아, 두 분은 처음 보시죠? 인사들 하시죠. 여기 이분은 아시다시피 서진영 셰프님이시고, 이쪽은 대일 기획에서 나온 권홍태 감독님. 그리고 여기 이분은…….”

“김서연이에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어?”

C 마트 쪽 비서실 직원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처음 본 권홍태 감독도 다소 놀란 듯 입까지 살짝 벌린 채 나와 김서연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당사자 중 한 명인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머리가 둔하진 않습니다. 겨우 한 번 봤을 뿐인데 반갑다고 말씀드리는 건 좀 이상하고, 뜻밖이라서 그런가 조금 놀랍기는 하네요.”

당황스럽다는 걸 에둘러 말하며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그녀가 씩씩하다 못해서 과감하게 잡아챈 것도 그때였다.

“시아 그룹 일이니까요.”

“아, 그럼?”

“예. 기획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맞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그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