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CF (1)2021.04.02.
다소 황당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아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렇게 차를 타고 돌아갈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는데…….
“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지하철이 편합니다.”
“지난번에 회장님께서 연락하신 거로 아는데, CF와 관련해서 말씀드릴 것도 있고. 겸사겸사니까 부담 갖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도 하다. 대체 내가 어젯밤 외삼촌댁에서 묵은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찾아온 걸까? 설마 날 미행하기라도 한 걸까? 혹은 뒷조사? 어느 쪽이 되었든 기분이 상한다. 한편으로는 가족들 걱정도 되고. 그래도 건달이나 범죄 집단은 아니니까, 설마하니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겠지만.
“그래서 무슨 일이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상하신 거 같은데, 기분 푸시죠. 따로 연락드리고 편하신 시간에 찾아뵙고 싶었지만, 서 셰프님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란 알기에 될 수 있으면 이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어제 찾아뵐까 하다가, 휴일에 가족들과 좋은 시간 가지시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해서 이렇게 오늘 아침에서야 뵙게 되었습니다.”
박상진 실장. 잘은 모르지만, 한국 유통업계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대기업에서 비서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고, 또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의도가 의심스럽고 한편으로는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라면 저 사람처럼 할 수 있을까? 나이로 보나 직위로 보나 한참 아래인 사람한테 저런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세도 아니고, 상대방이 딱 동등한 느낌을 받을 만큼만 행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다. 점잖은 만큼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인 느낌이랄까. 난 한동안 박 실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그렇게까지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질문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를 알아들었는지 그가 대답했다. 한데, 의문형이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박 실장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미소를 옅게 지어 보이곤 얘기했다.
“누군가를 매료시킨다는 건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만, 한 가지만은 알고 있습니다.”
“…….”
“적어도 서 셰프님께서 한 사람…… 저희 회장님을 매료시켰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게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이고요.”
하아, 또 그 얘기인가?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어째서 김진숙 회장은 나한테 이렇게나 관심을 보이는 걸까? 내가 정말 김진숙 회장이 직접 스카웃을 제의할 만큼 대단한 사람인가? 이미 난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다. 난 그런 사람이. 그저 어쩌다 보니 삼한그룹 일가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에 보조 요리사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나레이션이라는 어찌 보면 사기에 가까운 이상야릇한 조언자 혹은 예지자를 얻게 되었을 뿐. 그것도 알고 보면 강형식을 돕기 위해 선택된, 이를테면 도구로서 역할을 맡았을 따름인 것이다. 물론 난 역할에 최대한 충실했다. 그 덕에 고윤수 주방장님과 김진호 셰프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급기야 방송까지 출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저씨랑 사모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상 주방장님과 나레이션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고. 한마디로 말하면, 내 힘으로 해낸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걸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자꾸만 이러니까 진짜 부담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한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곤 있지만, 이럴 땐 왠지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곱게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CF 제의도 하신 건가요?”
“아뇨. 그 일과는 별개입니다.”
“무슨 뜻이죠?”
“말씀드렸다시피, 서 셰프님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그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네요. 계속 그런 얘기를 하실 거면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날 가만히 보던 박 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안경을 살짝 추어올리곤 얘기했다.
“저희는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조금 기분 나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회사란 그런 곳이죠. 그런 곳에서 설마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곳에 투자를 하겠습니까?”
“계속하시죠.”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에선 서 셰프님께 이미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 광고를 내보냄으로써 입증됐단 얘깁니다. 그리고 이번에 찍으신 방송분까지 확보해서 확인했습니다.”
헐! 이건 또 무슨……. 방송이 나가긴커녕 아직 편집도 되지 않은 건데. 내가 가족들한테 가볍게 한 얘기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스파이? 뭐 그런 게 있다는 거잖아. 쯧, 그거야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 비록 내가 방송국 관련자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그 방송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밝혀가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박 실장의 보는 내 눈이 어느새 가늘어졌다.
“그래서요?”
“별거 아닙니다. 본인은 모르시는 거 같기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예. 서 셰프님은 상업성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것도 대단히.”
하아, 이젠 상품 취급인가? 뭐, 좋다. 어차피 나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더러운 돈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많이 벌고 싶은 욕구 정도는 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깨끗한 척, 고고한 척 위선을 떨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다만…….
“설사 그 말씀대로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댁내 회사의 입장인 거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박 실장이 웃는다. 실제로 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훗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괄목상대라는 말 아십니까?”
“…….”
“제가 회장님을 모신 세월이 12년입니다. 그런데도 처음 비서실로 발령 났을 때, 회장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듣고 있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니까.
“대들보가 되려고 하지 말고, 대들보가 될 만한 나무가 되라고 하시더군요.”
음…….
“제가 그 나무란 얘긴가요?”
“예. 그것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빠르게 크는 나무죠.”
“착시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 눈은 믿지 않지만, 회장님 안목은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거의 맹목적인 신뢰 앞에선 어떤 얘기도 먹혀들지 않을 터다.
“좋습니다. 다 알겠는데……. 그래서 대체 저더러 무슨 CF를 찍으란 거죠?”
어차피 요리 관련 CF일 거라고 생각하며 물었더랬다. 한데 들려온 대답은……. 하아,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마나 황당했는지 되묻는 내 음성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략기획실에서 뽑아낸 데이터입니다. 서 셰프님이야말로 그 광고에 가장 적합하다는 분석입니다.”
와, 나……. 진짜! C 마트 광고라면 이해나 하지. 그게 아니라도 식재료 광고나 라면 광고, 하다못해 치킨 광고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하지만, 이건…….
“자, 잠깐만요. 이건…… 진짜 말이 안 되는……. 아니 좀 그렇잖아요? 제가 그걸 어떻게 찍습니까? 장난도 아니고.”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걸 예상이라도 한 걸까? 박 실장은 그저 옅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미쳤네, 이 양반들.
“아니, 아니……. 그전에, C 마트에서 자동차도 만듭니까?”
*** 차가 멈춰 서자, 기사로 보이는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내려 문을 열어준다. 내리는 순간까지 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내 손에는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고. 어느새 반대편 문을 통해 내린 박 실장이 얘기하고 있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시 후, 멀어지는 차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내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다시 한차례 바라보았다. 뭐? 차는 만들지 않지만, 광고는 만든다고? 나 참, C 마트에서 CF를 찍자고 하기에 당연히 C 마트 광고인 줄 알았더니만.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부르는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 열 배는 많은 거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계약서에 바로 사인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런 나 자신을 마구마구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녀석한테 연락해야 하나?”
처음으로 강형식을 간절히 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 몰라. 일단 출근부터 하자.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7시가 다 되어 간다. 이러다간 진짜 지각이다. 서둘러 대문 쪽으로 다가가니, CCTV가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내 쪽으로 돌고 있다. 덜컹. 이젠 가타부타 말을 안 해도 열어주는 건 편하네. 그래도 인지상정인지라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곤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
“주말 잘 보냈냐?”
준석이 형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예. 덕분에요.”
빈말이 아니다. 내가 쉬는 만큼 다른 주방 식구들은 일한다. 당연히 고마워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촬영은 어땠는데?”
다른 주방 식구들…… 안성댁 아주머니와 혜순이 누나도 은근슬쩍 이쪽을 보며 관심을 보인다.
“아, 말도 마세요. 부산까지 내려갔다 왔다니까요.”
“응? 부산?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며?”
“그렇게 됐어요.”
“호오. 뭔지 모르지만, 엄청 궁금하…… 물어봐도 말 안 해주겠지?”
“흐흐흐. 저 잘려요.”
이게 지인과 가족의 차이란 거지. 미안하지만, 방송 전에는 함부로…… 큼, 수아랑 수연이 누나한텐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별일 없겠지?
“이번 게스트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던가?”
“예. 페이슬리 박이라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예고편을 본 네티즌들이 어떻게들 알아냈는지 이미 여기저기 올리고 있다고 하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그럼…….”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준석이 형이 계속해서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김진호 셰프가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뒤로…….
“아, 오셨습니까?”
고윤수 주방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뭐이가? 내래 여기 식구가 아니네? 왜 이렇게 딱딱하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준석이 형이 쩔쩔매고 있자, 고윤수 주방장님이 픽하고 웃으셨다.
“아새끼래 간이 콩알이네? 늙은이 농 한번 했다고 벌벌 기는 거이 뭐이네?”
“아니 그런 게…….”
“아니믄? 너무 오랜만에 왔다고 괄시라도 하는 거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어찌할 줄 모르는 준석이 형이 재밌어서 놀리시는 모양인데, 당사자인 준석이 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보인다. 에휴, 이래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는 거다.
“너는 또 왜 실실 쪼개고 자빠졌네?”
“웃는 거 아닌데요.”
“허! 니래 내 눈이 삔 거로 보이네?”
“원래 표정이 이렇습니다.”
“흠, 서진영이.”
“예.”
“그동안 발발거리면서 싸돌아다니더니 간이 좀 커졌네?”
“아닙니다.”
“기래서? 내래 내준 숙제는 다 한 거이가?”
헉! 깜빡하고 있었다. 망할.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며칠 사이에 하도 많은 일이 터지다 보니…….
“주, 죽어라 썰고 있습니다.”
“니래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야. 알간?”
“명심하겠습니다.”
“명심은 무슨. 말이 기렇다는 거이디. 다들 서 있디들 말고 일들 하라우.”
한바탕 몰아친 폭풍에 들썩였던 주방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난 문을 열고 나가 강형식에게 톡을 보냈다. 식사 끝난 후에 잠시 좀 보자고. 그리고 얼마 뒤……. 함께 숙소로 가서 서류를 살펴본 강형식 왈,
“글쎄다.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래?”
“2년 계약에 3억이면 그럭저럭이랄까. 네 인지도를 고려하면 많지도 적지도 않다고 할 수 있겠지. 아, 물론 지금 말고 광고가 나갈 즈음의 인지도를 말하는 거다.”
“음, 그런가?”
내가 보기엔 좀 많은 거 같은데. 내 주제에 솔직히 3천만 원이라고 해도 얼씨구나 할 판 아닌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자, 내 눈앞에서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강형식이 웃는다.
“너도 참 큰일이다.”
“뭐가?”
“소크라테스가 그랬다지? 네 주제를 알라고? 근데, 그게 네 경우엔 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뭐, 못 알아들었으면 말고.”
나참,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따라라라라, 라라……. 얼씨구? 갑자기 들려오는 BGM은 무엇? 설마? - 서진영은 바보 맞다. 가지가지 한다. 간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거냐? 예, 예. 양쪽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거 아무것도 아니지. 야야, 그렇다고 그대로 사라지는 건 또 뭐야? 설마 진짜로 그 말 하려고…….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근데, 좀 의외긴 하네.”
“그치? 자동차라니…….”
“아니. 대일 기획이 C 마트 산하에 있으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런데?”
의아해져서 쳐다보고 있을 때, 강형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이번에 신제품 출시하는 시아자동차 쪽 같은데, 거기 회장이 보통 깐깐한 게 아니거든. 뭐, 시아그룹이 C 마트 모태나 다름없으니 상관없나?”
“어 그래? 시아그룹이 C 마트랑……?”
“아, 시아그룹 회장이 김진숙 회장 오빠거든.”